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친이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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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 대로 거두리라

DUMMY

“이제부터 알아볼까 해요.”


도무지 속을 알기 어려운 여자였다. 장비 자체도 전사 계통만 죽 취급했던 내가 한눈에 알아보긴 쉽지 않다.


내가 저 여자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공개된 하이라이트 예선 영상과 본선 경기를 본 덕분이다.


저 여자는 소환사다.

그것도 이제 마공학을 곁들인.


“엑스마키나 님과 아웃사이더 님의 4강 경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은 경기는 전부 두 번. 짜고 치는 고스톱답게 고정우는 이미 무난히 결승에 진출했다.


장내에 환호성이 가득했다.


반 이상이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지만, 엑스마키나를 응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가 본 몇 번의 경기 동안 이 여자는 적어도 네 종류의 소환수를 이용했다.


예선 때는 갑옷을 입은 그리즐리 베어를 사용해서 주변을 아주 휩쓸어버리면서 조 1위로 시드를 차지했다.


128강에선 날개에 달린 장치에서 볼트를 발사하는 매, 64강에서는 다리에 부스터가 달린 늑대, 32강에서는 흉악한 클로를 장착한 호랑이였다.


16강, 8강에서는 놀랍게도 한 번에 두 마리를 소환했다.


“잘 부탁해요.”


“제가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별말씀을.”


농담 아닌데. 엑스마키나라는 여자는 곧바로 소환수를 불러냈다. 그것도 어느 하나가 아닌 네 마리 전부를 한꺼번에.


“아이 씨, 잘 부탁한다며!”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상황에,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도 없이 볼트가 마구 날아왔다.


-티딩팅팅!


방패에 맞고 떨어지는 볼트가 비 오는 소리를 냈다. 위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연사 속도가 문제여서 도무지 다른 행동을 할 새가 없었다.


볼트가 멈추자, 이번에는 세 마리 야수의 파상공세가 쏟아졌다.


늑대 이빨을 피하면 호랑이의 앞발이 후려쳐오고, 그것을 막아내면 곰의 몸통 박치기에 밀려나는 실정이었다.


‘이대로면 손도 못 써보고 당하겠다.’


내 레벨의 두 배쯤 되는 130레벨까지는 ‘참교육’을 쓰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던거지.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그래도 고작 이 정도에 참교육을 꺼낼 수는 없잖아?’


나는 공중을 날아다니던 매가 머리 위에 오길 기다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전격 마법을 펼쳤다.


‘체인 라이트닝!’


먼저 매에게 적중한 강한 전하는 전류를 이루어 연쇄적으로 네 마리 소환수를 휩쓸었다.


각기 금속제 기계 장치를 걸친 녀석들이기 때문에 전격 효과가 잘 먹혀들었다.


그중에서도, 정신을 쏙 빼놓던 가장 큰 원흉인 매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피해를 보더라도 매 하나는 없애고 간다.’


메이스에 전격 피해 마법을 인챈트하고 맹렬한 돌격을 사용해서 매에게 다가갔다.


-콰직!


데스티니로부터 배운 ‘분쇄’. 메이스 스킬을 사용하자 매는 금방 소환 해제 되었다.


쉴새는 없다.


메이스를 집어 넣고 타락한 엘프의 장궁을 꺼내서 올가미 스킬을 썼다.


달려오려던 그리즐리가 멈춰서고, 나는 그 자리에 파이어 월을 두 차례 중첩해서 피워올렸다.


“크엉!”


그리즐리는 멈췄지만 소환수는 아직 둘이 더 남아있다.


늑대와 호랑이가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달려든 것은 동시지만 부스터가 불꽃을 뿜은 늑대가 훨씬 빨랐다.


손가락만큼 긴 이가 내 팔에 와서 박히는 것과 동시에, 늑대를 왼팔에 매달고 함께 뛰어 올랐다.


“도약!”


