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만남
“여기요.”
아주 작은 목소리. 설화였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저기.”
설화가 가리킨 곳에는 통로가 있었다.
“저리 내려갔단 말입니까?”
설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도 은신에 능하기 때문에 남겨둬서 날 데려오게 한 모양인데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니었다.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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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님!”
통로에 서 있던 데스티니가 반색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생각보다 스킬이 잘 먹혀서 완벽하게 해결됐습니다.”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자 플로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그런 스킬이 있으면 진작 설명해 주지. 내 감동 돌려내요. 쪽팔리게 눈물 콧물 찔찔 했잖아요.”
“먹힐지 안 먹힐지 몰랐으니까요.”
“어쨌건 정말 감사하고, 또 다행입니다. 아싸 님은 진짜 신기한 스킬을 많이 갖고 계시네요.”
시바 교수님 감사합니다. 제자는 오늘 또 교수님의 갈굼 덕에 위기를 넘깁니다.
“그런데 여긴 대체 뭔가요?“
얼핏 보기에 그 구멍은 끝도 없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혹시 동굴에 숨을만한 곳 없나 찾다가 발견했어요. 잠깐 내려가서 확인해 봤는데 바람이 계속 부는 게 아무래도 통로 같아요. 어디로 연결된 건지는 모르지만.”
기껏 예티를 피했는데 당장은 도로 나갈 수도 없다. 분명 위기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한껏 고양됨을 느낀다.
‘재미있다.’
진짜 모험.
지난 몇 년간 거의 모든 것이 밝혀진 건너편 대륙에서는 찾기 어려운.
낙원 온라인을 처음 접할 때와 같은 도파민이 샘솟는다.
“뭐가 나오는지 한번 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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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는 대각선 아래로 완만한 시계방향 곡선을 그리면서 끝없이 뻗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급경사였던 초반부와 달리 뒤로 가면서는 통로도 넓어지고 경사도 완만해져서 탈 것 이용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히힝, 이 봐. 과묵한 친구. 금빛 갈기가 아주 멋진데 그거 원래 그런 거야, 아니면 염색한 거야? 언제 건초라도 같이 하면서 자세히 정보 공유 좀 해줘.”
포니투의 뿔에서 나는 빛은 더 밝아졌다. 그래서 플로라나 나는 마나를 아끼기 위해서 포니투를 선두에 세웠는데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웠다.
“저기, 포니투. 얘는 말을 못 하거든?”
보다 못한 이시연이 끼어들었다.
“그렇습니까요? 저도 특정 지역에 가면 말을 못 하긴 하는데. 이 친구도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 원래 못해.”
“네에에?!”
포니투는 투레질을 할 정도로 놀랐다.
“아, 전 그런 장애가 있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이시연이 포니투 주인이었으면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었을것 같다. 투머치 인포메이션과 투 머치 헛소리.
“오빠도 힘들겠어요.”
옆에 있던 하이디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재갈을 좀 큰 거로 바꾸든가 해야지, 원.”
“주인님, 그 전에 선글래스나 하나 사주세요. 뿔에서 빛이 나니까 너무 눈부십니다요. 저는 아직 성장기라서 이러다가 고도 근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
이젠 하다 하다 말까지 나한테 아이템을 요구하네. 헛소리는 여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하다.
“데스티니 님. 좀 전의 예티 말입니다.”
“네. 예티는 왜요?”
“좀비가 아니었습니다.”
“어?!!”
내 말에 놀란 데스티니의 움직임이 일순 탁 멈췄다.
“워낙 급작스러워서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플로라의 양탄자가 쓱 다가왔다.
“그렇다는 얘기는 나로스 대륙의 모든 생물이 좀비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렇죠.”
“뭐야, 이거. 난 그냥 불꽃 레벨업한대서 따라왔을 뿐인데 갑자기 얘기가 커졌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여기처럼 좀비가 되지 않은 생물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좀비를 모두 퇴치하면 여기도 타이한 제국이 있는 에우로파 대륙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스톱.”
