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두리라
[제목: 128강은 인간적으로 너무 한 거 아니냐?]
[월드컵이나 유로 축구 우승 팀 맞추는 경우를 봐도 32강, 24강이다. 64강 만들어놓고 맞춰보라고 해도 어이없는데 128강이라니!
게다가 정보는 아이디와 지원 당시 레벨, 예선전 하이라이트 영상뿐. 대체 뭘 근거로 분석하라는 거냐? 정보가 너무 적다.
제 정신임?]
└ 진심 미친 듯.
└ 왜, 난 좋은데? 덕분에 판이 커졌잖냐. 역배 성공하면 최고 5,501배야.
└ 미쳤냐? 501배 짜리 찍어도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판에 거길 왜 걸어? 님 봉사 활동하심?
└ 채팅(유료) 참여하시면 상위 32명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글 제공합니다. (링크)
└ 사기꾼 어서 오고.
확실히 지나치게 변수가 많은 판임에는 분명하다.
나도 내 배당률을 보고 놀라서 김 비서에게 과거 사례를 조사해 보게 시켰는데 몇백 배, 아주 심한 경우 2,500배 이런 건 좀 봤지만 5,501배 같은 건 처음 봤다. 아무래도 참가자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
[제목: 후기지수 1위 후보 목격담.]
[여기는 북부 전선 최서단 던전 ‘와이번의 협곡’이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렙제 120으로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지. 안정적으로 공략하려면 레벨 150은 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우리 길드 사람들과 레이드 나갔다가 후발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오라는 길드원은 안 오고 다른 팀만 줄줄이 오더라.
그 중 한 사람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 나길래 녹화하고 스샷 찍은 후 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AI 비서가 대번에 알려줬다. 후기지수 무투회 1조 1위 ‘옥면공자’라고. (사진)
증거 사진 첨부한다.]
└ 뭐야, 무투회 레벨 100 이하만 지원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 정확히 말하면 지원하는 시점에서 100 이하면 되는 거였지.
└ 며칠 됐다고 레벨을 20이나 올려? 그런 게 가능한 게임이냐, 이게?
└ 안 될 거 없지 않나? 지금 저기 있는 사람들 장비 보니까 자칭 ‘옥면공자’ 저 인간 빼고는 전원 150 이상에 180 이상도 줄줄이 보이는데, 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달려들면 버스 정도가 아니라 비행기도 타겠다.
└ 작정하고 나왔구나. 저건 못 이긴다. 난 정배 간다.
“음, 고정우 벌써 120레벨 넘었구나.”
“이 글이 올라올 당시 120을 갓 넘었다고 가정하면, 시합 당일에는 97% 확률로 127레벨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나도 엄청난 속도로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본의 힘이란 대단하다.
[제목: 기적의 사나이 과연 5,501배의 기적을 이뤄줄 것인가.]
“응? 이건 내 얘기인가 본데.”
[나 느무느무 고민돼서 글 올려.
예선전을 홀로 유유히 돌파한 이 남자가 과연 우승까지 갈 것인지. 이 남자에게 배팅해도 될 건지 몰라서 말야. 고수 형들은 어떻게 생각해?
쉽게 말하면 1,000대 1도 간단히 돌파한 사람 아냐. 그 운이면 7번 연속 이겨서 우승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지 않아?]
└ 야. 아무리 내가 역배충이어도 이건 솔직히 좀···.
└ 외 않되?
└ 일부러 등신인 척하는 건지, 컨셉인지 모르겠네.
└ 레벨 못 봤어? 지원서 넣은 날 33이었다잖아. 그다음부터 며칠간 죽어라 올리면 너는 얼마나 올릴 수 있을 것 같냐? 정말 말도 안 되게 고속으로 올려서 60 만들었다 치자. 60레벨이 100레벨 이길 수 있다고? 그 얘기는 122레벨인 내가 신성모독하고 맞다이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인데 그게 말이 되냐?
└ 그런가? 그럼, 끝에서 두 번째에 걸면 조금 더 현실적일까?
