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 졸업

“네, 오늘 체험! 직업의 세계 시간에는 타이한 제국대학에서 조교로 재직하시면서 플레이어 출신 첫 정교수 임용에 도전하고 계신 ‘마법의매직’ 님을 모셨습니다. 잠시 소개 부탁드릴까요?”
현실에서도 유명한 가수이자, 로스트 파라다이스 내에서도 이제 막 바드 플레이로 첫발을 내디딘 여성 진행자 ‘제로아’의 질문에 남자는 앞을 두리번거렸다.
“카메라, 여기 보면 되나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타이한 대학 마법 학부 원소 학과의 시실리아 바이겔만 교수님 아래에 몸담고 있는 4년 차 플레이어 ‘마법의매직’이라고 합니다.”
“로스트 파라다이스 4년 차면 상당히 초반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수많은 직업 중에 마법 교수의 길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원리로 움직이는 학문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 마침 시실리아 교수님께서 저를 잘 봐주셨거든요. 어쩌다 보니 그때까지 진로로 삼을까 고민했던 전사의 길을 버리고 계속 교수님 밑에 있게 됐습니다.”
“시실리아 교수님이면 현 마법부장 교수님이시죠? 아름다운 소녀의 외모와 자상한 가르침으로 이름이 높으시더라고요.”
“아, 아름다운 건 항상이지만 자상함은 복불복입니다. 다행히 제게는 자상한 편이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럼, 오늘 하루 일일 조교로 ‘마법의매직’ 선배님을 따라 조교 생활을 탐방해 보도록 할까요? 같이 외쳐 주세요. 출발!”
“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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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아는 마법의 매직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이건 힐링 포션 같은데요. 이렇게 많이 준비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오늘이 초급 아카데미 39기 졸업시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나네요. 무슨 대규모 레이드 가는 것처럼 많은 양을 준비하셨어요.”
“전사부, 마법부가 동시에 시험을 보다 보니 응시 인원도 많고 다치는 일도 많거든요. 자, 저 박스 하나 드시고 따라오시죠.”
제로아는 박스 하나에 손을 뻗었다.
“윽! 선배님 이건 너무 무거운데요?”
“스트렝스!”
박스를 붙잡고 낑낑대던 제로아는 마법의매직의 영창이 끝나자, 박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머!”
“마법 학부 조교가 되면 머리를 많이 쓸 것 같지만 의외로 힘쓸 일이 더 많습니다. 이럴 때 스트렝스 마법은 상당히 유용하죠.”
“그렇군요. 그런 마법을 학생들도 배우게 되나요?”
“몇 가지는요. 학생들은 5일 차에 스트렝스, 헤이스트, 그리스를 배웠습니다. 학생 중 하나는 페더 폴이라고 추락 시 몸을 가볍게 만드는 마법도 추가로 하나 배웠고요.”
한 명만?
그런 건 차별 아닌가?
제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른 학생들은 페더폴을 안 배웠나요?”
“그건···.”
마법의매직은 그날을 떠올렸다.
불쌍한 아웃사이더는 전사부도 같이하는 관계로 체력이 가장 좋았다.
따라서 보조마법을 담당한 교수가 아웃사이더를 불러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헤이스트를 걸어 속도를 빠르게 해놓은 상태에서 추가로 그리스를 걸고,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마법의 효과를 시연하는 교보재로 쓰인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다가 한번 발을 헛디뎌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치며 넘어졌다.
죽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곧 정신을 차린 아웃사이더는···.
‘웃고 있었지.’
그 순간을 떠올린 마법의매직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저 남자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넘어져도 안 다치는 마법 가르쳐 달라며 조르는 아웃사이더에게 결국 교수는 페더폴을 하나 더 가르쳐주고 말았다.
교보재 역할 하다가 죽다 살아나서 그러는 데야 교수고, 학생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로장학생 비슷한 거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제도가 있었나요?”
“제도는 아니고 특수 케이스입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로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배님, 그런데 이 상자는 왜 이렇게 차갑죠?”
