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만남
“여기부터는 방한복을 입는 게 좋겠네요.”
그 말에 일행 모두 인벤토리에서 망토를 꺼내서 걸쳤다.
그녀들이 입은 옷은, 방한복이라기엔 얇은 것이 디자인에도 상당히 신경 쓴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드 로고가 등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역시 저것도 단복으로 맞췄구나. 돈도 많지.’
“여분의 것이 있는데 드릴까요?”
“아뇨. 저도 마련해 왔습니다.”
나는 시연의 제안을 거부했다.
내가 준비한 건 상점제라 저들의 것에 비하자면 훨씬 두꺼워서 조금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핑크색 털이 보슬보슬한 망토를 걸칠 수는 없으니까.
‘로고도 분홍색이고.’
“털 장식과 로고에 쓰인 염료가 살라맨더의 불꽃으로 녹은 광물에서 추출한 것이라서 자체 발열 효과가 있거든요. 그래서 얇지만, 보온성이 탁월해요. 디자인 자체도 올겨울 시즌에 대비해서 명품 브랜드와 콜라보해서 나온 거라 잘 빠졌고요.”
홈쇼핑인 줄.
이 여자 투머치 또 도졌네.
나로스 대륙으로 와서는 좀 뜸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는 도저히 못 입겠습니다.”
“큭큭.”
플로라, 너 또 감점.
“어쩔 수 없죠. 그럼, 이거라도 착용하세요.”
“아이젠?”
“네. 눈 위에서 미끄럼 방지와 이동속도 증가 효과가 있으니, 신발에 걸어서 끼우세요.”
과연 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었다. 눈길에서 그 보조 장비 하나만으로 등반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뒤에 쫓아오는 놈들이 이런 걸 준비했을까? 아니라고 보는데.
‘가면 갈수록 거리가 벌어지겠군.’
아이젠을 끼웠다고는 하지만 험한 산길이다.
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는 지금 미니맵상으로 맞는 방향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무작정 가는 거다.
그 미니맵은 내가 있는 주변을 제외하면 온통 까만색. 사실상, 나침반 하나만 믿고 히말라야산맥을 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잠깐 숨 좀 돌리죠.”
스태미나가 급격히 떨어지는 탓에 자주 쉬어야 했다. 게다가 내 방한복은 방수 효과가 없어서 눈이 녹아 젖기 전에 종종 털어주어야 했다.
-팡팡!
눈가루 하나 남지 않게 털고 있는데 뭔가 엉덩이 부근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기에 그냥 방한복을 입었다.
그때 또 한 번 감촉이 있었다.
“뭐냐?”
이번엔 아예 뒤돌아섰다.
그리고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내 뒤에는 까만 눈을 반짝이는 흰 털 뭉치가 서 있었다. 내 허리에도 안 오는 그 꼬마 짐승이 겁도 없이 내 엉덩이를 어루만진 것이다.
“흐억!”
내가 놀라 한발 물러서자, 그 녀석도 한발 물러섰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 듯, 까만 눈을 깜빡이면서 내 모습을 관찰했다.
‘공격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고.’
게다가 공격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시연을 불렀다.
“데스티니 님.”
“네?”
데스티니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일행과 더불어 인벤토리의 물자 점검에 한창이었다.
“혹시 이 녀석이 뭔지 아십니까?”
“뭐 말인가요? 어머!!!”
데스티니가 놀라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놀랐다.
“왜? 위험한 놈입니까?”
“너무 귀여워요!”
이시연만 그런 것이 아니고 평소 진중했던 미트라까지 전원이 다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다가왔다.
여자들이 우루르 몰려오자, 녀석은 어이없게도 내 옷자락을 잡고 뒤에 숨었다.
“아니! 마성의 남자 아웃사이더! 처음 보는 짐승도 길들이네? 이러니까 신 그레이가 홀랑 넘어갔지.”
플로라는 실실 웃으면서 쪼그려 앉았다.
“안녕? 넌 누구니? 길을 잃은 거야?”
“꾸엥!”
내가 듣기에는 그냥 시끄러운 소리인데 여자들 생각은 달랐나 보다.
“저 목소리 들었지?”
“너무 귀엽잖아!”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이 녀석이 나한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다섯명의 여자들에게 포위당했다.