데스티니의 말에 내 생각도 멈췄다. 그녀는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빛이 보여요.”
“어, 정말이네?”
“출구?”
“모르겠어. 뭔지 모르니 탈것 집어넣고 조용히 가보자.”
포니투 시끄러우니 집어넣고 가자는 소리를 고상하게 하는 데스티니다.
포니투를 해제하고 벽에 붙어서 도보로 이동했다. 한참 그 상태로 가보니 문제의 그 광원이 나타났다.
“자연적인 빛도, 마법적인 빛도 아니었군요.”
“전구네.”
복도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는 그것은 어떻게 봐도 전구였다.
“이건 글씨 같지 않아요?“
“그렇군요.”
첫 번째 전구 근처에는 글자 같은 것이 있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도 그것이 문자라는 데는 다들 동의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군요. 다들 긴장 놓지 마세요.”
계속 긴장해야 할 이유는 멀지 않아서 나타났다.
통로가 확 넓어지면서 길 한가운데를 막은 거대 금속 덩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크기는 좀비 군체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3미터는 족히 되었다.
“생긴 게 왠지 사람 같지 않아요?”
“저게요?”
내가 보기에는 굴삭기 같았다. 잔뜩 웅크린 굴삭기.
“그렇게 듣고 보니까 사람 같기도 하고요.”
물론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눈도 코도 아무것도 없지만, 접힌 듯 보이는 부분이 모두 펼쳐진다면 팔이나 다리와 비슷한 모양이 될 것도 같았다.
-휘잉!
날카로운 소리가 갑자기 조용한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포니투 집어넣으셨죠?”
“네.”
“그럼 이건 무슨 소리죠?”
-끼리릭!
소리는 앞을 가로막은 금속 뭉치에서 들렸다. 뭔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금속 뭉치의 접힌 부위가 하나씩 펴졌다.
“메탈 골렘인가. 산 넘어서 또 산이네.”
아무래도 그 설마가 설마였던 것 같다. 일어난 금속 뭉치는 한층 거대한 2족 보행의 구조물이 되었다.
“전투 준비.”
이시연의 말과 함께 하이디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팔다리를 전부 편 녀석은 등에서 망치를 하나 꺼내서 한 손에 들고 섰다. 5미터짜리 금속 괴물의 위압감은 상당했다.
“플로라, 배리어 부탁해.”
“응.”
투명한 막이 일행 전체를 감쌌다.
“그렇게 대단한 보호막은 아냐. 나는 공격이 전문이지 방어는 좀 딸려서.”
“충분해.”
이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공에 나서겠습니다. 제가 신호하면 하이디가 먼저 정면으로 가서 어그로를 끌고, 저는 왼쪽, 설화는 오른쪽을 담당하죠. 플로라와 아싸님은 여기서 원거리 공격을 맡아 주세요. 미트라는 늘 하던 것처럼 서포트 부탁해.”
“네.”
“셋에 움직입니다. 하나, 둘···.!”
-기이잉!
골렘인 줄로만 알았던 놈의 가슴 부위가 살짝 열렸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거 누구요?”
“!”
털이 부숭부숭한 얼굴. 고집스러운 표정. 순간 낙원 온라인 시절 자주 보던 종족이 생각났다.
“드워프?”
낙원 온라인에서 드워프는 보기 힘든 종족은 아니었다. 베타 서비스로, 종족 선택이 인간으로 한정되어 비록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NPC로는 흔하게 마주쳤다.
특히나 대장과 기계 공학에서는 그들을 빼면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베타 서비스가 끝나면 엘프와 함께 선택 가능한 종족이 될 것이라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전면 재수정을 거치면서 인간 외 타종족은 제외되었지만.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몬스터 취급받는 변종 드워프 말고 진짜 드워프가 있었어요?”
“없는 건 알지만···.”
-기이잉!
“드워프가 없긴 왜 없어!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본인이 드워프라잖아요.”
