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안 돼!”
전위의 이시연과 하이디는 한순간도 몸을 빼기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해도 곧장 방어선이 뚫릴 테니까.
플로라는 포션을 마시느라 잠시 앉아 있었고 설화는 멀다. 후위에 있던 내가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내가 갑니다!”
나는 새로 열린 통로 쪽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하나라도 빠져나오기 전에 길을 막아야 한다.
“그리스!”
입구가 가까워지자 나는 마법부터 던졌다. 최대한 통로 깊숙이.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첫 번째 통로보다 좁은 통로 안에서 좀비들이 서로 엉켜 넘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서로 기어 나오고자 발버둥 치는 죄인들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파이어 월! 파이어 월!”
내 마법 중에 가장 숙련도가 높은 파이어 월, 나는 이중첩 파이어 월을 좀비가 엉켜 쓰러진 곳에 자신 있게 피워 올렸다.
빈혈이를 앞뒤로 수백 번 구워가며 단련한 파이어 월의 위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내 마법으로 단시간 내에 저 많은 좀비를 처리하는 것은 무리.
‘원조가 올 때까지 최대한 지연하는 것이 베스트겠지.’
아니나 다를까 파이어 월이 꺼지기도 전에 불길을 헤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좀비가 생겨났다.
나는 이번엔 다른 마법을 동원했다.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의 위력은 별것 아니다. 다만 그 냉기로 인해 잠시 결빙효과가 발생하여 2초간 얼어붙는다. 그 몇초도 아쉬울 만큼 긴박한 순간이다.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남아있던 마나가 모두 동날 만큼 아이스 미사일을 난사하여 좀비의 전진을 저지하고 있을 때 설화가 도착했다.
“최고예요.”
설화는 나를 스쳐 가며 한마디 툭 내뱉고는 입구를 틀어막고 쌍검무를 췄다.
내가 깔아놓은 불지옥, 얼음 지옥을 빠져나오며 체력을 잃은 좀비는 설화의 2 검 이상을 받아내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내 막타!’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계속해서 파이어 월과 그리스를 던지며 설화가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드디어 좀비 웨이브가 끝을 보였다.
“후···.”
설화가 칼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시연 쪽도 끝났는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대개 이럴 때 제일 센 게 오던데.’
나는 못내 불안한 마음에 통로를 주시했지만 10초가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끝인 건가?’
그때였다.
-쾅!
두 통로 사이의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좀비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좀비의 군체? 온갖 살덩이가 다시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룬 그것은 키가 오 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벽이 무너진 곳 근처에 있던 데스티니는 괴물이 휘두른 팔에 맞아 날아갔다.
“언니!”
이시연이 충격에 쓰러진 동안, 하이디와 설화가 괴물을 막아섰다. 그러나 체급 차이가 너무 커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태위태하다.
“내가 가볼게요!”
나는 플로라에게 소리치고 이시연에게 달려갔다.
창백한 표정의 이시연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죽지는 않더라도 바로 합류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기였다. 데스티니야말로 저들 공격의 핵이기 때문.
아직 목적지까지는 한참 남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시연을 포기하기는 이르다.
‘그걸 쓸 때인가.’
포션은 체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아무리 상급이라고 해도 체력을 다 채우는 데 15초 이상 걸린다.
짧다면 짧지만, 그 시간이면 하이디와 설화가 완전히 박살 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나는 휴게실에서 가져온 음료 박X스 F를 까서 이시연에게 물려주었다. HP와 MP를 동시에 완전 회복시켜주는 비장의 음료.
“빨리 마셔요. 일행이 위험하니까.”
빈사 상태였던 이시연의 HP와 MP가 가득 차는 데는 2초면 충분했다.
“이게 대체 무슨···?”
“시간 없어! 빨리 합류해요!”
“앗!”
이시연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달려갔다. 나는 음료병을 다시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이시연의 뒤를 따랐다.
‘꺼낼까?’
아니, 참교육을 공개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나로스 대륙에 온 이상 멀지 않아 그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시연의 가세로 전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체력과 마나를 가득 채운 이시연은 대검으로 무기를 바꾸고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전황이 점차 안정세를 찾았다.
나는 활을 들고 낙인, 올가미를 차례로 괴물에게 시전했다.
패시브 스킬 ‘명상’의 마나 재생 속도 20% 증가 덕에, 바닥을 보였던 마나가 절반 정도 차올랐다. 지금부터는 무한 가이드 샷이다.
“인페르노!”
그 사이 플로라는 7 서클 대인 마법 인페르노를 완성했다.
후기지수 무투회에서 나도 당해봤던 그 마법은 지옥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괴물의 몸을 불살랐다.
‘장난 아니네.’
나도 그날 조금만 방심했으면 순식간에 끝날 뻔했다.
데스티니, 하이디, 설화는 공격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좀비 군체가 쓰러졌다.
-쿵!
[··· 3, 2, 1, 0]
[퀘스트 완료. 성물 파괴]
[악신의 힘이 깃든 성물을 성스러운 힘으로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페트라에 안식이 깃듭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퀘스트 동안 좀비를 잡아서 얻은 경험치에, 퀘스트 완료로 얻은 경험치. 내 레벨은 단숨에 열다섯 개나 올랐다.
‘이거지!’
* * *
“고생했어!”
미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유의 빛을 연신 뿜어냈다.
나야 뒤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별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근접 전투 삼인방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쿠궁!
퀘스트가 완료되었는데 또 벽이 무너져서 일행이 잠시 긴장했지만, 그것은 그냥 통로일 뿐이었다.
페트라를 가로질러 산맥을 통과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일행은 좀 이르지만 잠시 로그아웃 하기로 했다.