피해를 감수하고 한 일이다. 늑대의 이가 실시간으로 내 팔의 보호구와 함께 근육까지 찢어놓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지상의 두 야수를 향해 체인 라이트닝을 시전했다.


-빠지지지직!


팔에 매달린 늑대의 이가 점점 더 깊이 팔에 박혔다. 나는 중력가속도를 느끼며 메이스 손잡이로 늑대의 머리를 사정없이 찍었다.


-파직, 파직, 파직!


전격 인챈트된 손잡이가 머리를 때릴 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늑대는 견디지 못하고 착지와 동시에 내게서 멀어졌다.


마나 흡수와 HP 흡수 5% 덕분에 죽을 지경은 아니지만, 나도 상당한 피해를 봤다.


“꾸어엉!”


그리즐리의 올가미가 풀릴 기미가 보여, 신 그레이 세트의 기술 ‘구속’을 사용해서 한 번 더 그리즐리를 잡아 뒀다.


“파이어 월!”


시종일관 구속기에 잡혀서 아무것도 못 한 채 분통을 터뜨리던 그리즐리가 소환 해제된 이후, 나머지 둘을 정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힘들다.


그러나 전투의 흥분으로 인한 아드레날린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는 메이스를 고쳐 쥐고 엑스마키나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왜 저를 공격하지 않았죠?”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소환사를 상대하는데 기본은 그거 아닌가요?”


“그럴 시간이 없었는데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네 마리의 협공이 몰아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중간에 제 매가 소환 해제된 다음에는 시간이 있었을 텐데요?”


“그냥, 상대할 만했고. 하다 보니 흥이 나서.”


“흠···. 이런 중요한 대회에서?”


“제 걱정은 마시죠. 이제 그쪽 차례니까. 아, 이제는 다시 소환해도 그쪽만 두드려 팰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나는 여차하면 참교육을 꺼내 한 방에 끝낼 결심을 했다.


“글쎄요. 그럴 시간이 있을는지···.”


엑스마키나라는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경기장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다.


“어?”


“엑스마키나 장외! 아웃사이더 승!”


”이런 게 어디 있어! 한 대만 맞고 가!”



* * *



“분하다.”


결승전을 위한 휴식 시간 10분이 주어졌지만, 억울함은 가시지 않았다.


몸의 상처야 포션으로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상처는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


경기 시간 내내 엑스마키나는 남의 일 구경하듯이 철저히 관람객 모드를 고수하다가 떠나갔다.


“그럴 거면 대체 무투회에는 왜 나온 거야?”


100레벨 답지 않은 강함과 여유. 충분히 우승을 노릴만한 여자였는데.


게다가 떠날 때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갔다.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선물을 보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묘한 구석이 있음을 알아챘다. ‘보낼 건데’가 아니라 ‘보냈는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체 뭘 보냈다는 건지.”


결승전에나 집중하는 편이 낫겠다.


퇴사하기 전 회식 자리에서 듣기로, 고정우는 원래 마법사 계열 캐릭터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캐릭터를 초기화하고 다시 키운 고정우는 전사 계열이 되었다.


전사 종류 중에서도 흔치 않은 무림인이었는데, 나로스 대륙에서 좀비 사태를 피해 도망 온 ‘신영류’라는 일본 느낌의 유파 도장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커뮤니티 글이 있었다.


“새끼, 딱 자기한테 어울리는 데를 골랐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도를 사용했고, 힘이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몸놀림이 빨라서 까다로운 상대가 되어 있었다.


방어구는 중갑이 아닌 경갑옷.


하지만 회사돈을 퍼부었을 테니 방어력은 중갑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제대로 똥을 뿌려야 할 텐데.”


우승도 좋고 상금도 좋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회사에 엿을 먹이는 것이다.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맘 같아선 회초리를 사용하고 싶지만.”


그것은 내 영업비밀이다. 오히려 참교육보다 더 숨기고 싶은.


“참교육은 너무 자비롭고.”


한 방에 끝내 버린다고?

절대 안 될 말이다.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자.



