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유혹
예배당에서 나와 대치한 수도사는 이제 다섯. 둘은 빈혈이를 쫓아 사라졌다.
‘왼쪽? 오른쪽?’
어느 쪽을 먼저 잡을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수도사 둘이 더 나타났다.
‘제길.’
빈혈이가 시간을 끄는 것이 끝난 모양이다.
수적 열세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재소환하려고 하는 순간, 빈혈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어떻게 된 일이지?’
소환 항목에 아직 빈혈이가 활성화된 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으악!”
뒤늦게 나타난 두 수도사는 나와 대치 중이던 다섯 중 가장 오른쪽 수사를 불시에 협공했다.
저 멀리 기둥 옆에서 빈혈이가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큭큭, 나이스!”
긴박한 상황이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돌발사태에 수도사들의 집중이 깨진 순간, 나는 가장 좌측 수도사를 덮쳤다.
-퍽! 깡!
그 수도사는 몽크였던 모양이다. 주먹 한 방과 참교육 한방을 맞교환했지만 내가 이득.
그 사이 빈혈이의 명을 받은 두 수도사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상태 이상 때문에 제힘을 다 내지는 못했지만, 시선을 사로잡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스터! 이 이쑤시개 대체 뭔가!”
“빈혈이, 너 이 자식! 대단한데?”
“마스터가 하던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됐다, 그워어”
기대도 안 했는데 빈혈이가 대박을 쳤다.
이번엔 진짜 한 번쯤 죽나 싶었다. 그러면 경험치 페널티를 받고 레벨 하락. 낮은 등급 던전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니 모든 계획이 꼬여버릴 위기였는데.
“이리 와. 침 맞자.”
“그워어어, 그건 좀.”
반항하거나 말거나 침을 놓고 회복에 전념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둘.
총사령관 신 그레이와 종교 재판관 네메스.
체력 게이지가 다 차자마자 예배당을 가로질러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제단 앞에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머, 멋진 남자네.”
총사령관 신 그레이는 불타는 듯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원래는 신성으로 넘치는 성기사였을 그녀의 눈은 이제 욕망으로 반짝거렸다.
“사령관. 그런 저속한 말은 좀 지양해 주시겠소?”
완고한 무표정의 남자는 사제복과 경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 지역의 주교인 네메스는 타락했음에도 신실함을 잃지 않았다.
“호호. 여전히 딱딱한 남자라니까.”
두 사람은 나와 빈혈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둘만의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마스터. 저 둘 엄청나게 세다.”
“그래, 나도 알아.”
아무리 참교육을 들었다고 해도 방어력이 거기에 못 미치니, 아마 저 둘의 진심 협공을 받으면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지게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단 심문관 네메스. 신성 마법의 권위자로, 공격 마법에도 정통했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버프.’
그 얘기는 네메스의 지능 수치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내 복면인 ‘마기꾼’의 내장 스킬인 ‘매혹’.
지능 150 이하인 적에게만 통하는 스킬이므로 둘 중에서는 전사 계급에 속하는 신 그레이에게 사용해야 한다.
아무래도 전사는 지능을 많이 높일 필요가 없으니까.
‘매혹!’
스킬을 발동했지만 대체 뭐가 작동하긴 한 건지 신 그레이의 야릇한 웃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경전을 펼친 네메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판결을 내리겠다!”
“갑자기?”
네메스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경전을 뒤적거렸다.
“피고는 성스러운 전당에 함부로 침입하여, 차마 다 세기도 어려울 만큼의 수도승을 참살하였다. 새로운 믿음의 첨병이 될 본 교의 성소를 유린하여, 채 펴지도 못한 날개를 꺾음으로써 대륙에 새 믿음이 퍼질 기회를 막았느니라. 인정하는가?”
“어··· 약간은?”
“또한 그대의 사역마는 타락한 괴물로, 오직 그 육체를 목적으로 계약을 맺은 것을 인정하는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역마라 불릴만한 것은 빈혈이밖에 없었다.