대한민국 최고 인기녀와 만만치 않은 미모를 가진 그녀의 네 친구에 둘러싸인 기분은···.
‘피곤하다!’
차라리 좀비한테 둘러싸이는 게 편하겠어. 그냥 냅다 까버리면 되니까.
털 뭉치가 자꾸 내 뒤에서 이리 피했다 저리 피했다 하는 바람에 여자들이 내 꽁무니만 졸졸 쫓았다.
“에이!”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제대로 보게 하는 게 낫지. 나는 털 뭉치를 안아 내 무릎에 올리고 바위 위에 앉았다.
“꺄아!”
털 뭉치가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게 또 킬링 포인트였나보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미트라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웃사이더 님, 이 옷 어디서 샀어요?”
“이거요? 북부 전선 근처 마을에서 샀습니다. 예티 가죽이라던데요?”
빙룡 벨디브가 지배하는 북부. 그곳은 추운 만큼 털가죽 옷이 특산품이다.
“이 털, 얘하고 굉장히 비슷하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내 품에 안긴 털 뭉치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흡사하다.
“그러면 얘는 예티 새끼?”
‘그랬나.’
어쩐지 나를 잘 따르더라니, 혹시 같은 예티로 착각한 건가?
“엄마는?”
조용히 귀여워하던 설화가 한 마디 내뱉었을 때.
“끄어엉!”
귀를 찢을 듯한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털 뭉치를 안고 벌떡 일어났다. 뒤에는 나보다 머리 한개 이상 큰 거대한 예티가 서 있었다.
‘엄마구나!’
지금 내려놓으면 엄마와 같이 조용히 사라져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꾸어어어어억!!!!”
그것은 한두 마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망했다.’
“마법사의 눈.”
플로라가 나지막이 내뱉은 스펠. 미니맵에는 온통 적을 뜻하는 붉은색뿐이었다.
‘완전히 포위됐네.’
방심했다.
나로스 대륙에 이렇게 무해한 생물이 있을 리 없는데.
“언니, 어쩌지?”
“······.”
좀비 웨이브 때는 오는 길이 제한되어 있어서 소수로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완전히 오픈된 장소다. 이시연으로서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
우리는 털 뭉치를 안고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예티는 두 걸음 다가와서,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속속 나타나는 성체 예티로 주변이 가득 찼다.
‘저건?’
미니맵 상에 언뜻 비치는 것이 있었다.
“데스티니 님. 미니맵 좌상단에 보이는 거 있으시죠.”
“저건 아무래도 동굴 같은데요?”
“저기로 가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포위돼서 갈 수 있는 곳이 그쪽밖에 없는데.”
“동굴 안에서 싸우자는 말씀인가요?”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싸우더라도 사방이 적인 것보다는 대적하기 쉬울 겁니다.”
“그 말씀은··· 싸움을 피할 길이 있단 말인가요?”
“그건 해보기 전엔 모르겠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이 털 뭉치. 저들에게는 꽤나 소중해 보입니다.”
녀석은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팔에 안겨 한가롭게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제가 이 녀석을 데리고 나가서 시선을 끌 테니 여러분은 그사이 저 동굴로 들어가세요. 거기서 농성을 준비하는 겁니다.”
“네?!”
“오빠, 미쳤어요?”
“그러다가 죽어요. 계정 삭제라고요!”
일행의 목소리가 커지자, 예티가 소란스러워졌다. 수백이나 되는 예티가 시끄럽게 굴자, 설원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그보다 나은 방법 있으면 빨리 말해주세요.”
“······.”
“제게 은밀이라는 스킬이 있어요.”
설화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스킬로 수백의 적이 둘러싼 한 가운데서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설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뇨.”
“그렇다면 100퍼센트 확률로 전부를 죽게 할 뿐입니다. 반면에 저는 50퍼센트 확률로 우리 모두를 살게 하거나, 나머지 50퍼센트로 저만 죽는 선에서 일을 마칠 자신이 있습니다.”
죽긴 왜 죽어.
급하면 절대 방어도 있고 참교육도 있는데. 수틀리면 경험치 파티 한 번 하는 거지.
“······.”