└ 이 새X는 답이 없다. 병먹금.
“좋아, 아주 좋아.”
“역시, 그런 성향이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주인님은 욕먹는 걸 즐기시는···.”
“그깟 욕 좀 먹으면 어때? 걔들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멘탈은 확실히 주인님이 갑입니다.”
“그럼 그럼.”
종종 나와 관련되어 희망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순식간에 논파되어 너덜너덜해졌다.
대표적으로 내 아카데미 수석 졸업 이력을 댓글에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순식간에 집중포화를 받았다. 50레벨 쩌리들 얘기를 어디다 갖다 붙이냐면서.
“이거이거 ‘천국의초밥’ 냄새가 폴폴 나는데.”
질투가 많은 추한 놈이었지.
“뭐, 됐다.”
대범한 수석 졸업자인 내가 이해해 주도록 하자.
이제 대회 날까지 정신없이 달리려면 그런 건 신경 쓸 새도 없으니까.
* * *
“옥면공자 승리!”
레프리를 맡은 NPC가 승리를 선언하고 장내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옥면공자라는 아이디를 가진 남자, 고정우는 사방을 향해 포권을 해 보이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정우 씨. 수고 많았어.”
“예.”
같은 회사 직원이자 참가자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선배가 인사를 건넸지만, 고정우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정우 씨는 이제 네 번 이겼으니 다음은 8강이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요?”
“그래. 이렇게 순조로운데 너무 굳어있잖아. 오늘 스타가 되려면 좀 웃으라고. 컨설팅 업체에서 배운 대로 미소만 지으면 되잖아?”
다 같이 버스를 탔기에 레벨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선배였다. 고정우는 127, 눈앞의 남자는 122.
다만 장비의 수준은 꽤 차이가 났다.
고정우는 눈앞의 남자를 어렵지 않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나 이제 대기실 가야겠다. 나도 통과하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네, 다녀오십쇼.”
고정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1차 예선에 28명 통과 했던 회사 사람 중 9명이 떨어지고 본선에 19명밖에 남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128강, 64강, 32강 전에서 그 19명 중 13명이 또 떨어진 탓도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승만 자신이 하면 그만이니까.
생각에 잠긴 사이 차례가 온 선배가 위풍당당하게 무대에 올랐다.
‘훗, 레벨 좀 올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쑥쑥 성장하는 자기 모습에 취한 모양인데, 고생 없이 얻은 힘이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상대는 128강 전에 시드를 차지했던 예선 2조 1위 출신 ’아웃사이더’.
“우와아!!!!”
그가 무대에 오르자, 장내가 요란해졌다.
“이번엔 무슨 웃기는 걸 보여줄거냐?!!”
“최고다, 아웃사이더! 내가 너한테 걸어야 했는데! 썅!!”
붉은 기운이 도는 판금 갑옷에 웃기지도 않게 복면까지 쓴 아웃사이더는 자기가 스타라도 되는 양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미치겠네. 저런 얼치기도 16강전에 올라오는데.”
아웃사이더는 우연히 보게 된 저 남자의 64강전을 떠 올렸다.
최약체지만 우연히 2조 1위로 높은 시드를 받은 덕에 대진운이 좋았던 저 남자는 128강전에서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고 올라왔다.
64강 전에서도 역시 수준 이하의 개싸움이 벌어졌다.
마법도 좀 쓸 줄 알았던가. 승부는 거기서 갈렸다.
난전 도중 아웃사이더가 펼친 ‘그리스’ 주문에 허를 찔린 상대가 넘어진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봐줄 수 있었지.’
문제는, 기회를 살린답시고 달려들던 아웃사이더도 곧바로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어 갈 곳 잃은 로봇청소기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동시에 장외로 떨어져 버린 두 사람.
레프리 NPC가 급히 VAR을 선언하고 화면을 3차원 분석한 결과, 근소한 차이로 아웃사이더가 나중에 떨어졌음을 선언했다.
‘수준 떨어지게.’
32강전 경기도 어쩌다 보니 직관하게 됐다.