“사역마라면 얘 말이야?”
“그렇다.”
육체만을 목적으로 했다? 아니 뭐, 처음엔 마법 실험 대상으로 쓰고, 나중엔 고기 방패로도 쓰고 미끼로도 쓰고 또···.
“부정할 수가 없네?”
“크크크.”
네메스의 뒤에 서 있던 신 그레이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었다.
“저리 비켜라, 이 방해꾼!”
네메스는 갑자기 들고 있던 흉측한 메이스로 네메스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컥!”
아직 아무런 스킬을 발동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신 그레이를 경계하지도 않았던 네메스는 불의의 일격에 쓰러졌다.
-퍽! 퍽! 퍽!
“야, 저 여자 갑자기 왜 저래?”
“모르겠다. 무섭다, 그워.”
신 그레이는 네메스가 쓰러지자 들고 있던 메이스와 방패를 바닥에 던지고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닦더니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뭐야!”
“아아, 당신 정말 최고야!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잖아.”
메이스만 던졌으면 모르겠는데 걸음마다 갑옷도 하나씩 벗어 던지는 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조금 쳤다.
“마, 마스터. 진짜 미친 여자가 나타난 것 같은데?”
“그러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것 같다. 회초리를 쓰기도 전에 먼저 갑옷을 벗는 건 처음 봤네.”
매혹의 지속 시간은 매우 짧다. 스킬이 풀리기 전에 나는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아아아아! 마스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대뜸 그런 못된 것을!”
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왜 벌써 마스터래?
-찰싹!
“크흐··· 흥!”
-찰싹!
“하아아···.”
상태 이상 단계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신음을 내는지라 덜컥 무서워졌다.
7대를 다 맞고 ‘복종’ 단계에 이른 신 그레이는 반짝이는 구슬을 하나 내밀었다.
“빈혈아··· 이거 혹시 그거 맞냐?”
“어? 이걸 왜 이렇게 쉽게 내놓지? 가정 교육이 부족한 미친 여자임이 틀림없다, 그워!”
구슬을 받기는 받았는데 등록하기는 무섭다.
‘얼른 마무리하자.’
-깡!
레벨 차이가 크게 나는 던전이었던 만큼 공략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얻은 것이 컸다.
레벨 3개 업, 참교육 4단계, 헬창 5단계 성장.
교복급 천 계열 방어구와 스태프 등 획득.
목표로 했던 ‘피의 십자군’ 방어구 세트는 완성 못 했지만 앞으로 이 던전을 몇 차례 더 돌 예정이니까 그때 탈탈 털도록 해야겠다.
다만 그게 아쉽지 않은 이유는 네메스로부터 ‘이단심문관의 피의 목걸이’와 신 그레이로부터 방패, 메이스, 방어구 전 세트를 뜯어냈기 때문이다.
뜯어냈는지 그냥 줬는지 좀 헛갈리지만.
바뀐 스탯과 장비를 좀 음미해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3시간이 훌쩍 넘어버려서 바로 로그아웃했다.
* * *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김 비서는 여전히 유능한 OL 컨셉을 유지하고 있었다. 맞춰주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언제까지 하나 두고 보기로 하자.
“어. 좀 힘들었네.”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제 자의대로 주인님의 패턴을 분석. 점심으로 냉면을 준비했습니다.”
“오, 그거 좋군. 김 비서, 역시 내 마음을 잘 알아.”
“감사합니다.”
나는 문을 열고 냉면을 가져왔다. 김 비서가 상차림까지 해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냉면을 후루룩 빨아들이면서 김 비서를 불렀다.
“김 비서, 그간 특이 사항은 없고?”
“복권 발행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래? 자세히 말해봐.”