얼굴까지만 내놓았던 금속판이 전부 내려가고 드워프의 전신이 드러났다.
‘SF도 아니고 갑자기 메카닉 탑승물이냐?’
나도 저런 탑승형 골렘은 난생처음 봤다. 본인이 드워프라 주장하던 남자는 콕피트 밖으로 나와 골렘의 어깨 위에 섰다.
“진짠가?”
보이는 모든 것이 굵고 짤막하다. 게다가 저 얼굴 절반을 가리는 수염. 저게 드워프가 아니면 뭔가.
“자네들은 누구야? 지난 이십 년간 사람을 봤다는 보고는 없었는데.”
“이십 년?”
데스티니는 드워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이십 년. 오로지 좀비뿐이었지. 혹시 돌아온 건가?”
“돌아오다니 무슨 뜻입니까?”
“자네들이 ‘용사’인가 묻고 있는 거다.”
용사.
그 오래된 호칭.
그것은 낙원 온라인에서 NPC가 플레이어를 일컫는 단어다.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NPC는 플레이어를 ‘모험가’라고 부른다.
“지금 저 아저씨가 뭐라고 하는 걸까요?”
플로라의 의문도 당연하다. 여기 있는 DNC 길드원은 전원 20대 초반에서 중반. 내가 알기로 낙원 온라인을 플레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8년이나 지난 낙원 온라인 따위 까마득한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니다벨리르의 불꽃이여 영원하라. 반갑습니다.”
“뮈르크의 망치 아래. 맙소사, 실로 수십 년 만에 듣는 정통 드워프식 인사말이로군.”
인사를 들은 드워프는 골렘의 장갑을 미끄럼틀 삼아 솜씨 좋게 뛰어내렸다.
“반갑네. 내 이름은 그룸 아이언코트. 자네는 누군가?”
“저는 아웃사이더, ‘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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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오빠, 지금 그게 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예요?”
플로라는 내 뒤를 졸졸 따르며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어, 그런 게 있어요. 조금 있다 다 얘기해 줄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나는 플로라를 뒤로 하고 그룸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그룸. 아시죠? 우리는 명상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거?”
“암, 알지. 그 어이없는 전통도 오랜만에 들으니 정겹구먼.”
“지금 그 시간이 다 됐는데, 여기서 잠깐 명상에 들어가도 될까요?”
“좋도록 하게.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 한 시간을 더 못 기다리겠나.”
첫 대화 이후, 그룸은 크게 반가워하며 우리를 복도 한쪽으로 데려갔다.
벽의 어딘가를 조작하자 구멍이 뚫리며 방이 나타났고, 다 같이 그 안에 들어와 원탁에 앉은 것이다. 그룸은 이제 얼마 안 남아서 귀한 것이라며 맥주 한 잔씩을 대접했다.
넓은 방이었지만 드워프 식인만큼 천장이 낮아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 그룸은 한 시간 있다가 오겠다며 방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기다려야 하겠네요.”
이시연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라 내 얼굴만 쳐다봤다.
드워프와 인간 양쪽의 관심 속에서 강제 로그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 * *
“휴···.”
“다녀오셨습니까.”
“어, 별일 없었지?”
“그렇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로그아웃.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이게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자, 정리해 보자.
아침에 로체산에 도착, 등반을 시작했고, 우연히 예티 아기를 만났다가 분노한 예티들에게 쫓겨 어느 동굴로 피해 들어갔다.
동굴로 들어갔더니 통로가 있었고, 그곳을 따라 내려오다가 인공적인 시설을 발견.
곧이어 로스트 파라다이스에서 처음 보는 종족인 드워프가 골렘을 타고 나타났다.
“허, 참.”
이게 고작 6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낙원에 있던 종족을 그냥 복붙한 건가?’
그렇다면 혹시 낙원에서 유명한 드워프 NPC가 여기도 와 있을지도 모르고, 드워프제 유명한 무기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 게 뭐가 있었지?’
나는 낙원의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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