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유혹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군.”
장서가 가득 꽂힌 책장 앞에 선 남자는 수도사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발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펑퍼짐한 로브로는 다 가릴 수 없는 승모근과 어깨너비는 마치···.
“빈혈아, 여기 네 동생 있다.”
“그워어어, 그 무슨 개소리··· 어라, 진짠가?”
타락한 신성력으로 잿빛이 된 탓에 피부색마저 닮아있는 두 명, 사람과 오크다.
“신의 역사함을 모르는 무도한 무리로다! 어디서 그런 삿된 혀를 놀리는가!!”
“워워, 진정해.”
“지금이라도 당장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 그러지 않으면 당장 아이언 메이든에 집어넣겠다!”
그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뭐냐! 말하라!”
“외모에 콤플렉스 있니?”
“······.”
“그워, 마스터보다 훨씬 잘 생겼다. 우리 마을 오크 처녀들이 보면 열에 여덟은 잘생겼다고 할 거다!”
도서관장의 잿빛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을 섞을 필요가 없는 종자로다.”
괸장의 로브 자락이 부풀어 오르며 짚고 있던 스태프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도서관 장서에 들끓는 책벌레를 잡기 위해 개발되었다고 하는 도서관장 고유의 마법 ‘죽음의 독연’이 관장실 전체에 펼쳐졌다.
“크크크. 언제까지 숨을 참을 수 있나 볼까? 불경한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 해독약도 없는 이 기술에 당해서 죽어 나간 자가 한둘이 아니지.”
“응? 숨을 참아야 하는 거였어?”
도서관장은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아··· 그렇군.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스읍! 하아! 스읍! 하아!”
“뭐, 뭐야!”
복면 ‘마기꾼’에 붙어있는 ‘상시 공기 정화 기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일부러 심호흡을 해봤다.
“좋아. 문제없군.”
역시 헤파 필터. 독연이 하나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회초리’를 꺼냈다.
“자, 관장아. 이제 가진 걸 다 꺼내놓으실까?”
⋮
로브와 부츠. 허리띠와 스태프. 가장 중요한 열쇠를 꺼내놓고 부복한 관장을 보니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야, 그런데 너희는 지금 무슨 신을 섬기는 거냐?”
원래 이 수도원은 로스트 디바인 교 소속.
그쪽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유일신을 섬기는 건 안다.
“당연히 오롯한 그 분, 그리고 그분의 독생녀 ‘프리마 페르소나‘ 님이십니다.”
그래.
그 이름.
“그런데 너희는 지금 타락했잖아. 왜 계속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데?”
“그것은 신의 단순성과 편재성에 대해 모르는 야만인이나 할 소리입니다. 섬김의 형식과 그 신앙심으로서의 발현인 이적, 신성 마법 등은 시대에 따라서도 개인의 믿음의 형태에 따라서도 조금씩 그 궤를 달리하며, 제아무리 몰상식하고 미개한 불신자라 해도 구체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 믿음만으로도 그 원시성에 걸맞은 수준의-”
나 잠깐 교장 선생님 뵌 것 같은데.
아니 시무식 때 회장 얼굴이었나?
-깡!
“몰상식하고 미개해서 미안하다 이 새꺄.”
“음? 마스터, 나 안 잤다. 진짜다.”
“이해한다.”
필사실을 나와 회랑을 따라 반대편 숙소 및 창고 건물에 도착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크기의 중앙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를 따라 좌우에 다닥다닥 방이 줄지어 있었고, 문마다 작은 창문이 달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꼭 감옥 같네.”
밑에 음식 투입구만 없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빈혈이를 기다리게 해놓고 ‘병풍’ 스킬을 켰다.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문의 창문을 통해 내부를 관찰했다.
‘거의 전부 십자군 기사와 전사.’
아마도 수도사는 대부분 필사실과 성당에 가 있겠지.
그 말인즉 현재 이 건물의 절대다수가 근접 유닛이라는 뜻이고 그거야말로 내 전공이다.
‘어차피 한번 돌고 말 것도 아니니까 본격적인 파밍은 나중에 하자.’
-쾅쾅쾅!
나는 열 개가 넘는 철문을 일일이 두드리며 빈혈이의 옆으로 돌아왔다.
“뭐, 뭐야? 마스터 제 정신 맞나?”
