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두리라
“혹시 소환수 사용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인간형 소환수도 가능한 거죠?”
“정식 소환수라면 형태는 상관없습니다.”
레프리는 그렇게 확인해 주고 제 자리로 가도록 명령했다.
물론 지금까지 소환사 계통 참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만 명이 넘는 예선 참가자 중에는 소환수를 주력 공격 루트로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야수 계열을 길들인 소환수거나, 드물게는 마공학을 이용한 골렘류였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큭큭, 고작 소환사였나. 예선에서 살아남은 건 야수의 은신 계통 스킬 덕이었나 보군.”
예선전을 보기는 봤는지 독고무적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사냥을 위해 은신 기술을 가진 소환수와, 그 기술을 공유하는 소환사. 아마도 그런 상상을 한 것이리라.
‘상상은 자유니까.’
“소환수를 피하고 소환사만 때려잡으면 되는 그런 허접한 직업 가지고 잘도 여기까지 올라왔군.”
독고무적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소환수의 어그로가 통하는 것은 NPC와 몹뿐이다. 일반 플레이어에게는 소환수의 어그로 기술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소환사의 위력이 급격히 줄어든다.
다시 말해 PVP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소리다.
“준비하십시오!”
레프리의 선언 이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독고무적은 오히려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뭐 하냐?”
“어디 소환수 한번 꺼내봐. 갑옷 보니까 그거 50레벨짜리 교복인데, 내가 공격 시작하면 어디 소환수를 뽐낼 시간이나 있겠어?”
“그래? 생각보다 배려심이 깊네. 인기 많겠어.”
“꺼내기나 해.”
막상 꺼내고 나면 나도 후회할 것 같은데 얘가 진짜 뭘 모르네.
“그레이, 나와봐.”
내 소환수인 (구)신 그레이, (현)그레이가 나오자마자 관중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독고무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의 십자군 수도원’은 어느 정도 레벨이 되었다하면 누구나 가보는 던전.
그 던전의 보스 ‘신 그레이’가 소환수로 나온 것은 처음 볼 테니까.
“신 그레이?”
붉은 머리에, 붉은빛이 은은하게 도는 갑옷. 그 갑옷은 처음 봤을 때에 비해 현저하게 작아져 있었다.
주인인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지만 그레이는 당당했다.
“하아··· 괜히 꺼냈나.”
“어머나, 마스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불렀어?”
“거기, 스톱.”
대체 얘는 왜 소환만 하면 다가오는 거야?
그런데 처음 봤을 때와 복장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너 갑옷이 왜 이렇게···. 뭐랄까, 아담해졌냐?”
“왜? 모험가들이 다 그러던데? 가리는 면적이 좁을수록 방어력이 올라간다고. 그래서 손 좀 봤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갑옷은 그야말로 무적. 저것보다 면적이 좁아지려면 벗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유, 그동안은 그 꽉 막힌 네메스같이 주변에 종교쟁이들밖에 없어서 참느라고 혼났지 뭐야. 마스터 혹시 종교 있어?”
“없다.”
“다행이다. 아, 시원해! 난 마스터에게 종속된 후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 같아!!”
그레이는 수만의 관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벌려 무대 위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
“게다가 이 시선! 짜릿해! 새로워! 최고야!”
그레이는 진정 무대 위의 지배자, 폭군 그 자체였다.
그레이의 과장된 움직임에 따라 독고무적뿐 아니라 관중의 시선도 휙휙 돌아가기 바빴다.
“신 그레이가 네 소환수라고?”
“어.”
“어떻게 한 거냐?”
“비. 밀.”
알려줘 봐야 넌 못해, 인마. 어디서 눈독을 들여.
“그런데, 마스터. 지금 뭐 하는 중?”
“보면 모르냐? 비무 중이잖아.”
“그래? 이 오크하고?”
그레이는 손가락으로 독고무적을 가리켰다.
독고무적이 그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피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레이의 손가락은 열추적 미사일처럼 독고무적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나도 모험가라고!”
“어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아무리 봐도 오크인데?”
그레이는 구두를 또각거리며 독고무적에게 다가갔다.
