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늪
“엄마, 왜 울어?”
“여보, 진정해.”
아들과 남편이 진화에 나섰지만, 수진의 울음소리는 오히려 커졌다.
“난 안 샀단 말이야. 으엉~, 난 똥멍청이야! 심지어 이 사람한테는 사지 말라고까지 했어, 으앙!”
“······.”
이거 조금 서운하려고 하네?
”동생아, 이 오빠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냐? 네 운은 여기까지인가 본데.”
“으아앙!”
“여보, 이거 보고 뚝 그쳐.”
“어?”
매부 정훈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사, 샀네?! 일, 십, 백··· 헛! 50만 원 꽉 채워서!”
“당신이 하도 사지말라고 해서 비밀로 했어. 미리 말해야 했는데, 미안해. 출장에 바빠서 서준이 형 우승한 거는 오다가 알았지 뭐야.”
“으앙~! 고마워, 여보! 사랑해!”
눈물의 이유가 순식간에 절망에서 희열로 바뀌었다.
“서준이 형이 그래도 우리 클랜장이었는데. 내가 그 정도 의리는 있지.”
그렇다. 정훈은 과거 베타 시절 우리 클랜원 중의 한 명이었다.
“어떠냐. 믿은 만큼 보답해 주는 남자. 박씨를 물어다 주는 박 씨. 그것이 나다. 하지만 이건 좀 짚고 넘어가야겠네.”
내가 노려보자, 수진은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뭐? 호, 혹시 커미션 떼달라는 말이면···.”
“나한테 걸라고 지원해 준 나머지 돈. 당장 내놔. 어디서 슈킹이야?”
“돈도 형이 지원해 줬어요? 난 금시초문인데?”
“정훈이 넌 저 배은망덕한 녀석에게 구입 비용 50만 원 받아라.”
식사는 화기애애했다.
장남이 밖에 나가서 두들겨 맞아가며 번 돈은 가족의 평화를 불러왔다.
“오빠, 여기 나만큼 심한 멍청이가 있다.”
“뭔데?”
수진이 보여준 글은 일종의 반성문이었다.
[제목: 아웃사이더 역배 성공하고 눈물 흘린 썰 푼다.]
[5501배 대박 터뜨리고 혼자 소주 마시면서 펑펑 울었다. 왜?
1,000원짜리 베팅이었기 때문이다. 쓰바.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프로토 사던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날의 나를 죽도록 패고 싶다.]
└ 그래도 님은 성공하셨네. 500만 원은 버셨잖음. 나는 배당 1,000배짜리 걸면서 5,500짜리 거는 미친놈은 누가 있을까 비웃는 글 썼는데. 진짜 손꾸락을 잘라버리고 싶음.
확률 낮긴 마찬가지인데 1,000짜리 걸 바에야 화끈하게 꼴찌한테나 걸지 뭐 대단한 분석가 납셨다고. 완전 짜증 남.
└ 여러분, 진정해야 합니다. 그 배당률을 보고 아웃사이더에게 건 사람이 있기는 했을까요? 아니 몇 사람 있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도 만 원 이상 걸지는 못했을 겁니다.
└ 한강 물 들어갈 만하냐?
└ 8월이라 들어갈 만함. 같이 갈래?
“동생아. 이런 자들과 비교해서 은근슬쩍 물타기를 시도하지 마라.”
“쳇.”
“삼촌, 진짜 삼촌이 아웃사이더야?”
진우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먼 신성모독보다 가까운 아웃사이더가 몇 배 신기할 테니까.
“그럼, 이제 랭커 되는거야?”
“랭커가 될 생각은 없는데? 삼촌은 그냥··· 은둔 고수로 살 거야.”
“은근 고수가 뭔데?”
“은근 아니고 은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사는 거 말이야.”
“그런데 뭐든 잘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던데, 어떻게 눈에 안 띄어?”
“그러게나 말이다.”
낭중지추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조카의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왔다.
⋮
“김 비서야.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정도 되지?”
“현 통장 잔고는 육억 오천만 원 이상입니다.”
“응? 언제 그렇게 늘었어?”