“야, 너 목소리 크지?”
“그건 왜?”
“따라 외쳐.”
“뭐라고?”
나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외쳤다.
“불이야!”
“미친 건가! 살짝 맛이 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시끄럽고. 빨리 외치기나 해.”
“제길! 부, 불이야!”
방문이 하나씩 열리고 급히 무장을 마친 십자군이 위생 상태 불량한 주방 싱크대에서 바퀴벌레 튀어나오듯 뛰쳐나왔다.
“불! 어디 불인가?!”
“불, 지금부터 지르려고. 파이어월!”
좁은 복도를 따라 촘촘하게 불길이 내달렸다.
“으악! 마법사다.”
십자군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파이어월에만 집중했다.
“파이어월! 파이어월!”
파이어월이 중첩될수록 방패를 두드리는 소리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파이어월을 외쳤을까?
그 많던 마나가 간당간당해진 이후 방패를 내렸다.
“휴. 끝인가?”
그래도 화염 저항이 꽤 높았는지, 석재가 녹아 반들반들해질 만큼 불을 질렀는데도 살아 꿈틀대는 녀석이 있었다.
“야, 빈혈아.”
“······.”
“빈혈이 뭐하니?”
아차, 파이어월에 당해서 내 소환수가 된 녀석인데 내가 경솔했네.
PTSD에 정신을 반 놓은 녀석을 소환 해제하고 혼자 뒷정리를 해야만 했다.
“근육만 거창하지 여린 녀석이라니까.”
루팅과 막타를 나눠서 했으면 훨씬 빨리 끝났을 텐데.
숙소 아래 지하 창고 겸 무기고에서 비밀의 문을 찾아 열고,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라이트.”
은은한 빛이 통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짧은 통로를 지나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흙과 돌벽으로 가득한 이 공동을 지탱하고 있는 몇 개의 거대한 기둥.
그 기둥을 올록볼록 감싸고 있는 저것은 전부 인골이다.
주로 머리뼈와 다리뼈를 이용해 타일처럼 갖다 붙인 저 모습을 처음 커뮤니티에서 스샷으로 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지하에서 직접 목격하고 나니 소름이 쫙 올라왔다.
“으···. 미치겠네.”
이 넓은 동굴의 벽을 가득 메운 것은 전부 수도사의 사체.
“떨고 있군.”
가운데에 마치 바위처럼 앉아 있던 남자가 슬며시 일어났다. 검은 로브 때문에 더욱 무기질로 보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사자의 영역에 들어온 이상 자네는 생자의 몸으로는 여기서 나가지 못해. 아니, 사자가 되면 어차피 못 나갈 테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남자는 로브 속에 숨기고 있던 랜턴을 꺼냈다.
그가 푸르스름한 빛을 뿜는 랜턴을 흔들자 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하얀 것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팔뼈였다.
자신의 요람을 뚫고 나오는 팔은 점점 많아져서 이윽고 공동 전체에 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왜 움직이지 않지?”
이 카타콤의 관리자이자 수호자인 남자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나 말이야?”
“그렇다.”
해골이 기어 나와 시시각각 공동을 둘러싸고 있는 지금. 나는 남자 앞에 질펀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표정을 보니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이면 상식적으로 나를 해치러 와야 하지 않나?”
“귀찮다.”
공략 영상을 보면 지금은 관리자에게 데미지를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신성 보호막이 쳐져서 공격이 원천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해골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공격하면 쉽게 잡을 수 있으므로 본격적인 페이즈가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숫자를 줄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미친놈 하나 때문에 내가 주무시는 선배들을 번거롭게 해드렸군.“
남자의 얼굴에 노기를 넘어선 허무함이 서렸다.
내가 편하게 앉아 있는 사이 마지막 한구까지 모두 빠져나온 해골은 주변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와··· 많다. 이게 전부 몇 명이야?”
“총 281분이시지.”
“그래? 아쉽네. 좀 더 많아도 좋았을 텐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혼자 들어왔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미친놈이었군.”
“요즘 부쩍 미쳤다는 소리 많이 들어.”
남자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랜턴을 치켜들었다.
“선배님들 부탁합니다!”
해골이 일제히 공격을 준비했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는 이때가 제일 좋더라. 절대 방어!”
-콰광콰지직!