“지난번 2차 예선까지 총 128명의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지 않았습니까? 진출자 각각의 예선전 하이라이트 영상과 지원당시 레벨, 우승확률과 배당률을 공개하면서 한 시간 전부터 판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 참 부지런하다.
하긴 하이라이트 영상은 아마도 이브가 직접 제공했을 테니까 편집하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을 테고, 지원 당시 레벨 역시 이브가 알려줬겠지.
개인 정보가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나이지만, 그 정도 정보는 괜찮겠지.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내심 바라는 바다.
‘내 지원 당시 레벨이 33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우승확률이 떨어질 거 아냐?’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우승확률이 낮을수록 배당이 커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배당이 얼마나 돼?”
“5,501배입니다.”
이건 사야 한다.
* * *
“어이, 동생.”
[오빠가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했어?]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오빠,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용건으로 직진해. 진우 올 시간 다 됐어.]
“알겠습니다! 선생님, 좋은 투자 기회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는 농담 아니다. 잘 들어.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냐.”
[왜 이래 사기꾼처럼? 게임 한다더니 뭐 좀 다른 거 하는 거야?]
수진의 질문에 본론을 꺼냈다.
“오빠가 요즘 게임 내에서 조금 큰 대회를 나갔거든. 거기서 본선에 진출했어···.”
나는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진은 한동안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128명 중에 우승을 하겠다? 심지어 레벨은 다른 사람 절반밖에 안 되는데?]
”어. 레벨은 그새 많이 올려서 그렇게까지 심한 차이는 아냐. 두당 한 회차에 50만 원밖에 못 사니까, 너희 남편도 사라고 해라. 50 투자해서 27억 버는 기회가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냐.”
[허··· 허···.]
왠지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야, 너 지금 오빠 못 믿어서 그러는 거야? 이거 서운한데.”
[아니, 오빠. 지금 내가 좀 검색해 봤는데, 아이디가 아웃사이더라고 했지? 우승 확률이 뒤에서 첫 번째인데? 이 정도면 그냥 확률이 제로라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중간 정도면 의리로라도 사 주겠는데.]
“야! 그깟 50만 원이 오빠에 대한 믿음보다 큰 액수냐? 까짓 50, 아니 네 남편 것까지 100만 원 보내줄 테니까 사든지 말든지 해. 난 분명 말했다?”
어릴 때는 오빠 말이라면 껌뻑 죽더니 변했네.
서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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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 그러니까 프로도 아니고 프로토. 반지의 제왕입니까? 네, 오프사이드 아니고 아웃사이더! 아니, 화내는 거 아니고요. 이번 달 용돈 넉넉하게 부쳐 드릴 테니까··· 아이참, 사기 아니고 복권이라니까 자꾸 그러신다.”
나도 모르겠다.
분명 다 말해줬으니까 살 사람은 알아서 사겠지. 설마 아버지, 어머니, 동생 내외 네 명 중 둘은 사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다는 게 좀 서글프구나.”
불신의 시대로다.
서글픈 마음은 던전에서 풀어야 하는 법.
나는 저녁까지 피의 십자군 수도원을 두 번 더 클리어했다. 레벨은 셋, 둘. 합쳐서 다섯 단계를 더 끌어올렸고 참교육 여덟, 핼창은 9단계를 성장시켰다.
두 번째 공략에서도 ‘회초리’를 적극 활용한 아이템 파밍에 신경을 쓴 나머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뿌듯하네.”
오래 걸린 만큼 소득도 많았다.
네메스로부터 ‘이단 심문관의 목걸이’ 둘.
신 그레이로부터 방어구와 방패, 무기까지 전체 세트인 ‘신 그레이의 소망’ 두 세트.
목표였던 ‘피의 십자군’ 세트는 무려 세 세트를 뜯어냈다.
“이 정도면 우승 못 해도 쏠쏠하겠다.”
복수심이란 건 사람을 가장 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인인 모양이다.
이틀 후 밥상을 뒤집는 상상을 하며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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