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다녀오셨습니까.”
“음.”
“안 좋은 일이라도? 표정이 안 좋습니다.”
“티가 나?”
“예.”
나는 도박하면 안 되겠다. AI가 봐도 훤히 읽히는 얼굴이니까.
“굉장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를 노리는 두 그룹이 손을 잡고 한데 모였다. 하나는 TOOL, 나머지 하나는 대신맨.
게다가 더 모를 점은 대신맨이 따르는 윗사람이 정체를 숨기고 그 사이에 들어가 있다는 점.
그 사람은 놀랍게도 이시연의 원정대 중 누군가로부터 직접 우리의 정보를 얻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가 타이한 제국령이라면 별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현재 내가 하드코어 지역에 와 있다는 점.
까딱 실수하면 바로 캐릭터 삭제로 이어지는 이곳은, 함정을 파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시연한테 전화해서 내 정체를 밝히고 이 사실을 알려?’
아무래도 믿지 않을 것 같다. 고락을 같이해온 길드원을 두고 나를 믿을까.
‘아니면 내일 아침 당장 쫓아가서 다 죽여?’
속은 시원하겠지만 공격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짓을 하고 나면 이제 정상적인 게임은 힘들다.
대신맨은 아직도 큰 도시에는 출입 금지라고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참교육을 들고 있지만 혼자서 가능한 일도 아니다. 흩어져서 도망이라도 치면 그걸 어떻게 다 쫓아간단 말인가.
‘별수 없네.’
일단 관망하자.
기회를 노리면서.
* * *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나는 먼저 접속해서 ‘은신’을 걸고 기다렸다. 하지만 팀원이 다 모이도록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은신을 슬그머니 풀고 방금 접속한 척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어제의 난리 통을 함께 겪어서인지 일행의 친밀도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어이, 우리 마법 천재 아웃사이더 오빠! 어제는 제가 크게 배웠어요. 오빠는 그대로 마법사 트리 타면 장난 아니겠던데요?”
“그래봐야 아직 4 서클 마법 몇 개 찍먹한 정도인데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죠. 진퇴양난의 위기에 터진 완전 적절한 그리스! 그리고 뜻밖의 위력 파이어 월 콤보! 나 지렸잖아요.”
다 큰 처자가 만난 지 이틀 된 남자 앞에서 거침없이 지리고 그래.
‘왜 이렇게 친하게 굴지, 수상하게?’
그러나 친하게 구는 건 플로라만이 아니었다.
“나도 두 번째 통로 터졌을 때는 진짜 누구 하나는 죽는 줄 알았어. 앞에서는 끝도 없이 좀비가 밀고 오지, 미트라 언니는 계속 못 움직이지. 아웃사이더 오빠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이디도 나를 부르는 호칭이 은근슬쩍 오빠가 되었다.
“석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동생들 죽는 것만 기다려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웃사이더님 정말 감사합니다.”
“최고.”
심지어 그 말 없던 설화까지 한 마디 던지고 갔다.
‘다 의심스러워!’
“저도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싸님. 그래서 저희끼리 얘기해 봤는데 이번 퀘스트에 건진 아이템 먼저 고르실 권리를 드리고 싶네요.”
“아,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입 찢어지겠어요.”
이시연은 타박을 줬지만, 웃음기는 거두지 않았다.
“농담이고요. 가지고 온 스크롤로 감정은 이미 마쳤으니까 편하게 고르세요.”
검 두 자루, 목걸이, 반지 하나씩, 중갑 상의, 가죽 갑옷, 마법사용 완드 등. 십여 개의 아이템이 있었다.
당연히 무기류는 필요가 없고, 내 목걸이에는 체력 흡수 옵션이 있어서 그보다 더 높은 흡수율이 있기 전에는 바꿀 생각이 없다.
갑옷도 지금 입은 것보다 더 좋기는 하지만 세트 효과를 고려할 때는 그만한 효용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연스레 남은 것은 반지 하나.
나는 그 반지를 집어 든 순간 결정을 내렸다.
“이것으로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왜요?”
“오빠, 그 반지는 얼마 안 비쌀 것 같은데. 다른 것들이 훨씬 좋아 보이지 않아요?”
