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데스티니는 선두에, 그다음 하이디와 설화, 그 뒤에 플로라, 그 바로 뒤에 나와 미트라가 따르는 대형으로 계속해서 숲길을 헤쳐 나갔다.
원래대로라면 길잡이 역할은 원거리 유닛이 맡게 될 텐데, 이 파티의 궁사 역할은 바로 나. 다른 파티원 레벨의 절반도 안 되는지라 나설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승객이니까.’
데스티니가 운전하는 버스의 승객. 애초에 나설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승객이 활 쏴주는 것도 감사히 여겨야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좀비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이제 곧 어쩔 수 없이 시가지에 들어서야 한다.
“저기가 페트라예요.”
‘페트라라면 협곡 사이에 있는 그 도시?’
산길을 통과하여 길을 재촉하길 한 시간. 지금까지 마주친 좀비는 한 삼십여 구.
놀라운 것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좀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람보다 오히려 동물이 더 많았다.
그러나, 저 페트라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 바위를 깎아 만든 도시다. 몸을 숨길 나무나 풀숲도 없는 곳.
“저기를 통과하지 않고 돌아가면 하루 정도 더 걸릴 거예요. 여기까지 와 본 사람에 의하면, 저기를 통과하려던 순간에 뭔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도망쳤다고 해요.”
플로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저 안에 뭐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거네요?”
“응. 그 파티는 우회를 선택했어. 그래서 지도에는 저 도시 입구까지만 나와 있지.”
플로라의 질문에 답한 데스티니는 파티원 전체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저 도시를 통과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게 훨씬 빠르고. 또 혹시 퀘스트라도 있다면 경험치 쌓기도 좋고. 어떻게들 생각해요?”
DNC 사람들은 이견이 없었다.
“아싸님은요?”
“저도 좋습니다.”
빠르고, 경험치 오르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은신 계열 스킬이 있는 설화가 잠시 정찰을 간 사이, 일행은 잠시 대기했다.
“그런데 오빠. 신 그레이는 어떻게 꼬신 거예요?”
이제 아예 대놓고 오빠라고 부르는 플로라였다.
“우와···. 나도 물어보고 싶어도 차마 말은 못 꺼냈는데. 역시 플로라 넌 깜빡이 따위는 없구나.”
하이디가 가세했다.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이시연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후기지수 무투회에서 있었던 그 일은 다들 초미의 관심사다.
내 우승 소식보다 더 궁금해하는 게 신 그레이 소환수 만들기.
“운이 좋아서죠.”
“에이, 그건 아니죠. 저도 지금까지 숱하게 던전을 다녔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는데요.”
아즈쉬 빈헬도 빈혈이라는 팬시한 이름을 얻고 내 옆에 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그때 설화가 쓱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나도 병풍이나 은신 같은 스킬 사용하면 저런 느낌이려나. 그런 설화에 익숙한지 플로라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투덜댔다.
“신 그레이 어떻게 꼬시는지 물어봤는데 이 오빠가 안 가르쳐 줘, 힝.“
설화는 별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곧 이시연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이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에게 선언했다.
“내부에는 뜻밖에 별거 없었다고 해요. 적당한 건물을 발견한 것 같으니 거기서 한번 로그아웃하고 가죠.”
* * *
“휴···.”
“다녀오셨습니까? 나로스 대륙 어렵지는 않으셨는지요?”
“어.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 * *
그렇게 대답한 내 입을 때려주고 싶다.
약속한 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채워서 접속했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시퍼런 칼날이었다.
“으왁!”
혼비백산. 가까스로 데스티니의 검을 피했다.
“미안해요!”
볼품없이 땅에 구른 후에야 사태 파악이 됐다. 안전한 장소인 줄만 알았던 건물 안에 좀비가 한가득이었다.
‘이게 무슨.’
공간이 좁아서 데스티니는 검을 휘두르다 말고 해충 박멸의 몽둥이를 꺼냈고, 하이디는 문에서 추가로 진입하는 좀비를 막는 중이었다.