“그 상자에는 냉기 마법이 부여되어서 그렇습니다. 시험 시간 동안 야외에 방치되는데 변질되면 안 되니까요.”
“부여 마법이란 것도 있는 거였군요.”
“그렇지요. 물론 원소 마법 등 기초가 되는 마법을 배운 후에 배울 수 있는 응용 편이긴 합니다만.”
“신기하군요. 학생들 과정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나요?”
“그렇습니다.”
마법의매직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다른 마법사 지망생들은 화염, 또는 전격 부여 마법에 가장 흥미를 보였다. 전사와 파티를 이룰 때 그런 계열의 인챈팅이 가능하면 파티 내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웃사이더는 유독 냉기 부여에 집착했다.
‘지하실이 어쩌고, 냉장 보관이 어쩌고 하던데. 로파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소린지···.’
아무래도 과몰입해서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짐을 들고 대 연무장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제로아는 마법의매직을 따라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교수님, 이분이 오늘 방송국에서 일일 조교로 나오신 제로아 님입니다.”
“응, 그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제로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 누님. 웬일로 방송국 제안을 받아들이셨소?”
울룩불룩 근육질의 거한이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제로아는 놀라지 않았다.
전사부장인 다비드 교수가 마법부장 시실리아 바이겔만 교수보다 어린 데다 어린 시절부터 친한 사이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 타면 조교들 좀 더 들어올까 해서 그랬지.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서 일 년을 버티는 놈이 없어.”
“그건 아무래도 누님 성격 때문···.”
“뭐야?”
“노, 농담이오. 하여간 더 들어오면 좋겠네. 그래야 매직군이 더 고생 안 하고.”
“흠.”
제로아는 마법의매직을 바라보았지만,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저, 다비드 교수님. 오늘 시험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시실리아 교수는 아무래도 오늘 까칠 모드인 것 같으니 좀 더 만만해 보이는 다비드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아가씨도 오늘 우리 조교니까 알아 둬야지. 전사부는 전사부끼리, 마법부는 마법부끼리 토너먼트로 대련을 펼치고 마지막에 그 우승자끼리 겨뤄서 통합우승자를 가린다네.”
마법의매직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각 조 4강에 들면 경험치가 차등 지급되고 우승자에게는 칭호도 부여됩니다. 이 아카데미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NPC인 교수보다 플레이어인 조교가 좀 더 유용한 팁을 알려주었다.
“아마도 이번 통합우승은 우리 전사부에서 나올걸?”
“뭐라? 이번에도 통합우승은 마법부야.”
다비드와 시실리아 교수는 유치한 설전을 시작했다.
“다비드 네가 날 이긴 적이 있던가?”
“아이, 누님 왜 또 어릴 적 얘기를. 그야 어릴 때만 대련해 봤으니까 그렇지.”
“네 기준에는 18세도 어린애냐? 그 정도면 전사로서는 훌륭한 나이 아냐?”
“내가 지금 누님 때렸다간 사고 난다니까? 그리고 누님 아버지한테 내가 무슨 소릴 들으려고.”
제로아는 슬슬 험악해지는 두 교수를 불안한 심정으로 쳐다봤지만, 전사부 타 교수나 조교들, 마법부 교수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대로 그냥 둬도 돼요?”
“아, 원래 저러시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그것보다 대련에 집중하시죠. 학생이 다치면 바로 포션을 지급해야 하니까.”
제로아는 조교의 말대로 이미 시작된 수강생 간의 대련을 관찰했다.
좌측에서 전사부, 우측에선 마법부의 대련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조교의 말 그대로 학생들은 진지한지 제법 매서운 공방이 오고 갔다.
“지금입니다! 승부가 났으니 전사부에게 포션을 지급하고 오세요.”
“벌써?”
제로아는 바닥에 쓰러진 패배자에게 먼저 포션을 건네주고, 승자에게도 포션을 건넸다.
