위험하다니까

[과장님, 잘 지내십니까?]
업무 시간이라 가볍게 문자를 보내봤는데 대뜸 전화가 왔다.
-어, 서준 씨. 오랜만.
“지금 업무 시간 아닙니까?”
-맞지. 지금 업무 중이야.
“사무실에서 저하고 전화하셔도 괜찮습니까? 곤란해지시는 거 아닌가요?”
-괜찮아. 여기는 비품 창고라 지금 나밖에 없거든.
“비품 창고요? 홍보부가 왜 이 시간에 거기 있습니까?”
그 회사 비품 창고는 거의 마경(魔境)이다. 크기도 크고,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사실상 반 쓰레기장.
-찬밥이 부서가 어디 있어? 비품 정리하고 분류하라는데 해야지. 언제까지 하라는 말이 없어서 대충 적당히 하고 있어. 마음은 편하다. 여기 혼자 있으니까 눈치도 안 보이고.
“.......”
-뭐야, 나 괜찮아. 슬슬 입질이 온다고. 혁신이 어쩌고 하는 마당에 나를 이 상태로 끌고 가긴 귀찮은 모양인데.
“과장님. 저 이제 아예 전업 게이머로 나섰거든요? 생각보다는 훨씬 쏠쏠해요. 나중에 뜻 이루시고 정식 해고로 처리된 다음, 생각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허허. 말이라도 고맙다.
하긴 지금 게임으로 먹고산다고 하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 게임 때문에 잘렸는데.
나도 스타 코인의 희망 안 보였으면 아예 발도 안 들였을 거니까.
그냥 내가 쓰던 아이템 물려주면서 사냥이나 던전만 데리고 나가도 과장 월급만큼은 뽑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저 성실함이면 금방 가능하고도 남지.
-그런데 왜 전화했어?
“그 회사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열더라고요. TOOL 배 후기지수 비무대회라고. 혹시 소식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합의금도 아직 지급 안 하는 주제에 뭘 저렇게 돈을 팍팍 쓰나 싶어서요.”
-아, 그거. 나도 좀 주워들은 게 있지. 업무에선 배제됐지만 귀가 없는 건 아니니까.
“아는 대로 좀 들려주십쇼.”
-우리 후기지수는 고정우야.
“네? 걔는 이미 100레벨이 훨씬 넘었을 텐데요?”
-후기지수 대회 기획한 후에 회사 차원에서 달려들어서 처음부터 다시 키웠다더라. 거 뭐라더라? 버스? 하여간 부사장 전 길드원들 총동원해서 레벨 맞추고, 공금 들여서 장비도 기깔나는 거로 뽑아줘서 사실상 100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일 거라던데?
그런 거였군.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최고수 레벨에선 답이 없으니까 100레벨로 하향지원해서 양학하겠다 이거지. 후기지수라고 그럴듯한 명함도 달고.
-고정우 우승시킨 다음, 우리 회사 마스코트로 키워서 길드도 창설할 것 같더라고. 걔가 뺀질해서 그렇지 마스크도 나름 괜찮잖아. ‘TOOL’ 상표 갑옷에 딱 박고 종횡무진, 그러다가 임원 되고, 부사장 자리 물려받고 그런 거 아니겠어?
김 과장과 전화를 마치고 나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새끼. 세상 편하게 살려고 하네?”
결심했다.
내가 저거는 난장판으로 만들고 만다.
* * *
당장 오후에 후기지수 대회에 참가 신청하러 갔다.
거기엔 얼마 전까지 봤던 회사 직원들이 나와서 접수와 함께 사은품으로 게임 내에 메테오와 콜라보해서 만든 에너지바를 나눠주고 있었다.
‘저기 뒤에 있는 게 부장인 모양인데.’
외모 튜닝이 잘 돼서 불룩 나온 배가 사라지고, 얼굴도 쾌남형이 되었지만, 원래의 이목구비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럭저럭 알아볼 만하다.
그렇다면 부장이 굽신대고 있는 저 남자는.
‘부사장.’
이 모든 사태의 주범.
나 개인으로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서 감사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건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다.
‘무슨 길드의 장이었다더니 확실히 아이템 수준이 대단해 보이는군..’
주변을 더 둘러봤지만, 고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분!”
어느 틈에 내 차례가 되었다.
“여기 개인 정보 등록요.”
여직원이 내민 종이에 지장을 찍자 이름과 레벨, 그리고 등록번호가 나타났다.
“1892번?”
“네. 지원자가 많네요.”
얼굴은 대충 알아보겠는데 도통 어느 부서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 여직원이 등록번호가 찍힌 종이와 에너지바를 건네주었다. 얼굴에 ‘피곤’이라고 쓰여 있었다.
