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만남
나로스 대륙에서 현재 우리가 있는 곳만큼 안전한 곳도 드물 것이다. 로체산 내부의 드워프 은거지의 밀실이니까.
오랜만에 추격자 걱정, 몬스터 걱정할 필요 없는 곳. 덕분에 나는 약속 시간을 딱 맞춰서 로그인할 수 있었다.
“워우, 깜짝이야.”
앞뒤로 조금씩 빠르거나 늦는 경우가 있는 평소와 달리, 이번엔 전원이 미리 모여서 내가 나타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웃사이더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들어오자마자 처음 본 것은 플로라의 도끼눈. 설화의 매의 눈, 하이디의 목마른 사슴의 눈, 미트라의 은근한 재촉의 눈 등, 다섯 명 여자의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우리가 아니라 오빠가 설명해 줘야죠.”
그래서 다들 이렇게 나를 눈 빠지게 기다린 거로군.
데스티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로그아웃한 동안 좀 알아봤는데, ‘용사’라는 건 로스트 파라다이스 이전, 베타 서비스 낙원 온라인에서 쓰이던 말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딱히 숨길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사실 위주로 조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들 같이 겪은 일이니까.
“직접 알아내셨다시피 ‘용사’는 로파의 ‘모험가’와 같은 뜻의 말입니다. 그룸이라는 드워프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듣고 저는 낙원 온라인을 떠올린 거고요.”
“그, 니다벨 어쩌고 하는 인사는 대체 뭐였어요?”
“낙원 온라인의 드워프식 인사입니다. ‘니다벨리르의 불꽃이여 영원하라’라고 말하면, ‘뮈르크의 망치 아래’라고 답하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저도 그룸이 낙원 온라인에 있던 드워프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말씀은···.”
“네, 저는 8년 전에 낙원 온라인 베타 테스터였습니다.”
“우와··· 완전 고인물, 조상님.”
“고였다는 말은 좀 억울하네요. 저는 낙원 온라인 이후 몇 년 동안 어떤 게임도 한 적이 없으니까요. 로스트 파라다이스 시작한 지는 정말 얼마 안 됐고요.”
일행 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도 감회가 깊어졌다.
8년간 잊고 살았던 낙원 온라인의 뒷문을 오자마자 만났고, 이제는 옆에 난 쪽문을 만난 기분이 들어서.
“드디어 왔군!”
그룸 아이언코트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거침없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물어볼 것이 많지만, 이것부터 물어봐야겠군. 좀비는 어떻게 됐나?”
“이 대륙 말씀이라면, 여전히 좀비 천지입니다.”
“그런가, 아직···. 그럼, 자네들은 어디서 온 거지?”
“저희는 좀비가 없는 다른 대륙에서 왔습니다.”
“뭣이? 어떻게?”
“배를 타고 왔습니다.”
“물길이 열렸단 말인가!”
그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봐야 의자에 앉은 나보다 조금 작지만.
“물길이 닫힌 적이 있단 말인가요?”
데스티니의 질문에 그룸은 DNC 멤버를 둘러보았다.
“그렇군. 자네들은 어려서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해.”
그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았다.
“용사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좀비가 창궐했네. 처음에는 인간 일부에 불과했지만, 점차 사태가 커졌지. 인간 전부가 좀비가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짐승과 우리 드워프, 심지어 그 귀쟁이 녀석들까지 좀비가 되기 시작했어. 전부가 좀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단 말일세.”
엘프라.
“어쩔 수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바다를 통해 탈출을 시도해 봤지만, 나침반도 지도도 갑자기 통하지 않았네. 어렵사리 띄운 배는 전부 가라앉았지. 그래서 우리는 숨기로 결정했네. 바로 이 산 한가운데.”
“목이라도 좀 축이면서 말씀하시죠.”
나는 들고 있던 로파제 맥주를 슬쩍 잔에 따라 주었다. 김 비서 주고 남아있던 건데.
“오, 이건 처음 보는 맥주 아닌가!”
그룸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수염을 닦았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물론 우리 드워프 것만은 못하지만 말이야.”
철저한 준비성의 남자.
그것이 바로 나다.
“그런데 왜 여기 혼자 계십니까?”