세기도 어려운 숫자의 공격이 작렬하는 순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자라나라, 내 방어력.’
그 후로도 약 10초간 몸에 떨어지는 공격을 음미하다가 ‘참교육’을 휘둘렀다.
파티다.
-까라라라라라라라라라랑!
한번 휘두를 때마다 십여 구 이상씩 복합골절 스켈레톤이 하늘을 날았다.
“손맛 좋고!”
공동을 가득 채운 해골을 다 정리한 후에도 절대 방어 시간이 2초가량 남은 것은, 워낙 해골이 밀집한 덕분이었다.
“헉!”
남자는 랜턴이 꺼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요리 오세요, 아저씨. 어딜 도망가려고.”
⋮
“마스터. 나는 이제 반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워.”
해골과 수도사가 너무 많은 것을 떨어뜨린 관계로 빈혈이를 다시 소환해서 루팅을 돕게 했더니, 카타콤의 참상을 목도한 빈혈이는 그렇게 선언했다.
“나는 내가 운이 없어서 당한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지금 보니 뭐?”
“잘 부탁드립니다, 그워.”
잔소리 안 해도 말 잘 듣겠다니 말릴 이유가 있나. 나는 빈혈이를 데리고 카타콤을 통과해 좁은 회전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간 곳은 성당의 한구석.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벽을 알록달록 물들이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전 속의 ’페르소나‘가 세상에 내려왔을 때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었다.
원래는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인트로 영상으로 보게 되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저것 다 건너뛰고 낙원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하나도 못 봤잖아!’
그런 거 안 보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인트로에, 하다못해 엔딩 크레딧까지 스킵하지 않고 다 보는 스타일인데.
“아우, 씨. 짜증 나네.”
“거기 누구냐!”
화가 나서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맹렬한 돌진으로 다가가 참교육을 휘둘렀다.
-까앙··· 앙··· 앙··· 앙!
조용히 해치우려 했지만, 고요한 성당에서 울린 알루미늄 배트의 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아 놔. 좀 천천히 갈려 했더니만.”
“마스터, 저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다니던 수도사들이 붉은 안광을 줄줄 흘리면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야, 조용히 가는 건 다 틀렸다. 대충 알아서 잘 살아남아라.”
“그워어! 무기라도 좀 제대로 된 걸 줘야!”
나는 몰라도 빈혈이는 여기서 살아남기에 너무 약하다. 흑기사의 한손검을 줘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로또 긁는 심정으로 회초리를 들려 보냈다.
“야, 그냥 도망만 다녀! 레벨 올리면 제대로 된 거 줄게! 헤이스트! 헤이스트!”
“그워어!!!! 이런 이쑤시개 같은 거로 뭘 어쩌란 말인가!”
나는 빈혈이의 명복을 빌고 적에게 집중했다. 헤이스트를 걸었으니 잘 도망 다니길 바랄 수밖에.
-쾅! 쾅!
묵직한 화살 하나와 원거리 마법 하나가 날아와서 방패에 박혔다.
“크억!”
아무래도 레벨 차이가 크게 나서인지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내 장점은 방어력이 아니라 공격력.
다소의 피해를 입더라도 한 번의 공격이면 한 명씩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수도사 하나를 공격하려 하는데 또다시 원거리 공격이 날아왔다.
“윽!”
한방이면 되는데.
참교육을 휘두를 새가 없었다. 뭔가 수를 내야 한다.
나는 저 멀리 궁사를 보았다. 저 궁사부터 제거해야 뭔가 될 것 같은데, 돌진을 사용하기에 너무 멀다.
“도약!”
점프에 사용하는 스킬, 도약. 나는 기둥을 발로 차며 반지의 스킬을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사용했다.
-쉐에엑
바람처럼 수도사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 그 힘으로 궁수를 쳐 날렸다.
-펑!
날아간 힘에 참교육의 힘이 더해져서 궁수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하나 제거했다고 쉴 새는 없었다.
“맹렬한 돌진!”
-깡!
야구의 벤트 레그 슬라이딩하듯 스쳐 지나가면서 휘두른 공격에 수도사 하나가 또 사라졌다.
휴.
이번에는 조금 위험했다.
하지만 제일 귀찮게 굴던 둘을 제거했으니 이제 한숨 돌렸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참교육을 짚고 일어섰다.
“너희는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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