“예선 일정 조절이 있을지 모르니 메일함, 공고 잘 확인 바랍니다. 다음 분!”
“아, 회계!”
“네?”
“회개! 회개해야 합니다. 영혼이 맑아 보이시는데 로스트 디바인교 입교하실 생각 없으신지?”
“아이, 정말 가뜩이나 바쁜데. 다음 분!”
괜히 의심받을 소리를 해버렸다.
갑자기 어느 부서였는지 생각이 나는 바람에.
대충 둘러댔으니 괜찮겠지.
⋮
접수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살짝 늦게 연무장에 도착했다. 출석이 막바지였다.
하지만 괜찮다. 마법 수업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은 마지막이니까.
“아싸.”
“넵!”
“내 수업 마지막이라고 아주 뻔뻔해? 늦은 주제에 당당하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바람, 전격 계열 마법, 역시 아는 거 없지?”
“죄송합니다!”
“기대도 안 했다. 조교야, 데리고 가라.”
조교는 역시 연무장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내게 마법을 주입했다.
라이트, 라이트닝 볼트, 윈드 애로우 세 가지였는데 개인적으로 라이트가 가장 반가웠다. 이제 다른 아이템 없이도 어두운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쉽게 되었다.
내가 라이트를 띄우는 것을 본 조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웃사이더 님은 마법에 소질이 있어요.”
“네? 제가요?”
“시전 속도, 마법의 컨트롤, 마법의 안정적 유지, 레벨 대비 뛰어난 위력. 며칠 지켜본 결과 어느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어쩐지 교수님이 이번 기수에 가장 총애한다 싶더니만.”
“네에?”
아니 조교 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매일 구박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총애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교수님이 다른 사람 이름 부르는 거 보셨습니까?”
“······.”
“저희 기수에 제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잘 압니다. 어쩌면 중급 터득한다고 오시면 조교로 삼으려고 하실지도 몰라요.”
이건 위험하다.
대학원생으로 간택당할 수 있다니.
필사적으로 아이컨택을 피한 끝에 더 이상 이름을 불리지 않고 ‘체인 라이트닝’을 배우는 데 성공했다.
[액티브 스킬 ‘병풍’ 획득!]
[스킬 성공 시 상대의 인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성공 확률은 지능의 차이에 비례합니다.]
너무 필사적이었던 탓일까?
뜻하지 않은 스킬도 하나 추가로 얻었다.
은신과 비슷한 듯 다른 이 스킬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움직이면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은신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지능이 현저히 높은 상대라면 효과가 없는 것이다.
수업이 끝난 후 사용해 본 결과, 동기들은 나를 보고도 못 본 듯 스쳐 지나갔지만, 시바 교수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고 나가 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으어, 소름.”
관심 안 끌려고 쓴 스킬 때문에 더 큰 관심을 끌어버렸다.
* * *
“···가이드샷이란 게 상당히 아프더라고. 이젠 활도 좀 제대로 된 걸 들고 다녀야겠어. 그러니까 근처에··· 김 비서야, 내 말 듣고 있니?”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다. 계속 봐라.”
지금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전 회사에 확실하게 똥물을 뿌리리면 레벨업을 더 해야 한다. 아무래도 100레벨 싸움에 33이 끼어들려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으니까.
그래서 저녁 먹으면서 근처 던전에 관해 물어본 것인데, 김 비서는 그만 내가 구해준 의류 카탈로그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얼마까지 생각하고 오셨어요?”
“그냥 별생각 없이 들고 온 건데?”
김 비서의 눈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건 위험하다.
마치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가 사료 앞에서 이성을 잃기 전에 보이던 눈빛 비슷하다.
이럴 땐 브레이크를 밟아줘야 한다.
“50골드! 50골드까지로 하자!”
“쳇.”
수도의 옷 가격은 상당히 범위가 넓다. 그냥 안에 받쳐입는 가벼운 옷은 3, 4 골드짜리도 많다.
하지만 파티 의상으로 가게 되면 한 벌에 수천 골드짜리도 있다. 내가 예전에 경매장에 팔았던 자잘한 보석들이 그런 옷의 장식으로 많이 쓰인다.
“아아, 남의 물건을 가지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면 0.00001초 안에 선택해 줄 수 있는데. 제가 가질 것을 ‘기호’라는 모호한 키워드로 시뮬레이션하려니 연산의 난도가 급격히 올라가네요.”
“어, 천천히 봐.”
나는 김 비서를 그대로 둔 채 다시 로파로 돌아갔다.
* * *
오랜만에 그리핀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 북부 전선으로 왔다. 그곳에서 포니투를 타고 길을 따라 더 북쪽으로 이동.