‘아니, 평범한 부츠였는데 저렇게 높은 굽은 또 언제 달았대?’
워낙 굽이 높은지라 그레이의 얼굴은 독고무적과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흠···.”
그레이는 코가 닿을 듯 독고무적 가까이 붙어 서서 뚫어져라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눈은 쭉 찢어졌고.”
“뭐, 뭐야?!”
미안하다, 독고야.
걔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레벨 높은 네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코도 낮고.”
그레이의 손가락이 독고무적의 코를 탁 튕겼다.
“아야!”
독고무적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거리만큼 다가선 그레이는 손가락으로 독고무적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어디를 봐서 오크가 아니라는 거지?”
독고무적은 얼굴을 붉히며 그레이가 미는 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미 그레이의 기술 ‘수치’가 독고무적에게 먹혔다는 것을.
‘저게 사람한테는 저렇게 적용되는 거구나.’
독고무적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마치 그레이의 손가락이 자기를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레이는 계속해서 독고를 밀어붙였다.
“어디 말해보렴. 너는 뭐라고?”
“오, 오크?”
독고무적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은 내게서 한참 멀어졌다.
“그래. 착한 오크로구나. 상을 주마.”
그리고 곧바로 다음 기술인 ‘구속’이 들어갔다.
기술이 들어간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마도 이 많은 군중 가운데 마스터인 나뿐이었을 거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레이는 허리에 걸려있던 자신의 메이스 ‘신 그레이의 쾌락’을 꺼내 독고무적을 강타했다.
-콰직! 콰직! 콰지직! 콰직!
움직일 수 없었던 독고무적은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그는 순식간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덜너덜해졌다.
“어떻니? 막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것 같지 않니?”
하지만 제발, 그레이.
그 입을 좀 닫아.
아무리 타락했다지만 넌 성기사 출신이잖아.
여기 현장에 수만 명,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는 사람까지 합치면 최소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 명이 널 보고 있다고.
그렇게 피를 얼굴에 묻힌 채로 눈을 희번덕거리면 주인인 내 입장이 뭐가 되냐.
“독고무적 장외! 아웃사이더 승리!”
레프리의 선언과 함께 16강 경기가 끝나버렸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 * *
“아, 진짜 괜히 그레이를 꺼냈나?”
사람들이 귀찮게 할까 봐 개인 대기실 안에 틀어박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쯤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을 거다.
상대가 독고무적만 아니었어도 그레이를 꺼내지 않았을 텐데. 대결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잘한 선택이 맞지만.
얼마 되지 않는 친구들로부터도 메시지가 빗발쳤다.
[아니, 반장님! 대체 신 그레이를 어떻게 낚으셨어요? 저도 이제 피의 십자군 수도원 가 볼 건데 노하우 좀 공유해주세요!!! 제발요!!!!]
[일하는 중에 몰래 화면 틀어놓고 본방 사수 중입니다. 예선부터 지금까지 충격의 연속입니다. 꼭 우승하세요. 반장 형님한테 그까짓 우승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잖아요. 아카데미 39기 고고!!]
[연구실에서 마법 연구는 안 하고 아웃사이더 님 영상 보면서 혼자 낄낄대고 있습니다. 물론 시실리아 교수님께 혼났지만, 기분은 좋네요. 그런데 ‘그리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다시 가르쳐 드려요?]
전부 아카데미의 동기생 아니면 조교였다.
“나한테 걸었으니까 꼭 이기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네.”
조금 실망이다.
“이 와중에도 메세지 없는 거 보니까 강한이는 어디 진짜 멀리 간 건가?”
대충 적당히 답해주고 있는데 이질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며칠 안 남았네요. 구체적인 내용을 상의해야 할 텐데 오늘 시간 되시면 저희 길드하우스 좀 방문해 주시겠어요?]
그건 이시연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로스 대륙 방문 건을 말하는 이시연은 후기지수 무투회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오늘은 좀 힘들겠네요. 내일은 안 됩니까?]
[내일은 제가 일이 있어서. 지금 많이 바쁘세요?]
[많이 바쁘진 않은데 제가 지금 조그만 로컬 대회 출전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어디서 하는 무슨 대회인가요?]