“오늘 무투회 상금과 퇴직금, 퇴직위로금 명목으로 입금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질질 끌더니만 결국 이렇게 TOOL과 나의 관계가 끝이 났군. 이렇게 퇴직금까지 재깍 처리해 준 이유는 초 치지 말고 깔끔하게 떨어지라는 소리겠지.
바라던 바다.
“세금을 공제한 프로토 상금을 합치면 주인님의 가용 자금은 25억이 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좋아. 우리 이제 이사 가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송곳이 결국 뚫고 나오기 전에 주머니를 좀 더 튼튼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서 그래.”
“네?”
이런 비유는 아직 좀 어려웠나.
“20억을 넘지 않는 선에서 매물 좀 검색해서 정리해 줘. 형태는 단독이건 아파트건 좋은데, 가급적 지나치게 이웃이 많지 않은 곳으로. 게임 하면서 혼자 살기 적당한 곳.”
말하고 보니 너무 조건이 추상적이다.
“알겠습니다. 곧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김 비서만 믿는다고.”
“네, 맡겨주십시오.”
* * *
“가자, 포니투!”
“이힝힝! 어디로 갑니까요!”
“동쪽으로! 무작정!”
무투회가 끝나고 3일째, 드디어 나로스 대륙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나는 데스티니와 DNC 공략대를 만나기 위해 그리핀을 얻어 타고 동쪽 항구 도시 리고스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제 하루는 온전히 시간을 내서 레벨업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제 레벨이 많이 오른 탓에 하루 종일 던전을 돌았어도 레벨을 네 개밖에 올리지 못했다. 물론 내 기준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루 만에 레벨을 4나 올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놀라 자빠지겠지만.’
또 한 가지 내게 유의미한 변화도 있었다.
‘참교육’의 성장 조건이 변한 것이다.
기존에는 던전에서 정예 20마리를 잡을 때마다 한 단계씩 성장했는데, 이제 30마리마다 하나씩 성장하게 되었다.
‘참교육으로 추가되는 힘과 민첩이 100이 되면서부터 그렇게 됐지.’
내게 있는 또 하나의 성장형 아이템 ‘무자격자는 헬창을 꿈꾼다’는 아직 성장 조건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조건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웃사이더]
▶레벨: 71
▶종족: 인간
▶성별: 남
▶칭호: 솔플의 제왕, 그건 내 잔상입니다만, 특급 배송, 분노조절장애, 미친개, 바퀴벌레, 팔방미인
▶HP: 1158/1158, MP: 1056/1056
▶공격력: 9158, 방어력: 136978
▶힘: 157(+267), 민첩성:157(+228), 지능:177(+175), 체력:157(+229)
▶액티브 스킬: <펼치기>
▶패시브 스킬: 제국 보법, 일점 폭발, 인내, 명상, 스톤헤드
▶전문 기술: <펼치기>
그리하여 레벨 71을 넘겼다.
[참교육: 둔기]
▶예로부터 매를 아끼면 아이를 버린다고 했다. 먼 과거, 한 용사가 어떤 불효자를 계도하기 위해 뚝배기를 깰 때 쓰였던 이 방망이는 누구를 교육하더라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공격력 216-256(두경부 적중 시 2배 적용), 성장형
▶제한 레벨 1, 힘 10
▶장착 효과: 힘+108, 민첩+108
▶특수 효과: 아주 강한 넉백, 인간형 상대 시 공격력 20% 증가
▶파괴 불가
참교육 자체의 공격력도 많이 올라서 216~256이다.
이시연이 부무장으로 사 간 [해충 박멸의 몽둥이] 공격력이 250~300인 것을 감안하면, 추월하는 것도 이제 가시권이라 할 수 있었다.
“주인님! 무릎 위치 조금만 바꿔 주시렵니까? 거기는 너무 간지러운데요.”
“으이구, 됐냐?”
“한결 낫네요. 좀 긁어 주시면 더 좋을 텐데요···.”
“어우, 내 팔자야.”
“아니, 좀 더 뒤. 거기보다 조금 아래. 네! 거깁니다요! 이히힝!”