“혼자가 아니야. 나머지는 다들 자고 있지.”
“취침 시간이라고요?”
“그게 아니고, 남은 종족 전체를 일부러 재웠네. 언제 이 사태가 해결될지 모르니 해결되면 다 같이 다시 나오려는 생각이었지. 체온을 낮추는 장치를 만들어서 전원 일시에 잠들었어.”
“그런데 그룸은 왜 깨어 있습니까?”
“누군가 위험에 대비해야 하니까. 일족의 전사 중 메탈 골렘을 사용할 수 있는 자 몇몇이 돌아가면서 깨어나서 2~3년씩 할 수 있는 만큼 감시 중이었네.”
“아하.”
“최근에는 장비가 불안정해져서 큰 고민거리였는데 자네들을 만난 것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군.”
“짧은 시간에 잘도 이만한 공간을 만들었군요.”
“원래 여기 우리 광산이 있었거든.”
그룸은 빈 잔을 탁 내려놓았다. 나는 회식으로 단련된 스킬을 이용해서 얼른 그 잔을 채웠다.
“이 방 옆에 우리 일족 전체가 잠든 거대 시설이 있네. 나는 이제 그들을 깨워서 자네들이 왔다는 그 대륙으로 이주할 생각이야. 물론 자네들이 어떻게 왔는지 알려준다는 가정하에 하는 말일세.”
“배는 있습니까?”
“갖고 있던 것은 모두 부서졌네. 다시 만들어야지.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누군가. 만드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난 종족 아니겠나.”
나는 바로 이 지점이 가장 큰 포인트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저희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자네들이 가진 배가 그렇게 큰가? 한두 척으로는 안 될 것인데?”
안 되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순간이니까.
“도움을 청해서 배를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데스티니 님, 어떻습니까? 곤지암 운송에 편지를 넣어서 오게 한다면?”
“그렇군요. 저희 길드의 이름과 페덱스 회장과 친분이 있는 아싸님의 편지까지 함께라면···.”
뭐, 실제 친분은 별거 없지만. 대장, 기계 공학의 달인이 즐비한 드워프다. 세계 운송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페덱스라면 그 가치를 알아보지 않을까?
이건 내가 부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페덱스가 엎드려 절할 일이 될지도 모른다.
데스티니 일행은 타이한 제국에 있는 길드원에게 편지를 부탁하기 위해 잠시 로그아웃했고, 나는 김 비서에게 직접 편지를 보낼 것을 부탁했다.
둘만 남은 동안 그룸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용사가 아니지?”
“어··· 굳이 따지자면 옛날 용사는 저뿐입니다. 나머지는 요즘 용사죠. 모험가라고 부릅니다.”
“그런 것 같았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난 이제 곧 우리 종족을 깨우기 위해 들어갈 거야. 말했다시피 이틀은 걸릴걸세. 그전에 자네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네.”
“뭘 말입니까?”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이왕 줄 거면 그 골렘을 주면 좋겠다. 거대 메카닉으로 낙원을 밀어버리면 얼마나 간단할까.
“자, 여기 받게.”
그룸이 내 손에 올려놓은 것은 종이 한 장이었다.
“이게, 뭐···.”
“읽어보게.”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지역 드워프령의 땅문서라든지, 아니면 보물 지도라도 된다면.
“임명장?”
“끝까지 읽어 보게.”
“멸족의 위기에 처한 드워프를 위기에서 구한 공로로 용사 ‘아웃사이더’를 드워프의 구원자로 임명한다.”
“고맙네.”
“뭐 이런 좆···.”
-띵!
[위업 달성! 멸종위기종 지정]
[당신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드워프를 성공적으로 찾아냈습니다. 칭호 ‘드워프의 구원자(모든 드워프의 호감도 100, 드워프제 장비 착용 시 효과 50% 증가, 드워프와 플레이어 사이에 생식 가능, 드워프와 관련된 퀘스트 보상 50% 증가, 드워프 전용 아이템 사용 가능, 매월 1일 모든 드워프족 NPC의 수입 중 0.1% 수령]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미쳤구나.’
드워프의 호감이나, 퀘스트는 아직 없으니까 그렇다 치고. 드워프제 장비 사용은 이들이 무사히 탈출하여 정착만 한다면 머지않아 생길 일이다.
