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늪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분명 소파에서 김 비서가 홀로그램 영상으로 띄우는 커뮤니티 반응을 보고 있었는데?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소파에서 그냥 잠드셔서 제가 옮겼습니다.”
“나를? 네가?”
“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몸, 강하더군요.”
그러니까 잠든 아이를 아빠가 안아다 눕히듯이, 김 비서에게 안겨서 침대에 누웠다는 뜻이로군.
“식사 하십시오. 간단히 시리얼로 준비했습니다.”
몸을 갖게 되니 비서가 집사이자 요리사까지 겸하게 되는구나. 그건 참 마음에 드는데···.
“김 비서야, 그 옷은 뭐냐?”
“아직 제 안드로이드 바디에 걸칠 의상이 배송되지 않아 아쉬운 대로 주인님이 더 이상 입지 않으실 옷을 재활용했습니다.”
“안 입을 옷이 맞긴 한데.”
뭘 알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와이셔츠만 걸친 여자는 파괴력이 좀 지나치지 않냐?
“아, 이걸 걱정하시는 겁니까?”
김 비서는 허벅지에 내려온 와이셔츠를 확 들쳤다.
“왁!”
그러나 그 속에는 반바지가 있었다. 아쉽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걱정하지 마시고 식사하십시오. 시상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차.”
* * *
로그아웃한 장소가 무투회장이었기 때문에 접속했을 때도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러나, 어제 그토록 치열한 경기가 있었던 장소는 하루 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평원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포니투를 타고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시상식이 예정된 곳은 쏠레 시티 시청사 근처의 건물.
원래는 비어 있던 상가의 2,3층을 TOOL의 길드 하우스로 매입했다고 한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된 상태였다.
“이야, 박··· 아니 아웃사이더님 어서 오세요.”
김 부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일검무적님.”
김 부장을 필두로 사람들이 다가왔다.
수상자인 4위까지 중, 엑스마키나는 수상을 거부했다고 하니 결국 세 명 모두가 TOOL과 관련이 있었다.
1위인 나는 전직, 2, 3위는 현직 TOOL 직원.
3위를 차지한 직원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2위인 고정우는 매일 같이 얼굴을 보던 사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투회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인 양 어색하게 악수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옥면공자 님.”
“어제는 한 수 배웠습니다. 아웃사이더 님.”
손을 놓고 뒤돌아서는데 고정우가 짧게 덧붙였다.
“메시지 확인요.”
뒤돌아봤을 때 고정우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이후로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하하호호 악수를 나누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상금이 적힌 패널을 들고 영상을 촬영했으며, 여전히 나를 무서워하는 제로아와 인터뷰도 적당히 포장해서 잘했다. 물론 제로아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그 모든 일이 끝나고 헤어진 후에야 나는 고정우의 개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박 대리님, 조심하세요. 부사장님이 감시를 붙일 거라고 합니다. 기간은 1주일. 혹시 변동 사항 있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사장님, 무서운 분이에요. 조심하세요.
추신: 부사장님이 저희 외삼촌 되십니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메시지에는 감시조 세 명의 스틸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물론 게임 캐릭터니까 장비만 바꿔도 알아보기 쉽진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큰 정보임이 분명하다.
‘왜 갑자기?’
나는 끄나풀이 붙었다는 것보다 고정우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가 더 궁금했다.
하지만 알 바 아니다.
나는 이제 이틀 뒤면 나로스 대륙으로 건너가니까.
이제는 감시역이 두 팀이다.
하나는 GM 측, 하나는 부사장 측.
GM 쪽이 좀 뜸해졌다 싶었더니 자꾸만 뭐가 달라붙네. 그 말은 당분간 여기서는 낙원 온라인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어휴, 내 팔자야. 미영이한테 음식하고 책 가져다줘야 하는데.”
나로스 대륙으로 가려면 준비물이 많이 필요하다.
이시연이 준 쪽지에 의하면, 포션이나 해독제, 수리 키트, 안전지대 캠프 세트, 스태미나 보충용 음식도 필요하고 여분의 장비도 필요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쓰여 있었지만 어차피 이시연은 본격 원정 준비고 나는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 뿐이다. 대부분의 물품은 그쪽에서 준비한다.
“그래도 오늘은 쇼핑 데이가 되겠군.”
인벤토리에 든 잡템을 대거 처분하고 무지성 쇼핑을 시작했다. 갑옷을 벗고 다른 옷을 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밀키트와 과자, 보존 식품을 어마어마한 양으로 사들이자, 상가 NPC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큰 손(호구)이 나타났다!’
식료품점을 떠나 약국에 가서 체력, 마나 회복용 포션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제는 제법 체력이 늘었기 때문에 하급으로는 부족하다. 중급과 상급을 섞어서 구매했더니 주인이 말을 걸었다.
“다른 포션은 필요 없으신가요?”
“뭐 말입니까?”
“해독, 속도 증가, 석화 해제, 질병 치료, 냉기 보호, 화염 보호 등 없는 걸 찾으시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나로스 대륙이니까 하나씩 사 두기로 했다.
쓸 일이 없으면 다시 팔면 되겠지. 손해는 보겠지만 로파의 골드 따위, 내게는 별로 아깝다 여겨지지도 않고.
대장간에 가서 수리 키트도 몇 개 샀다.
이시연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오겠지만 개인적으로 갖고 있을 셈이다.
내가 입고 있는 장비의 수리를 맡기고 기다리는데 또 주인이 말을 걸었다.
“다른 장비는 필요 없으십니까?”
생각해 보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많이 사면 할인해 줍니까?”