스스로의 성장에 도취하여 붕 떠 있던 나를 포니투가 현실로 끌어내렸다.
내 레벨이 60이 넘으면서부터 갑자기 포니투는 앞다리 어깨 근처가 간지럽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것은 포니투와 관련된 퀘스트가 뜬 직후의 일이었다.
[퀘스트 발생! 진화]
[당신의 유니크 탈 것 ‘포니투’는 중요한 성장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진화에 도움을 줄 이를 찾으십시오.]
‘고급 타기’가 가능한 레벨 60에 등장했다는 점. 자꾸만 어깨 부위가 간지럽다고 하는 점.
그 두 가지를 조합해 보면 상당히 두근거리는 상상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엄두가 아직 안 났다.
“간지러워도 좀 참아라. 나로스 다녀온 후에 해결해 줄게.”
“히히힝! 그럼 불러낼 때마다 잘 긁어주셔야 합니다요.”
말 위에 앉아 손을 바꿔가며 양어깨 부위를 번갈아 긁는 이상한 자세로 결국 항만까지 도착했다.
“아, 주인님. 저기인가 봅니다.”
포니투가 바람처럼 달려가 멈춘 곳에는 여자 십여 명이 서 있었다. 그중 두 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다.
포니투를 벅벅 긁으며 달려온 나를 본 여자들은 상당히 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게 바로 루나 갈란테 교수가 말한 말하는 유니콘인가요?”
“들으셨습니까?”
“네. 그런데 교단에서 생각한 성수의 모습은 아니라 하더니 정말이군요.”
“이놈이 갑자기 아토피라도 생겼는지 자꾸 긁어달라고 해서 말이죠.”
데스티니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부길마 강지민이 끼어들었다.
“언니, 이게 진짜 진짜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해 봐.”
“여기까지 와서 왜 자꾸 그래. 난 맘 바꿀 생각 없어.”
“에휴. 미치겠다.”
강지민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제가 할 말이네요.”
강지민은 내 말에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무리 봐도 미친 짓인데. 부디 애먼 짓은 하지 마시고 얌전히 다녀오시길. 혹시라도 무리한 요구를 해서 저희 마스터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
“뭐, 그럽시다.”
강지민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돌아서서 다른 여자들에게 가버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부길마가 많이 예민해져 있어요. 아웃사이더님 때문이 아닌데도···.”
“됐습니다. 어차피 계속 볼 사이도 아니고.”
부길마뿐 아니라 데스티니 당신도 거기 다녀온 이후엔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아마도.
생각보다 훨씬 긴 작별 인사 끝에, 데스티니와 함께 남은 사람은 네 명의 여자였다.
“시간이 다 됐으니 일단 배에 타서 정식으로 인사하도록 하죠.”
나는 데스티니를 따라 항만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갔다.
‘곤지암 운송이군.’
하긴 대륙 단위의 화물, 여객 운송이 가능한 곳은 곤지암뿐이니 당연하다 하겠다.
“시간 맞춰 오셨군요.”
“네. 준비는 마쳤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나 탑승에 앞서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데스티니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지불하신 요금이 좀 많더군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정확히 여섯 명분을 드렸는데.”
“여섯 명이 아니라 다섯 명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한 명은 못 간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중 고객은 다섯 분. 한 분은 가족입니다.”
영문 모를 말에 데스티니의 얼굴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어제 받은 고객명단을 보니 아웃사이더 님이 계시더군요. 아웃사이더 님은 페덱스 회장님이 직접 지정한 곤지암 패밀리로서 모든 개인 운송비용이 면제됩니다.”
“아.”
나도 잊고 있었던 사항이다.
페덱스 땡큐.
그렇지만 이번 운송은 내가 돈 내는 거 아닌데 그냥 받지.
뜻밖의 해프닝에 여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또 달라졌다. ‘쟤는 뭐?’에서 ‘얘가 왜?’ 그런 눈빛으로.
‘아, 피곤하다.’
모르는 여자 다섯 명과 함께하는 여행. 던전도 솔플로 해결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동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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