참다못한 플로라가 끼어들었지만 나는 별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도의 두 번째 반지: 반지]
▶전설적인 고대의 도둑이 말년에 사용했던 반지.
▶제한 레벨 20
▶장착 효과: 힘 +10, 체력 +10
▶특수 효과: 생명력 흡수(적에게 입힌 데미지의 1%) , ‘대도의 반지’와 합쳐서 착용할 수 있음.
“생명력 흡수가 좋기는 하지만 고작 1%밖에 안 되는 데다가, 대도의 반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게 뭐야?”
“저한테는 생명력 흡수가 중요해서. 좀 부족하더라도 최대한 모으는 중입니다.”
나는 플로라에게 대충 둘러댔다.
대도의 반지.
나를 이곳까지 이끈 바로 그 반지다. BJ대신맨이 가지고 있었던.
‘합쳐서 착용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알겠어요. 그렇지만 그대로면 형평성이 좀 안 맞는 것 같으니까, 골드를 좀 더 아싸님께 분배해 드릴게요.”
“그러면 감사하죠.”
더 준다는데 마다할 건 없다. 선택받지 못한 장비는 나중에 경매나 상점 판매를 통해 분배해 주겠다니 기대된다.
“자요.”
합쳐서 착용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으므로 일단 다른 손에 두 번째 반지를 꼈다. 나중에 합쳐 봐야지.
“자, 이제 출발할까요?”
⋮
이후 한 시간 동안 각자의 탈것을 타고 달렸다.
역시 유명 길드의 플레이어들이라 그런지 대부분 탈것이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하이디였는데, 플로라의 탈것이 2인용 양탄자라 함께 탑승했다. 원래는 날아다닐 수도 있는 그 양탄자는, 하드코어 지역이란 특수성 때문에 30센티미터 정도 공중 부양하는 데 그쳤다.
‘날아갈 수 있었으면 진작 도착했겠네.’
양탄자에 태워서 몇 번 왕복하면 그만일 테니까.
미트라는 백마, 설화는 호랑이를 탔다. 그리고 이시연은 드디어 그 유명한 마공학 기계마를 꺼내서 올라탔다.
‘장난 아니게 폼 난다.저 수려한 금빛. 힘이 넘치는 기계 관절!’
반면 내 것은···.
“간지럽습니다요, 주인님! 좀 더 아래, 아니 조금 왼쪽! 바로 거기!”
간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아토피도 아니고.
“아싸님 유니콘은 참··· 활발하네요.”
“아니, 말은 바로 해야죠. 이건 활발한 게 아니라 경망스러운 겁니다.”
“포니투라고 했던가요?”
데스티니의 관심에 포니투의 귀가 쫑긋 섰다.
“아름다운 누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아아··· 이 많은 누님들 앞에서 제 멋진 모습만 보여드렸으면 참 좋았을 텐데. 간지럼증이 점점 심해져서 말입니다요. 주인님, 손 멈추지 마세요.”
“포니투라면 포니도 있니?”
“아, 제 누ㄴ, 으악!”
포니 얘기가 나오면 미영이 얘기도 나와야 하고, 낙원 얘기도 나와야 한다.
나는 급히 손톱을 세워서 포니투의 등을 할퀴어 버렸다.
“이 녀석. 간지러운 게 심해지나 보구나. 저런.”
나는 급히 허리를 숙여 포니투의 귀에 속삭여줬다.
‘입 닥쳐.’
‘헙!’
“제가 고전 자동차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전에 그 이름을 가진 차가 있었는데. 그걸 특별히 좋아해서 말이죠. 낭만의 자동차거든요. 그 차가 어떤 차였느냐 하면···.”
“아··· 그러시구나.”
차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이시연은 조금 듣고 있다가 화제를 바꿨다.
“이동한 지 두 시간 가까이 됐는데 조금 쉬었다 갈까요?”
“아뇨. 한 삼십 분 더 가면 바로 로체산 초입 아닙니까?”
“맞아요.”
“최대한 가까이 간 다음 쉬시죠.”
“그럴까요?”