풀로라가 시전한 마법사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정화된 페트라는 현재 주변 어디보다 안전하니까.
“다들 힘드시죠? 약간 이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해요. 내일 아침 8시에 만납시다.”
동의한다.
너무 지쳤어.
어느 때보다 게임하는 재미는 쏠쏠하지만.
하나둘, 작별 인사와 함께 로그아웃하여 사라졌지만, 나는 낙원으로 넘어갔다.
* * *
“아빠!”
언제 들어도 힐링 되는 이 소리.
“미영이, 잘 있었어?”
“응!”
나는 어느새 이 소리를 듣기 위해 낙원에 오고 있었다.
“늦었군.”
에드윈이 식탁 위에서 근엄하게 뒷짐을 졌다. 손녀의 곰 인형이라더니 오래된 탓인지 솔기가 조금 뜯어져서 솜이 조금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됐다. 단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네.”
“에잉!”
에드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산장 밖으로 나가서 포니투를 소환했다.
“히힝!”
“가서 너희 누나하고 좀 놀아라.”
“포르, 포르루!”
덩치는 더 크지만, 엄연히 포니투가 동생. 말 투레질 소리를 듣고 달려온 포니와 포니투가 놀게 두고 나는 다시 산장으로 들어왔다.
“별일 없었지?”
“응, 아빠.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여기는 왜 이렇게 된 거야?”
“미영이가 말하는 ‘여기’는 뭐고, ‘이렇게’라는 건 무슨 뜻일까?”
“여기, 내가 사는 곳. 왜 아무도 없는 건지 궁금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질문이 무거운 대답으로 돌아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나? 서버 종료돼서 그렇다고?
“어··· 그러니까. 여기도 예전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그런데 왜 지금은 없어?”
“나쁜 병이 생겨서 사람들이 전부 괴물이 되어 버렸어.”
“전부?“
전부는 아니다. 도둑의 산채에 멀쩡한 놈들이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는 멀쩡한 주민도 있을지 모르지.
“전부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지금 시간 날 때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놈들이 있으면 물리치고 다니는 거야.”
정확히는 골드 수금하고 다니지.
“혹시 아프지 않고, 착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꼭 만나게 해줄게.”
“응.”
미영이는 좀 우울해 보였다.
많이 자란 탓인가. 전에는 이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 참. 미영아, 이거 받아라.”
나는 어제 아침에 미영이가 요구한 실과 옷감을 꺼내서 주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가져왔더니 또 식탁을 가득 채울 만큼 많았다.
“우와, 진짜 많다.”
“오늘은 급히 오느라고 가져온 게 이것밖에 없어.”
“아빠, 최고!”
아쉽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다시 휴게실을 통해 나로스 대륙으로 왔다.
거기서 로그아웃을 해야 내일 아침에 의심받지 않고 합류할 수 있으니까.
* * *
석상이 파괴된 후 공기까지 맑아진 듯한 공동. 막 로그아웃하려는 내 귀에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가 끝인가 본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자. 내가 찾은 비밀 통로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지?’
고민은 잠시. 반사적으로 한쪽 벽에 붙어서 반지의 스킬 ‘은신’을 사용했다.
“진짜 운 좋은 놈들이군. 그 방에 비밀 통로가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 정도 몰아 놓았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얼굴을 가린 남자가 중얼거렸다.
“형님, 어떻게 된 건지는 들으셨습니까?”
‘저놈은 BJ대신맨!’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대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웃사이더란 놈이 비밀 통로를 찾았다더군.”
“하아··· 그 새끼. 참 운 좋은 녀석이네.”
“게다가 여기서 퀘스트를 얻어서 경험치와 전리품도 제법 챙겼다고 하고. 아마도 그 퀘스트에서도 꽤 활약한 모양이야.”
나는 남자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남자는 전후 사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누구한테 전해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고.
‘대체 누가?’
“그놈 진짜 이상한 놈이에요. 직접 보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날 절 죽인 놈도 분명 그놈일 겁니다. 그놈 때문에 잡혀서 며칠 동안 접속 금지에, 방송 수익 창출도 막힌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그런 푼돈에는 연연하지 말고.”
나는 고민했다.
여기서 내가 살인자 페널티를 받더라도 저놈들을 때려잡는 게 맞는 것인지.
“하긴. 우리가··· 잠시만요. 그놈들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통로를 통해 십수 명의 남자가 내려왔다. 그중 두 명의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저놈들은 또 왜?’
고정우가 넘겨준 자료에서 본 자들이 분명했다. 부사장이 붙였다던.
여기까지 따라온 건 둘째 치고 어째서 이들이 함께 있는가.
대신맨이 형님이라고 불렀던 남자는 어느새 대신맨의 뒤에 서 있었다. 마치 자기는 대신맨의 수하이기라도 한 것처럼.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실패군. 하긴 우린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그저 감시만 명령받았을 뿐이니까.”
“어이구, 물론이죠. 죽이라고 한 적은 절대 없으십니다. 그래도 죽는다면 기쁘긴 하시겠죠? 설마 감시하라고 시킨 분께서 죽였다고 슬퍼하진 않으실 거 아닙니까.”
“흠··· 늘 느끼지만, 댁은 입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신맨은 과장된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자, 우리는 밖에 나가서 로그아웃합시다. 이놈들은 내일 아침 8시에 만난다고 하니 우리도 그때쯤 보기로 하고.”
쪽수도 워낙 많고, 이상한 얘기를 자꾸 꺼내는 바람에 내가 어떻게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들은 밖으로 사라졌다.
공동에는 결국 나 홀로 남았다.
흠,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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