데스티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결정을. 시간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결정은 빨랐다.
지체할 시간도 없고.
“대신 아싸님께서 여기서 죽어 캐릭터 삭제가 된다면,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 안에 다시 같은 레벨로 키워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원칙을 깨고 저희 길드에 유일한 남성 플레이어로도 받아 드릴 겁니다.”
“영광이지만 기뻐하기는 이르군요.”
나는 털 뭉치를 단단히 안았다.
“제가 나가서 시선을 끌죠. 기회가 되면 주저 말고 동굴로 가세요. 성공하면 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오빠···. 조심해요. 꼭.“
플로라가 울 줄은 몰랐네, 너에게 주었던 벌점 탕감하는 것을 고려하마.
“자, 그럼 행운을.”
이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털 뭉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녀석은 재미있었는지 발을 버둥거리며 내 머리를 통통 쳤다.
“뭉치야.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건데, 너 눈치 되게 없는 편이구나.”
“꾸엥!”
“가거든 엄마한테 잘 말해. 아저씨 진짜 나쁜 사람 아니라고.”
나는 사람과 예티 양쪽이 보는 가운데, 뭉치를 어깨에 태우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 봐! 하얀 털이 멋진 친구들!”
“뀨에엥!”
예티는 모두 숨을 죽이고 내게 집중했다.
나는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쉬고 소리쳤다.
“나 잡아봐~ 라!“
곧바로 성난 예티의 대추격전이 벌어졌다.
포위망을 좁힌 예티는 내가 향하는 어디에나 있었다. 물샐틈없는 포위망이지만, 틈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도약!”
대도의 반지 스킬을 이용해서 포위망 한편을 뛰어넘었다.
“꾸에에에에에!”
뭉치는 뜻밖에도 재미있었는지 공중에서 두 팔과 다리를 들어 올렸다. 때문에 내가 꽉 잡아줘야 할 지경이었다.
‘이 자식. 바이킹 좀 타봤나.’
분노한 예티가 나를 미친 듯 쫓았다.
쿵쾅쿵쾅.
발소리에 눈사태라도 일어나면 어쩔지 걱정될 정도였다.
“뭉치야, 너 뭐 되냐? 왜 이렇게 다들 나서서 난리야!”
“뀨엥!”
뭉치 부모가 쫓아온다면 납득하겠다. 하지만, 이 많은 예티가 전부 부모일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다 자기 일처럼 이러는지.
추격전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이시연 일행이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내 다음 목적은 어그로를 끈 채 최대한 멀리 이동해서 일행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 한 발 더 움직일수록 일행은 더 안전해진다.
“끙! 아유 무거워!”
새끼인데도 뭉치는 제법 무게가 나갔다. 스태미나가 줄어드는 게 상태창을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
‘이 정도면 됐을까?“
처음 있던 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데스티니 일행도 완전히 예티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뭉치야. 너 앞으로는 아무나 따라가고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신나서 뀨엥거리는 뭉치의 머리털을 한번 헝클어주고 바닥에 내려두었다.
‘병풍!’
지능 수치에 비례하여 적용되는 스킬인 병풍.
만약 예티라는 종족의 지능이 내 생각처럼 낮다면 나를 찾지 못하게 된다.
아니라면? 안타깝지만 ‘참교육’을 꺼내 들고 한바탕 춤을 출밖에. 뭉치한테는 살짝 정이 들려고 했지만.
“꾸에···?”
뭉치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과 동시에, 쫓아오던 예티도 목표를 잃고 멈춰 섰다.
두리번두리번.
‘됐다!’
이 정도면 완벽하게 성공한 도박이다.
엄마로 보이는 예티가 뭉치를 끌어안는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빠져나왔다.
충분한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어그로를 끄는 일이 없도록 병풍을 유지하며 동굴 입구까지 이동했다.
‘이제 됐겠지?’
확인차 뒤를 돌아봤다가 조금 놀랐다.
뭉치가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이 왜 아무한테나 매달리고 그랬어.’
예티들이 뭉치를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동굴 안에 들어가서 병풍을 해제했다.
“휴···.”
다행히 스킬이 기가 막히게 먹혀서 누구도 죽는 일 없이 끝났다.
“데스티니 님. 미트라 님?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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