* * *



현장 수만 명,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수백만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승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차성우 부사장은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호기롭게 오늘의 이벤트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결승전은 TOOL의 직원끼리 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 부장, 고정우한테 그거 줬지?”


“물론입니다.”


모든 것은 저놈, 아웃사이더라는 놈 때문이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놈인지, 질 것 같은데 도무지 지지를 않는다.


“고정우 레벨이 127이지?”


“그쯤 될 겁니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레벨이나 장비를 고려해 볼 때 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최후의 카드까지 건네고 말았다.


‘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가 고정우에게 넘겨준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줄을 이용해서 2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구한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무투회에서 사용했다가는 이겨도 큰 논란이 있을 만한 물건이라 가급적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고정우 저놈 뭐 하는 거야? 소개팅 나왔어?”


경기 시작 신호가 울렸는데 고정우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 공격을 주저하고 있다.


“아웃사이더 놈이 무슨 사술을 썼는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냥 가만히 눈앞에 서 있는데.”


“네?!”


“김 부장 벌써 백내장이야?”


“아닌데···. 이봐, 자네도 보여?”


“안 보입니다···.”


차성우는 퍼뜩 생각이 났다.


저런 기술, 들어본 적이 있다. 그는 급히 자신의 과거 길드원이었던 마법사에게 물었다.


“자네는 보이지?”


“네. 아무래도 저거 ‘병풍’인 것 같네요.”


“역시.”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기술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다.


걸리는 사람과 안 걸리는 사람이 있을 뿐 파훼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능이 높아야 잘 걸리는 것으로 아는데.


차성우의 머릿속에서 폐기했던 아웃사이더 마법사 설이 다시 모락모락 피어났다.


“위험해.”


아웃사이더는 고정우의 뒤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숨길 것도 없이 당당하게. 이런 상태에서 기습은 위험하다.


“?”


아웃사이더는 고정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메이스를 집어넣고 맨손으로.


* * *


-퍽!


고정우가 보기 좋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 후련하다.’


아마도 데미지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꼴사나워서 그렇지.


그 한방으로 고정우에 대한 병풍 스킬은 풀렸다.


“어떻게 한 거냐?”


황급히 일어나 수비 자세를 취했지만, 내게 후속 공격 의사가 없는 것을 깨달은 고정우는 반격 대신 그렇게 물었다.


“나중에 영상 보고 확인해. 설명하기 귀찮다.”


“기습 기회를 이렇게 날린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노기를 가득 띄운 고정우의 검세가 예리하게 나를 노렸다.


“어이쿠!”


확실히 공격력은 뛰어났다. 검에 스피드가 제대로 실려 어디를 노리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중갑에 방패까지 들고 있고, 평타로 들어오는 데미지는 미미했다.


반응을 가늠하던 고정우는 기습적으로 스킬을 발동했다.


“유성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검격이 머리 위에서 연이어 떨어졌다.


방패로 막는다고 막았지만, 데미지가 제법 크게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패시브 스킬 ‘스톤 헤드’의 덕에 두경부의 방어력이 전신에서 가장 강하다.

견딜 만했다.


“오우!”


그럼에도 스킬 시전이 끝났을 때는 HP의 삼 분의 일가량이 뭉텅 줄어 있었다.


“여유 있는 척하면 사정이 좀 나아지나?”


고정우는 비아냥거렸다.


“아니, 부러워서 그러지. 나는 기초 스킬밖에 없거든. 너는 좋겠다. 회사에서 팍팍 밀어주니까 스킬도 장비도 아주 그냥 죽여주네.”


“회, 회사라니?”


“에이, 이거 왜 이래. 아마추어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 없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고정우는 흥분해서 칼을 상단세로 고쳐 잡았다.


‘이제 큰 스킬 나올 타이밍인데.’


고정우의 발이 움찔할 때를 노려서 나는 신 그레이 세트의 스킬 ‘수치’를 걸었다.


막 발을 내딛으려던 고정우의 얼굴이 사과처럼 예쁜 빨간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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