이시연을 제외한 일행이 일제히 힘든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했다. 두 시간 동안 탈 것으로 사냥감도 회피해 가며 최대한 멀리 온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 뒤를 쫓는 그 많은 인력이 모두 탈 것을 가지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탈 것으로 거리를 벌리면 벌릴수록, 낙오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적어도 숫자는 줄여놓을 수 있겠지.
그런 심정으로 나는 한계까지 달리는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내통하는 사람의 표정도 살필 겸. 하지만 표정은 전부 좋지 않아서 판별은 힘들었다.
* * *
세 시간, 탈 것을 이용한 강행군. 그리고 한 시간의 개인 휴식.
나는 또 살짝 일찍 접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흠. 보이지는 않는군.”
하지만 우리가 어디 있는지는 보고받았겠지. 어딘가 먼 곳에서 감시 중일 지도 모른다.
“일찍 오셨네요.”
“데스티니 님도요.”
“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정보가 없는 곳이라 조금 걱정이 돼서요.”
이시연이 전해준 지도상에 간단하나마 뭐가 쓰여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달랑 이름과 높다고만 쓰여 있는 이 산을 넘어가면 거기서부터 아는 것은 오로지 지명뿐이다.
“높은 산이라더니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네요, 이건.”
산 정상 부근에는 만년설도 쌓여있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산이다. 가본 적은 없지만 에베레스트산이 이런 느낌 아닐까?
“여길 넘어야 한다는 거죠?”
“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지금 여기 온 분들과는 다들 친하십니까?”
나는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죠. 다들 입단 2년 이상 된 길드원이고, 게임 밖에서도 자주 보니까요. 그건 왜요?”
“이렇게 위험한 곳을 따라왔다 싶어서 그럽니다.”
“그건 저도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혹시 저 친구는 안 올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싶은 사람도 없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플로라?”
“왜 그렇습니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굉장히 발랄하고 무거운 거 싫어하는 친구거든요. 이런 진지하고 힘든 원정에 따라와 줄 줄은 몰랐네요.”
플로라.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좀 유심히 봐야겠군.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아, 미트라 님.”
“왔어? 그냥 이것저것 얘기하고 있었어. 별 내용은 없지만.”
“이거 진짜 수상해지는데? 두 사람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미트라의 말에 이시연은 조금 소리를 높였다.
“미트라, 너는 내 일정 뻔히 알면서. 내가 누구 만날 시간이 어딨니?”
“왜, 그 와중에도 우연히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전에 한강 공원에서 만난 남자처럼. 만나려면 개가 오줌을 싸도 만나는 거야.”
이거 아무래도 내 얘기인 것 같은데.
“에휴, 됐다. 그리고, 난 아싸님 얼굴도 모르거든?”
“그러고 보니까 아웃사이더님은 쉴 때도 늘 복면을 하고 계시네요. 얼굴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맞아! 이제 우리도 동료인데!”
“아웃사이더는 얼굴을 공개하라! 공개하라!”
“동의.”
어느새 하나둘 합류한 일행 전원이 강한 압박을 해 왔다. 역시 팀워크가 잘 맞는군.
“안 됩니다.”
“왜! 치사하다! 우리는 다 봐 놓고!”
“손가락을 삐끗하는 바람에 커스터마이징을 망쳤습니다.”
“네?”
“완전.”
“음···.”
“그래서 성형수술할 돈 모으고 있습니다.”
커스터마이징은 해보지도 못하고 게임에 끌려들어 왔는데, 제길.
“수술 성공하면 나중에 캡처 사진 보내드릴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플로라 넌 역시 수상해.
나 지금 살짝 기분 나쁠 뻔했어.
“자, 농담들 그만하고 이제 올라갑시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농담 따위는 생각도 못 할 처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길이 좀 괜찮아서 말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다. 산세가 점점 험해졌기 때문에.
“여기로 가는 게 맞아?”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방향은 맞아.”
동네 뒷산 등산로도 아닌데 제대로 된 길이 있을 리 없다. 이들이 전원 고레벨의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진작 포기하고도 남았을 거다.
올라갈수록 점점 날씨는 추워지고 기상 상황은 나빠졌다.
‘눈?‘
급기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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