이제부터는 사실상 빙룡 벨디브의 영역이다.
아직 초입에 불과하지만 필드에는 선공 몹밖에 없고 밀도도 높다.
게다가 레벨도 50 이상.
“주인님, 여기는 너무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무슨 분위기가 이러냐.”
“게다가 이곳 친구들은 어찌나 생긴 것도 못생겼는지! 아, 미영 아가씨 보고싶다, 히힝!”
“시끄럽다. 여기 몹들 다 불러모으려고··· 아니지. 그냥 떠들어라.”
목표로 한 던전, 다크 엘프의 숲은 50레벨 권장이다. 입장 최소 레벨도 35. 내 레벨이 33 끝자락이니까 이곳 필드에서 사냥으로 35를 만들고 들어갈 계획이다.
‘빠른 레벨업을 위해서는 무리를 좀 해야지.’
혹시 모르니까 동료부터 소환하자.
“빈혈이 나와라.”
“그워어! 적인가!”
“아직 아냐.”
“응? 그럼 나 왜 불렀나, 마스터.”
“같이 좀 걷자. 이 길로 쭉, 10분만.”
나는 어리둥절한 빈혈이를 데리고 포니투의 고삐를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마스터, 같이 걷자면서 왜 자꾸 내 뒤에 서나?”
“어, 그게···.”
-부웅! 쾅!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강한 타격음이 들리고 빈혈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워억!”
빈혈이를 쓰러뜨린 것은 곤충형 몹 포이즌 호넷. 강한 몸과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기습이 매서운 녀석이다.
[기습 직후 충돌의 여파로 잠시 멈추게 되니 그때를 놓치지 마세요.]
“오케이.”
-깡!
[체력이 30% 이하로 줄어들면 독침 공격이 시작되지만··· 한 방에 끝났으니 됐네요.]
잘 모르는 고레벨 지역으로 가는 것이라 김 비서에게 서포트를 부탁했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제 말대로 방패를 세우니 편하셨죠?]
”그렇긴 하네.”
그 방패라는 게 고기··· 라는 게 문제지.
형편없이 고꾸라진 빈혈이가 좀 보기 민망하지만 내가 저 꼴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워··· 지금 뭐였나, 마스터?”
“어, 벌 같은 건데 저기 떨어져 있어. 집어 와.”
숲속으로 들어가 호넷의 사체에서 독침과 전리품을 획득한 빈혈이가 돌아올 때는 두 마리가 더 달라붙어 있었다.
“그워! 마스터! 살려···.”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26레벨에 불과한 빈혈이는 연이은 공격에 역소환됐지만, 그 사이 아이스 미사일에 맞아 느려진 호넷을 정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최고의 낚시 아닙니까?]
“그, 그래.”
[도움이 되었다 생각하신다면 의상구매비를 60골드로 올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레벨을 35까지 올리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소환과 역소환, 그 끝없는 수레바퀴 속에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빈혈이는 점점 과묵해지고 내 레벨은 쭉쭉 잘도 올라갔다.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레벨 차이가 크게 나는 던전을 고른 결과.
상의와 참교육 3단계 성장, 레벨 39.
40 레벨 궁수 전용 템인 [타락한 엘프의 소망] 풀세트 획득.
그리고 결국 김 비서의 의상구입비는 100골드까지 올라갔다.
▶레벨: 39
▶종족: 인간
▶성별: 남
▶칭호: 솔플의 제왕, 그건 내 잔상입니다만, 특급 배송, 분노조절장애, 미친개, 바퀴벌레
▶HP: 669/669 MP: 513/513
▶공격력: 3780, 방어력: 894
▶힘: 61(+191), 민첩성:61(+155), 지능:81(+90), 체력:62(+161)
▶액티브 스킬: 내려치기, 맹렬한 돌진, 참격(검), 빠르게 찌르기(단검), 분쇄(둔기), 밀치기, 방패 세우기, 방패 투척(방패), 올가미, 2연사, 낙인, 멀티플 샷, 가이드 샷 (활), 정권 지르기, 천근추(체술), 매직 애로우, 아쿠아, 아이스, 아이스 미사일, 아쿠아 볼, 스노우볼, 파이어, 파이어 볼트,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볼, 파이어월, 록, 스톤애로우, 록버스터, 윈드애로우, 라이트, 라이트닝애로우, 체인 라이트닝(마법), 응급 침술(치유술), 소환(소환술), 집중, 병풍(보조)
▶패시브 스킬: 제국 보법, 일점 폭발, 인내, 명상
▶전문 기술: 요리, 무두질, 약초 채집, 대장, 수리, 보석 세공, 금속공예, 타투, 화장, 목공예, 채광, 가죽세공, 마공학, 연금술, 재봉술, 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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