최고 수준의 장비만을 만드는 그들의 수준으로 미루어볼 때, 거기서 착용 효과를 50%나 높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효과.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수입 0.1% 삥뜯기!’
아주 단순하게 생각할 때, 1,000명의 드워프가 있으면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월수입을 아예 내게 갖다 바친다는 뜻이다. 드워프의 번성이 곧 내 배를 불리는 것이 된다.
‘중간에 무슨 생식이 어쩌고 엄한 소리가 있지만.’
덧붙여서 레벨도 무려 8개나 올랐다.
“뭐라고 그랬나? 잘 못 들었는데?”
“뭐 이런 좋···은 걸 다 주시느냐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아무에게나 주는 임명장이 아닐세.”
“하하하, 정말 통이 크십니다. 제가 드릴 건 없고 이거나 좀 맛보시죠.”
인벤토리에 있던 와인 몇 병을 전부 꺼내서 테이블에 올렸다.
“정말 고맙네. 내 일족을 깨워야 하니 지금은 못 마시겠고 이주에 성공하면 함께 나눠 마시기로 함세.”
“물론입니다!”
그때 데스티니 일행이 로그인했다.
“확답을 듣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어떻게 됐습니까?”
“이틀 후 저희가 내렸던 곳에 대형 여객선 열 척을 보내주기로 했어요.”
“그거 잘 됐군요.”
“처음에는 좀 긴가민가 고민하던데 아싸님 편지 도착하니까 태도가 확 달라지던걸요?”
“고맙네!”
그룸은 데스티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는 품에서 또 종이 몇 장을 꺼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었다.
“이게 뭔가요? 드워프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 임명한다?”
나와는 좀 다른 이름의 임명장이었다. 최우수와 우수상인가? 임명장에도 등급이 있었구나.
“드워프제 장비 착용 시 효과 10% 증가, 드워프와 관련된 퀘스트 보상 20% 증가, 대박! 드워프와 플레이어 사이에 생식 가능? 으엑 이건 좀···.”
“레벨이 올랐어!!”
데스티니는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내 답례로 드워프제 장비를 좀 풀기로 하지. 따라오게.”
우리가 있던 방 벽에서 무언가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자동으로 불이 켜졌을 때 보인 것은 드워프 장비가 끝없이 놓인 창고였다.
“와우.”
“어마어마하네요.”
“우리 종족이 깨어나면 착용할 장비들일세. 숫자가 빡빡해서 많이는 줄 수 없고 세트로 하나씩만 고르게.”
이것은 파티였다.
각기 레벨에 맞는 장비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얻는 장비인데 싼 걸 고를 수는 없지.
당장은 입을 수 없지만 머잖아 사용할 수 있을 150레벨 제한 갑옷과 검을 골랐다.
‘당장 입고 싶다!’
레벨에 맞는 장비를 골라 즉시 착용한 데스티니와 그 일행의 표정이 희희낙락한 것을 보니 부럽기 그지없었다.
“갑옷 진짜 좋다! 원래 입었던 것보다 방어력이 30%는 올랐어!”
“이 검 좀 봐. 샤프니스 마법이 영구적으로 걸려있어!”
눈물을 머금고 인벤토리에 고이 모셨다.
‘언제 150되나.’
일행이 장비를 다 고르자 그룸은 데스티니로부터 지도를 공유받고 각각의 포인트를 빠져나갈 때 주의할 사항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제 나는 문을 닫고 우리 종족을 깨우는 일에 전념할 걸세. 만 하루는 꼬박 걸릴 거야. 그들을 모두 챙겨서 약속 지점까지 가려면 이틀이 빠듯해.”
그룸은 거기까지 말하고 조금 망설였다.
“자네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사가트라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구먼. 거기라면 가능하겠어.”
“뭐가 말입니까?”
“이 통로를 따라 쭉 내려가면 머지않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나면 거대한 숲이 나올 거야. 그곳에 가면 귀쟁이 녀석들이 있네. 나로서는 별로 상종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망갈 기회가 있는데 얘기조차 하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아는 분도 있고···. 용사인 자네가 한번 설득해 보게.”
[퀘스트 발생! 멸종위기종 지정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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