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의 끝
시간이 지나자 움직이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지구름과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그것은 좀비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두 엘프의 속도는 바람과도 같았다.
아리엘은 그 모습을 짤막하게 표현했다.
“평소보다 많군.”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니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 1초라도 더 방어력 두 배 시간을 늘려야 하니까.
“시작하겠다. 벤드리스를 부탁한다.”
먼지구름이 숲에 도달할 만큼 가까워졌을 때 아리엘은 마치 친구와 전화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노움. 저들의 발밑에 구덩이를 파 주겠니?”
갑작스러운 씽크홀.
그야말로 거대한 구덩이가 불쑥 생겨났다.
어설픈 좀비는 그곳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리엘이 손짓하자 불로 이루어진 도마뱀 수십 마리가 동시에 구덩이 안에 나타나 춤을 췄다.
서로 뒤엉켜 꿈틀대던 좀비는 속절없이 살라맨더의 불꽃에 희생되었다.
실로 대규모의 정령술이다.
‘표정이···.’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한 것은 좀비라는 참상을 목도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벌써 입을 열면 어쩌느냐. 고작 2, 3분밖에 안 지났을 터인데.”
“충분합니다.”
“등급도 낮은 녀석이 큰소리는.”
씽크홀을 피해 살아남은 좀비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각기 벤드리스와 클로드가 선두에 자리 잡았다.
“조심하거라.”
“아리엘 님도요.”
나는 나로스 대륙에 와서 처음으로 ‘참교육’을 꺼냈다.
어느덧 100레벨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한 만큼, 백 마리가 넘는 좀비를 앞에 두고도 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헤이스트, 스트렝스, 화염 부여. 할 수 있는 보조 마법을 모두 때려 박은 뒤, 빈혈이까지 불러냈다.
“그워어! 적인가?!”
“그래. 맘대로 날뛰어 봐라.”
“그워어어어!”
빈혈이의 전투 함성으로 자신감이 고양되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집중’ 스킬을 걸고 달려 나갔다.
“벤드리스!!!!”
-깡!
‘분쇄’ 스킬까지 넣은 회심의 일격. 참교육에 맞은 그는 뒤로 날아갔다.
‘막았다!’
분명 제대로 몸통에 들어간 공격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검면으로 막았다. 검날에는 오러까지 둘려 있었다.
“좀비가 오러라니 이건 사기잖아!”
분통을 터뜨리면서 나는 쉴 새 없이 참교육을 휘둘렀다. 다행히 일반 좀비는 벤드리스와는 달리 한방이면 충분했다.
-깡! 깡! 깡!
늘어난 공격력에, 늘어난 HP 흡수. 체력과 마나가 공격할수록 넘쳐났다.
“그워어! 주인 강하다! 나도 강해졌다!”
미안, 걔들은 그 정도로 안 돼.
“그런데 적이 더 세다! 그워어어!”
빈혈이는 방어에 급급했다. 이 좀비의 추정 레벨은 180. 게다가 정예다.
고작 레벨 80 정도인 빈혈이가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을 만큼 강하다.
“주인! 미안하다! 나 먼저 간다! 그워어억!”
그 정도면 충분하다. 빈혈이는 그저 적을 분산시키고 전투함성을 쓰는 용도에 불과하니까.
“괜찮아! 수고했다! 푹 쉬어.”
-깡깡깡!
좀비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무슨 생각인지 벤드리스는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주면을 맴돌았다.
참교육을 들고 혼자 춤을 추길 몇분, 드디어 일반 좀비가 다 사라졌다.
‘아리엘은?’
그쪽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 많던 좀비는 전부 쓰러졌고 아리엘과 끌로드 둘만 남았다.
아리엘을 보는 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개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자동으로 아리엘과 파티가 맺어졌다. 하지만 아리엘은 NPC. 그 말은 이 모든 경험치가 전부 내 것이라는 뜻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투 중에도 레벨업 로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왔다. 벤드리스와 클로드 둘만 남았을 때 내 레벨은,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보다 11개나 올라 있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리엘은 벤드리스를 막는 것에만 집중해달라고 했지만, 뜻밖에 아리엘은 끌로드를 제압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벤드리스를 물리치고 아리엘을 돕는 편이 맞겠다.