* * *
“지민아, 후기지수 무투회라고 들어봤어?”
“들어봤냐고? 들어본 정도가 아니라 혹시 영입할 사람 없나 예선전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조그만 로컬 대회라던데?”
“누가 그래? 지금 온통 그 얘기뿐인데.”
이시연의 질문에 부 길마 강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언니, 레벨업도 좋고 랭킹 1위도 좋지만, 길드 경영에도 관심을 좀 가져줘. 한 실장님이 외부 일은 도맡아서 해 주지만 게임 내부 일은 우리가 해야 하잖아. 나 혼자서는 힘들어.”
“미안. 너한테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에휴. 알면 됐다. 그런데 그건 왜?”
“어, 아는 사람이 출전했다고 그래서.”
“아는 사람?”
이시연의 대답에 강지민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언니 게임 속에서 아는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 사람이야. 나한테 해충 박멸의 방망이 판 사람.”
“아, 나로스 대륙에 업혀 가겠다는 그 인간? 아카데미에서 만났다며. 그럼 100레벨 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싸.”
* * *
“이 여자는 진짜 자기 게임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구나.”
그래도 랭커이자 길드장쯤 되면 최근 이슈는 다 챙겨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기로 하고 메시지를 끊었다.
[TOOL 배 제 1회 후기지수 무투회의 16강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8강 진출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 대기실에 처박혀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16강 경기가 전부 끝났다.
내가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8강 중 내가 확실히 아는 TOOL의 직원이 모두 3명. 전원 따로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만나네? 우리 부장님?”
게임 안 한다고 구박하던 부장. 8강 대진표상 내 이름 옆에 붙어 있었다. 게임 어떻게 하는 건지 좀 가르쳐 드려야겠네.
* * *
“야, 도 대리! 이게 뭐야? 큰 소리 떵떵 치더니만 망신만 당하고!”
김 부장의 눈은 도 대리를 탓하면서도 부사장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뜻하지 않은 결과에 TOOL 직원 전원이 모여 있는 대회 지원실이 술렁거렸다.
“아니, 부장님. 그게요···.”
“어디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봐. 왜 레벨 122씩이나 달고 그런 허접을 못 이기는지. 아니, 백번 양보해서 지는 건 질 수 있다 쳐! 그런데 왜 칼 한번 못 휘둘러보고 멍하니 서 있다가 장외 실격을 당해? 신 그레이가 너무 예뻐서 또 병 도졌냐? 몇 대 맞아주고 번호라도 따게?”
김 부장의 레벨은 120. 이런 얼간이가 자기보다 레벨이 높아졌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다.
“중간부터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수를 썼어요!”
“김 부장, 그만.”
부사장이 직접 나서자 김 부장은 조용히 한발 물러났다.
“움직일 수 없었다고? 상대가 스킬을 사용했나?”
“네,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 언제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합니다!”
“스킬을 사용한 건 어느 쪽인가? 그놈이야, 아니면 신 그레이?”
“모르겠습니다.”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패배했으면 정보라도 물어왔어야지. 자네는 지급한 아이템 전부 반환하고 원래 부서로 복귀해.”
“부사장님, 제발!”
“해고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
독고무적 도 대리가 조용히 떠나자,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놈 다음 상대가 누구야?”
“접니다!”
“김 부장. 자네는 이길 수 있겠어?”
“당연합니다! 레벨 차이가 있는데요.”
“방심하지 마. 그놈 분명 전사처럼 차려입었지만, 마법 계통이다. 그것도 희귀한 정신 계통.”
고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선전부터 뭔가 이상했어.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통과하는 게 말이 되나. 분명 그놈은 다른 사람을 조종한 거야. 모두를 속이고 있는 영악한 놈이다. 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지.”
‘그러기에는 전사 계통 스킬이 너무 많던데···.’
하지만 고정우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김 부장, 따라와. 방어구를 정신계 마법 방어 위주로 다시 세팅해 주지. 미리 대처만 한다면 전사가 마법사 이기는 건 일도 아니야.”
“감사합니다!”
김 부장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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