미트라는 왠지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고, 플로라와 설화는 미트라를 보호하며 원거리 공격을 날리는 중이었다.
‘개판인데··· 개꿀이네?’
이런 파티에 기본 파티 경험치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몸빵에 어그로해주는 고렙이 이렇게 많은데.
“파이어월! 파이어월!”
일단 하이디가 막고 있는 문밖에 2 중첩으로 불을 지르고 메이스를 꺼냈다.
‘집중, 병풍!’
파티다, 파티.
나는 다른 사람이 상대하고 있는 좀비의 뒤통수만 골라서 갈기고 다녔다. 참교육을 꺼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건 이 나름대로 훌륭하다.
-퍽! 퍽!
살살 녹는다.
다른 사람이 다 잡아 놓은 고렙 몬스터 막타 뚝배기 맛이.
경험치 획득 로그가 미친 듯 넘어간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한 시츄에이션. 나로스에 와서도 좀 밋밋한 것 같아 아쉬웠는데.
-빠지지지직!
해충 박멸의 몽둥이에서 체인 라이트닝이 터지고 나니 건물 안에 있던 좀비가 대충 정리됐다.
“신성 영역 선포!”
미트라의 신성 주문이 완성되자, 건물 안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좀비마저 일시에 배터리 나간 로봇처럼 쓰러졌다.
하이디가 어렵게 막고 있던 문밖의 놈들 역시 마찬가지.
영역 밖에 있던 놈들은 들어오지 못해서 분통을 터뜨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으아, 죽겠다!”
하이디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대로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고 지치긴 마찬가지. 서 있는 것은 나와 데스티니 뿐이었다.
‘아깝다. 조금만 더 했으면 좋았을걸.’
이 잠시 동안 레벨이 두 개 올랐다. 하지만 또 이런 기회가 있겠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르겠어요. 분명히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로그아웃 한 건데.”
데스티니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플로라 스캔 좀 해 줄래?”
“잠시만요.”
마법사의 눈이 시전되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미니맵 상으로 우리가 있는 방 주변에 빽빽하게 몬스터를 뜻하는 붉은 점이 찍혔기 때문.
“이럴 수가.”
“아까는 하나도 없었는데?”
일행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쩌지, 언니? 강행 돌파하기엔 좀 많은데?”
“미트라, 오늘 또 영역 선포 가능해?”
“신성 영역 선포는 원래 내 사제 등급으로는 안 돼. 이럴 줄 모르고 스크롤 두 개밖에 안 챙겨왔는데.”
“다른 출구가 없잖아. 일단 플로라가 제일 센 마법 하나 던지고, 그 사이에···.”
데스티니 일행이 진지한 회의에 돌입한 사이, 가장 할 일이 없는 것은 나였다.
건물 안을 돌아다니던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건?’
벽에 걸린 장식품이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낙원에서 씨크릿 포인트 발견했을 때 보던 색과 같았다.
‘아니 조금 다른가?’
조금 연한 색 같기도 하고.
나는 장식품을 건드려봤다. 고정된 줄만 알았던 장식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쿠르릉!
“응?”
벽이 움직이면서 통로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요?“
이시연 일행이 뜻밖의 사태에 놀라 다가왔을 때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퀘스트 발생! 성물을 찾아라.]
[악신의 성물이 보관된 성소로 가는 통로를 찾았습니다. 통로를 통과하여 성물을 찾으세요.]
”퀘스트다!“
플로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시연이 물었지만, 반지의 스킬 덕이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우연히 벽에 걸린 걸 만졌더니만.”
“우와, 오빠 행운 장난 아니다. 이러니까 신 그레이를 우연히 소환수로 얻지.”
이시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결단을 내렸다.
밖에는 온통 좀비 떼. 비밀통로를 눈앞에 둔 이상, 결론 내리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이리로 가 보죠.”