“얼마나 사시게요?”
지금 미영이에게 넘겨준 장비가 극초보 상점제, 50레벨 넘어서 사용할 피의 십자군 세트 두 가지다.
사이가 비어 있어서 10, 20레벨 정도에 입을 갑옷과 무기 일습을 구매했다. 비록 상점제지만 없는 것보다 낫겠지.
가게를 나설 때는 주인이 따라 나와 구십 도로 인사했다.
“또 오십쇼!”
다음은 의상실 겸 천 보호구 상점.
그곳에서는 김 비서가 고른 옷을 두 벌씩 샀다. 하나는 홀로그램 김 비서용, 하나는 미영이 용.
그러다가 의상실 한구석에 여태까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던 탈의실이 눈에 띄었다.
‘가만···. 저기라면?’
안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척하면서 얼른 낙원에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이의 눈 신경 쓰지 않고.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저기 안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봐도 됩니까?”
“그럼요. 물론이죠.”
“지금 좀 쓰겠습니다.”
“네? 지금요?”
써도 된다는 말과는 달리 의상실 주인 여자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네, 지금 당장. 난 지금 꼭 입어 봐야겠어요.”
“쓰, 쓰세요.”
나는 옷을 잔뜩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낙원으로!”
내가 떠난 것을 알지 못하는 의상실 주인의 혼잣말만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저 손님, 여자 옷밖에 안 골랐는데···.”
* * *
휴게실에 포션과 원정용 물품을 잔뜩 쌓았더니 인벤토리의 절반이 비었다.
“이거 완전 개인 창고네.”
내가 위험한 나로스 대륙으로 가는데도 별 부담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언제든 휴게실로 올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지하실로 나와 미영이의 음식과 장비를 내려놓았더니 또 인벤토리가 훅 비었다.
비로소 안심이 된다. 이제 진짜 나로스 원정 준비가 끝난 것이다.
“아빠!”
오늘은 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허둥대지 않고 능숙하게 미영이를 받아 안았다.
안아주는 게 익숙한 것보다 아빠 소리가 익숙한 게 더 문제지만.
”미영아, 이거 받아.”
“이게 뭔데?”
“책하고 옷.”
“난 이런 것보다 아빠가 자주 오는 게 더 좋은데.”
가슴이 욱신거렸다. 진짜 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내 건 없나?”
에드윈이 끼어들었다.
“네가 뭐가 필요한데?”
“어허. 꼭 필요한 걸 받아야 선물인가? 자고로, 선물이라고 하면 필요 없는 물건일수록 좋은 선물이라는 게 내 지론일세.”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 곰 인형이 무슨 선물 타령이야. 나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미영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구나. 에드윈, 미안해!”
“응?”
“맨날 나만 받고 에드윈 생각을 못 했어.”
곰 인형에게도 표정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에드윈을 보면 감격한 곰 인형의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미영이는 내게 매달린 채로 귀에 속삭였다.
“아빠, 다음에 올 때 옷감하고 바느질 도구 좀 가져다줄 수 있어?”
미영이가 내게 처음으로 한 부탁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도다! 저런 양심 없는 놈 밑에서 자란 딸이 이렇게 바르게 자라다니.”
나는 에드윈의 개, 아니 곰 소리를 무시했다.
“그래, 다음에 올 때 꼭 가져올게. 그런데 나는 이제 가봐야 해. 요즘 내가 인기가 많아져서 쫓아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리를 도무지 비울 수가 없네?”
나는 미영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다시 로파로 돌아왔다.
⋮
탈의실 문을 열고 나가자, 주인 여자가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가 나와 마주쳤다.
“왜 문 앞에 서 있습니까?”
“아, 아니! 전!”
“남자 옷 갈아입는 거 훔쳐보는 취미 있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다음부턴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불쾌하니까.”
“다음부턴···?”
“종종 들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떠나는 나를 배웅한 주인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보였다.
“변태한테 변태 취급 받았어···.”
돈이고 뭐고 진한 직업적 회의를 느끼는 날이었다.
* * *
부모님 댁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바깥 풍경이냐?’
게임 내 활동량이 워낙 많아서 착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지난번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이후 처음 밖에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다시 조깅이라도 해야 하나?’
자칫 잘못하다간 은둔형 폐인 되겠다.
부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부모님에, 여동생 내외, 조카까지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니까.
“모두 안녕하십니까. 오! 정훈이도 왔네? 출장 갔다더니.”
“네, 형님. 바로 이리 왔어요.”
“얘, 넌 정훈이가 뭐냐. 매부라고 부르라니까.”
엄마가 타박했지만 어쩌겠나. 어릴 때부터 봐서 입에 익은걸.
“제 경기는 다들 직관하셨죠? 어떻게 재미들 좀 보셨···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입장과 동시에 기립박수가 나오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천 오백 배의 대박을 친 사람 얼굴들이 아닌데? 엄마, 혹시 안 샀어요?”
“아냐 아냐, 얘!”
그런데 대체 한숨은 왜 쉰 거야?
“다만···.”
“다만 뭐?”
“50만 원을 다 안 사서 그렇지.”
이럴 수가. 아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구나. 내가 용돈까지 보내 가면서 사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얼마?”
“10만 원···.”
“아버지도요?”
“크흠! 난 그래도 20만 원이다.”
“······.”
그래도 아주 안 산 건 아니니까 됐다. 두 분이 합쳐 16억. 세금 떼고 10, 11억은 얻었으니까.
“동생아. 넌?”
“크흑!”
수진이는 식탁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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