아웃사이더의 32강전 경기 상대는 마법사. 화염 마법이 제법 매서운 플레이어였다.
64강전의 인상 깊은 개싸움 이미지도 있거니와 원래 근접전을 피하는 족속인 마법사는 처음부터 ‘블링크’를 사용해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아웃사이더는 활을 꺼내더니 ‘낙인’을 찍고 ‘올가미’를 발사해 마법사의 발을 묶었다.
‘무슨 스킬 트리가 이렇게 난잡해?’
예선에선 검, 128강전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64강전에는 메이스, 32강전에는 활.
상당히 올라운드 망캐라고 옥면공자 고정우는 생각했다.
-펑! 펑!
움직일 수 없게 된 마법사는 제자리에서 파이어볼을 난사했다.
아웃사이더는 일부는 피하고 일부는 맞으면서도 끝내 마법사에게 붙더니 활을 집어넣고 맨손으로 마법사를 붙들었다.
‘이젠 맨손이라고?’
이쯤 되면 뭐 하는 캐릭터인지 모르겠다.
무슨 스킬을 사용했는지 아웃사이더는 마법사를 잡은 채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자유낙하.
바닥에 닿기 직전, 아웃사이더는 마치 유도의 업어치기 같은 동작으로 마법사를 호쾌하게 메쳤다.
-쾅!
바닥이 출렁거릴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물에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이 된 마법사는 그대로 리타이어. 경기의 룰대로 1의 HP를 남긴 채 경기장 밖에 소환됐다.
홀로 남은 아웃사이더의 몸에는 그때까지 꺼지지 않은 불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고, 데미지가 상당했던지 다음 순간 그 역시 리타이어되어 경기장 밖에 나타났다.
“와아아아!!!!”
관중의 환호성이 떠나갈 듯 울렸다. 고정우는 부지불식간에 자기도 손뼉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아까는 동시 장외, 이번에는 동시 리타이어라고?’
두 번 다 간발의 차이로 아웃사이더가 승리. 열광하는 관중을 보면서 고정우는 오늘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정우··· 아니 옥면공자님. 부사장님이 좀 보자시는데요?“
”네, 곧 가겠습니다.”
그 남자가 이제 TOOL의 직원 상대로 16강 전에 나선다. 왠지 이번에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 * *
‘아, 참교육 마려워.‘
한방이면 끝날 상대들을 데리고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몰고 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솔직히 둘 다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는데.’
이번 상대는 전 직장 동료다.
나하고 같은 부서였던 적은 없지만 입사 동기였던 탓에 잘 알고 있다. 캐릭터 얼굴 좀 튜닝했다고 못 알아볼 상대가 아니다.
저 녀석은 유일한 여자 동기에게 끊임없이 들이대서 결국 퇴사하게 만든 놈.
스토킹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하고는 제법 친한 여자였는데.’
이후로도 여사원에게 끝없이 성희롱성 농담을 구사한다고 들었다. 수위 줄타기 실력이 늘어서 아슬아슬하게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정도로만.
‘나나 과장님같이 멀쩡한 직원은 다 자르고 어디 저런 놈들로만 골라놨냐.’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힐 정도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아웃사이더라고 했던가?”
“그런데?”
이 자식이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운 좋게 여기까지 올라오느라고 고생했다. 격에 안 맞는 자리까지 와 봤으니, 이것으로 만족하라고.”
“넌 왜 혼잣말을 그렇게 큰소리로 하냐?”
“뭐?”
“넌 아이디가 뭐였지?”
“독고무적이다.”
“에휴···. 누구는 옥면공자에, 누구는 독고무적에···. 무슨 2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너희 다같이 아이디 무협 풍으로 맞추기로 하고 나온 거냐?”
“너··· 뭐냐?”
자칭 독고무적은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옥면공자와 함께 거론한 것만으로도 둘이 같은 팀임을 알아보았다는 뜻이 되니까.
독고무적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레프리 NPC가 제지했다.
“참가자는 자리에 위치해 주십시오.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잠깐만요.”
나는 레프리에게 손을 번쩍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소환수 사용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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