벤드리스는 자신을 따라왔던 좀비가 모두 쓰러지자, 내 쪽으로 달려왔다. 좀비라도 소드 마스터. 일대일이 아니라면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가?
웅! 웅!
그의 검을 은은하게 감싸던 오러의 색이 짙어졌다.
“캬아악!”
괴성과 함께 순식간에 내 목을 향해 그어지는 칼날. 나는 방패를 들어 검을 막았지만 어이없게도 방패 윗부분이 툭 잘려 나갔다.
“뭐야, 무협지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칼을 방패로 막았는데 흠집이 나는 것도 아니고 잘려 나가다니.
“캬아!”
벤드리스가 다시 휘두른 검을 참교육으로 맞받아쳤다.
벤드리스의 검이 튕겨 나갔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물론 파괴 불가 옵션이 달린 참교육 또한 상처 하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검과 참교육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우웅!
검에서 실체화된 오러가 검 길이 두 배만큼 솟아났다. 무협지식으로 표현하자면, 검강이다.
“어··· 벤드리스. 장르 파괴하지 마. 이거 무협 아니라고!”
부웅! 붕!
투구 끝, 방패 한구석. 오러가 닿는 곳마다 툭툭 잘려 나갔다.
‘내 장비!’
이러다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지면 곤란하다.
저 오러를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참교육뿐. 나는 내구도가 아슬아슬한 방패를 집어넣고 참교육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깡! 깡! 끼릭! 깡!
검강 대 파괴 불가. 세계관 최강 옵션의 맞대결이다. 나는 날아오는 공격 하나하나를 맞받아쳤다.
“흥! 누가 이기나 보자!”
좀비가 된 주제에 벤드리스의 동작은 여전히 우아했다. 엘프답게 유연하고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반면 내 동작은? 강속구를 걷어내서 파울볼을 만드는 데 급급한 야구선수의 폼처럼 볼품없었다.
하지만, 벤드리스가 그 우아함을 유지하는 데는 마나라는 비용이 소모된다. 그리고 좀비가 된 지금,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하기는 어렵다.
검강의 위력은 점차 현격히 줄어들었다.
“뭐야? 벤드리스, 지쳤어? 너는 이 정도가 아니었잖아. 계속 해!”
가슴 한쪽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내 추억 속 히어로, 그의 몰락을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검강은 점차 줄어서 단순 오러로, 그마저도 잠시 후엔 사라졌다.
급기야 손에서 빠져나간 검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맨손으로 선 벤드리스의 초점 잃은 눈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미안해요, 벤드리스. 인제 그만 쉬어요.”
-깡!
오늘 내 추억의 한 페이지가 찢어졌다.
벤드리스의 검을 손에 쥐고 터덜터덜 아리엘에게로 갔을 때는 그곳도 이미 거의 정리된 후였다.
자그마치 실피드와 이프리트. 잠시나마 정령왕끼리의 대결이 펼쳐진 그곳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폐허 상태였다.
아리엘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계속 일어나려고 꿈틀대는 클로드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어떤 심정일지 감히 내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할 일이 뭔지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리엘, 눈 감아요.”
나는 벤드리스의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 * *
“대모님!”
“아싸 님! 괜찮아요?”
나는 기계마를 타고 달려오는 이시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엘프 도리안과 우리 일행이 함께 도착했다.
“대모님.”
“그래.”
도리안이 기진맥진한 아리엘을 부축했다.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아리엘은 왠지 백 년은 늙어 보였다.
“아웃사이더.”
“네.”
“고맙다.”
아리엘은 나를 꽉 안아주었다. 산뜻한 풀 향기가 확 밀려왔다.
“너는 불쌍한 벤드리스와 클로드를 구원했을 뿐 아니라, 우리 일족 전체에게 미래를 선물했구나.”
-띵!