남자는 받은 포션을 주머니에 챙기고 연무장 밖으로 나오더니 주섬주섬 낡은 침통을 꺼내 자신의 몸에 찔러 넣었다.
제로아가 조교의 옆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응급처치를 끝낸 승자는 옆 대련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어? 저 사람 왜 저리로 가죠? 저기는 마법부인데?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대로 간 거 맞습니다. 저분은 동시 수강생이거든요.”
* * *
정신없이 좌우를 오가며 대련하다 보니 쉴 틈도 없고, 정신도 없었다.
간혹 연무장을 헛갈려서 마법을 써야 하는 것을 주먹으로 후릴 뻔하다가 거둬들이고 마법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땐 머리를 썼다.
두뇌 풀가동이 아니라 머리를 들이밀어 막았다는 뜻이다.
‘스톤 헤드! 과연 쓸만하군.’
보조 마법 시간에 교보재 노릇하다가 뒤로 자빠져서 뒤통수를 박고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 얻은 패시브 스킬인 스톤 헤드는 두경부 한정, 방어력을 원래보다 20%나 올려주었다.
따라서 위험하다 싶으면 팔다리를 내주는 것보다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정답이었다.
게다가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면 상대방이 위축되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핥아주기라도 하면 금상첨화. 소심한 친구들은 그 광경만으로도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지금 포션을 가져다주는 일일 조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거 받으세요.”
“저기···.”
“살려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그게 아니고, 빈 병인데요?”
“아, 아차!”
일일 조교는 내게 병을 던지다시피 바꿔주고 도망갔다.
지난 이틀간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카데미에서 오전, 오후 수업 듣고 밤에는 바로 던전으로 이동. 레벨업에 매진한 결과로 레벨을 45까지 올리고, 참교육과 무자격 헬창도 크게 성장시킨 것이다.
따라서, 20레벨에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통과한 내게 졸업시험은 오히려 쉬운 것이었다.
다만 정신이 너무 없을 뿐.
“아웃사이더 수강생! 마법부 결승전 준비해 주세요.”
“네!”
“아니! 전사부 결승도 진행해야 하는데 그리로 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좌우를 오가다 보니 진행하는 조교들도 정신이 없었다.
“1분 이내에 끝내고 오겠습니다!”
“1분 넘으면 실격입니다. 명심하세요!”
빨리 오라고 닦달하는 전사부의 조교를 뒤로하고 마법부 결승에 먼저 올랐다.
결승에 진출한 수강생은 마법부의 수석 입학자로 지능이 내 두 배는 되는 플레이어.
“아웃사이더님, 바쁘신 건 알지만 저를 너무 얕보신 거 아닙니까? 1분이라뇨.”
“죄송합니다. 하도 다그쳐서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마음먹고 피하거나 방어만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지?”
“그게···.”
조교의 시합 시작 사인과 동시에 나는 상대에게 달려들어서 꽉 안아버렸다.
마법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근접전에 상대는 당황해 버렸다.
“뭐, 뭡니까? 이건 마법 대련입니다. 체술을 쓰는 건!”
“아쿠아, 체인 라이트닝.”
힘으로 공격은 안 했다. 그저 도망갈지 걱정되어 꽉 잡아뒀을 뿐.
나는 내 체력과 상·하의의 방어력을 믿고 머리 위에 마법을 퍼부었다.
-빠지지지직!
“끄아아아!”
물로 적신 후, 그 위에 체인 라이트닝을 지지는 사악한 공격. 그 극대화한 데미지는 붙어있는 우리 두 사람에게 동시에 들어갔다.
모락모락.
안았던 손을 풀자, 결승 상대는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나도 HP가 간당간당할 정도로 데미지가 들어갔으니 체력 약한 마법사가 견딜리가 만무.
막거나 피할 새도 없이 오롯이 데미지를 받아들인 상대는 머리카락을 쭈뼛 세운 채로 바닥에 누워 꿈틀거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아, 아웃사이더 승!”
승리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전사부 대련장으로 건너갔다.
“1분 안 지났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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