이시연이 앞장서고 플로라와 설화가 그 뒤, 다음이 나와 미트라, 최후방은 탱커인 하이디가 맡아 좁은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이 좁고 어두워서 그렇지 내려가는 길 자체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
한참 내려가자 어두침침한 공동이 나왔다. 그 한가운데 음침한 분위기의 여신상이 서 있었다.
“저건···.”
[퀘스트 완료. 성물 발견]
[퀘스트 발생! 성물 파괴]
[당신은 악신의 힘이 담긴 성물을 발견했습니다. 하수인의 방해를 물리치고 신성한 힘으로 성물을 파괴하여 페트라에 안식을 선물하세요.]
이시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스케일의 퀘스트라면 경험치도 상당하리라.
“아무래도 파괴하는 것 자체는 내가 해야 하는 모양인데? 신성한 힘이라니까.”
미트라는 성물로 다가가서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네. 내가 기도로 파괴하는 거야.”
“그 얘기는 힐러 없이 하수인을 물리쳐야 한다는 거지?”
“그런가 봐.”
원정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별수 없지. 미트라, 기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전부 버프 걸어 줘. 다른 분들도 할 수 있는 버프류 스킬 있으면 서로 걸어주시고요.”
미트라는 축복과 재생력 촉진을, 플로라는 전원에게 헤이스트와 스트렝스를 걸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전사들의 무기에 화염 부여 마법을 걸었다. 전격은 이시연한테서 계속 터질 거니까.
“별걸 다 할 줄 아시네요.”
이시연의 감탄에 조금 우쭐해졌다.
“큰 도움은 안 될 겁니다. 숙련도가 낮아서.”
이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작하자. 미트라, 준비되면 시작해.”
“알았어.”
미트라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석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작한다.”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트라는 그대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9:59]
10분의 카운트가 시작되고, 갑자기 공동 한쪽 벽이 무너져 통로가 만들어졌다.
칠흑같이 어두운 통로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공동을 가득 메웠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
“저기로!”
미트라를 제외한 모두가 통로를 향해 뛰었다.
“파이어 볼!”
시작은 플로라부터였다.
내가 시전하는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불덩이가 터지면서 통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꿈틀꿈틀.
복도 전체가 좀비로 가득했다.
‘어우, 소름 끼쳐.’
어떻게든 통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몇 마리, 아니 단 한 마리라도 빠져나오면 대형이 흐트러지고. 그때부터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다행히 하이디와 이시연이 제때 앞을 틀어막았다.
상대적으로 체력은 약하지만, 공격력이 좋은 설화가 좌우로 뛰며 힘을 보탰고. 플로라는 뒤에서 연신 크고 작은 마법을 쏟아냈다.
‘내가 낄 틈이 없네.’
아쉽지만 내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다.
나는 활로 무기를 바꾸고 멀티플 샷을 쏘며 중간중간 파이어 월로 군불을 지폈다.
워낙 좁은 통로라 아무렇게나 쏴도 백발백중.
신나게 공격하고 있는데, 하이디가 미처 막지 못한 좀비 두 마리가 공동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좀비는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석상 앞에 망부석처럼 무릎 꿇은 미트라만 응시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막아!”
“뚫리면 안 돼!”
설화와 플로라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빠지지지직!
이시연이 들고 있는 방망이로부터 체인 라이트닝이 뿜어졌다.
’나이스 타이밍.’
상체가 거의 빠져나왔던 좀비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시연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그 거금에 해충박멸의 몽둥이를 낙찰받은 거구나. 돈 좀 더 받을 걸 그랬나.
“미안! 나 때문에!”
“괜찮아, 하이디! 집중해!”
좀비를 막은 지 5분.
이제 절반 지났다.
“좋아, 할 수 있어!”
이시연은 팀원의 사기를 북돋우며 날뛰었다.
힘에 몰빵한 육성법 창시자인데 나머지는 아이템으로 메꿨는지 민첩이나 마나가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쏟아지던 좀비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조금 숨을 돌릴 만해서 플로라가 마나 포션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쿠르릉!
반대쪽에 통로가 하나 더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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