[퀘스트 완료: 멸종위기종 지정 II]
[위업 달성! 멸종위기종의 수호자]
[당신은 세상에 나온 적 없던 엘프와 하이 엘프를 성공적으로 구원했습니다. 칭호 ‘엘프의 인도자(삼림, 산간 지역에서 이동속도 50% 증가, 야간 가시거리 100% 증가, 엘프의 호감도 100, 엘프 관련 퀘스트 보상 50% 증가, 엘프와의 사이에 생식 가능, 엘프 전용 아이템 사용 가능, 엘프의 숲에 개인 소유 주택 제공. 매월 1일 모든 엘프족 NPC의 수입 중 0.1% 수령]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하늘에서 혜택과 경험치가 마구 쏟아지는 수준이다. 그놈의 생식 가능은 왜 자꾸 끼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여기 오길 잘했어.’
보아하니 일행도 뭔가 업적과 보상을 받은 모양이다.
“어머! 업적이야!”
“나도 레벨 올랐다!!”
고생은 내가 다 했는데 말이야.
일행의 질문을 받아주다 보니 로그아웃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추격자들의 문제도 있고, 그거 아니라도 장소가 마땅치 않아 아리엘에게 한 시간만 지켜달라고 했는데 선뜻 들어주었다.
“그러자꾸나. 어차피 나도 길을 떠나려면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내가 자그마치 엘프의 인도자 아닌가. 들어줄 줄 알았다.
* * *
“엄청나다.”
“네? 그냥 가정식 백반 밀키트 데운 겁니다만.”
로그아웃했더니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 비서는 이제 간단한 조리를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사실은 밥상에 앉아 벤드리스와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엄청나다’고 말한 거지만, 이것도 엄청난 발전임에는 틀림없으니까.
김 비서의 일상생활 기술은, 마치 게임 속 스킬 늘듯이 가파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맛있네.”
이것은 미영이의 산장에서 함께 먹었던 된장찌개 백반이다.
게임 내와 외부에서 같은 상표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은 이제 아주 흔한 일이다. 의류, 식품, 장신구 등 종류도 다양하다.
‘여러모로 게임 안팎을 구분하기 힘든 세상이구나.’
“진짜 엄청난 것은 이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또 있어?”
“이것을 좀 보시겠습니까?”
김 비서는 홀로그램 화면에 게시물 하나를 띄웠다.
[제목: 데스티니의 남자?]
[얼마 전에 있었던 후기지수 무투회 알지? 참가자는 아니고, 그냥 구경 갔다가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너무 예뻐서 훔쳐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마스크 윗부분이 데스티니 같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옆에 여자는 오히려 알아보기 쉬웠다. DNC 부길마 딜라이트. 눈 옆에 눈물점이 딱! 단박에 알아봤다.
인증샷이나 부탁하려고 말 걸었는데 한사코 잡아떼더라. 자리를 피하길래 몰래 쫓아갔는데 선수 휴게실로 둘이 같이 들어갔다.
그 휴게실 주인은 바로···.
놀라지 마라. 후기지수 무투회 우승자 아웃사이더였다.
증거 사진 첨부한다. 참고로 동영상도 있음.]
└ 어쩌라고. 스카우트하러 갔겠지.
└ DNC에 여자밖에 안 받는 거 모름? 스카우트는 말도 안 됨.
└ 그럼, 뭐 무슨 다른 일이 있겠지. 설마하니 애인이라도 될까 봐? 뭐라도 있는 것처럼 글 싸질렀다가 고소미 먹어봐야 정신 차리지.
└ 데스티니가 국내 랭킹 17위에 현실에서도 재벌가 아들 , 존잘러 그레잇드래건 차 버린 거 모르냐? 남자는 무슨.
└ 전 이미 결혼했어요. 게임하고.
└ 혹시 이 남자인가요? (사진 첨부)
“풋!”
나는 입에 든 된장찌개를 하마터면 뿜어버릴 뻔했다.
DNC의 주요 인사가 모두 나와서 배웅하는 가운데, 내가 데스티니와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찌나 가까운지 입술이 닿을 듯 보였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