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의 끝
“이게 대체 뭐냐?”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저 때는 친한 사람도 없고 어색해서 죽을 뻔했는데. 이시연과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 저렇게 가깝게 서 있을 사이가 전혀 아니다.
“착시입니다.”
“착시? 저게?”
“계산상 주인님은 데스티니보다 53cm 뒤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딱 붙은 것처럼 보여?”
사진상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 표정은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에 비해 데스티니의 얼굴이 훨씬 작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인님이 뒤에 있었어도 딱 같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 겁니다.”
머리 큰 게 잘못이다.
“X나게 과학적인 설명 고맙다.”
“천만에요.”
“그래서 이 사진 출처는 어디야?”
“부 길드 마스터 강지민 SNS입니다.”
설마하니 저기까지 계획했을 리는 없을 텐데.
* * *
[언니, 아웃사이더하고 스캔들 뜬 거 알아?]
“어, 좀 전에 회사에서 연락해 줘서 봤어.”
[미안, 나는 중요한 원정이라 사진 올린 건데 사진이 그렇게 나온 줄은 정말 몰랐어. 여러 장 한꺼번에 올리다 보니.]
“괜찮아. 실제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조금 지나면 없어질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두 사람 행동 조심해 줘. 괜한 의심 사면 곤란하잖아.]
“알았어.”
전화를 끊은 이시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겪어보니 아웃사이더라는 남자 가끔 엉뚱하긴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젠틀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함께 있으면 흥미진진한 일이 자꾸 생겼다.
‘호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쉽게 오빠라 부르며 친해지는 플로라와 하이디가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뿐.
뭐가 있어야 말이지.
“왜 이렇게 가만두지를 못할까?”
남들 시선 신경 쓸 것 없이 게임에만 몰두할 수 있는 나로스에서 가급적 늦게 나오고 싶다.
“사가트에 도착한 후에도 같이 다니자고 해볼까?”
작은 바람이 생긴 이시연이었다.
* * *
“이건 또 뭐 하는 새끼야? 대한민국에 내가 이시연 찍은 거 모르는 놈도 있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군지 알아봐. 최대한 자세히.”
“알았어.”
“그리고 지금 얘들 어디에 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 * *
짧은 휴식 후 다시 접속했다.
“왔구나.”
아리엘도 그 새 심신 양면으로 추슬렀는지 훨씬 혈색이 좋았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그런 말을. 너희가 해 준 것에 비하자면 정말 하찮은 일이다.”
도리안과 함께 온 엘프 둘이 길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가트로 간다고 했지?”
“네.”
“거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 좀비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몰려있다고 들었다.”
“알겠습니다.”
“실프의 축복을 내려주마. 한데 모이거라. 이동 속도를 크게 높여줄 게다.”
그건 큰 도움이 되겠다.
“뭣들 하느냐? 한데 모이래도? 그렇게 떨어져서 서 있어서야 전원에게 닿지를 않는다.”
그 사진을 보고 난 탓인지 괜히 가까이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나뿐이 아니었다.
‘이시연도 봤구나.’
“큭.”
플로라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둘 사이 아무것도 아닌 거 우리가 그간 계속 봐서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왜 그래? 아니면 뭐, 진짜 마음이라도 생긴 거야?”
더 어색해졌다.
* * *
“플로라, 마법사의 눈 부탁해.”
“오케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계속해서 마법사의 눈으로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이동했다.
마법사의 눈 탐지 거리가 그렇게 긴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아싸 님. 거의 다 오지 않았나요?”
“이제 멀지 않습니다. 잠시 저 동굴 입구에서 숨 좀 돌릴까요?”
“좋아요.”
우리는 미니맵 상에 나타난 동굴에 몸을 숨겼다.
이 속도라면 퀘스트 목표 지점까지 단 5분. 스태미나를 회복하고 나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는군요.”
“그렇네요.”
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데스티니에게 얘기해줘야 할까? 강지민과 한 실장, 그리고 뒤를 쫓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과연 이 며칠간 그런 믿기 어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일만한 신뢰를 쌓았나?
잘 모르겠다.
“아, 플로라 조심 좀 해.”
“마법사의 눈 봤잖아. 이 동굴엔 아무것도 없다고.”
“플로라. 그러다 다쳐도 힐 안 해줄 거야.”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장난칠 궁리에 바쁜 어린 친구들인데. 그런 시꺼먼 꿍꿍이를 가진 사람이 숨어있다니 나조차도 못 믿겠다.
“괜찮아. 나 엘프의 가장 친한 친구야. 밤눈도 밝아졌을 것만 같은··· 으악!”
“왜 그래?”
생각보다 큰 비명에 데스티니가 나섰다.
“플로라 이 바보가 구덩이에 빠졌어.”
“바보.”
“괜찮아! 나 드워프의 가장 친한 친구야. 이 정도는 금방 파내고 올라간다!”
“생각보다 깊은데? 드워프의 가장 친한 친구 씨, 혼자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도와줘···.”
우여곡절 끝에 일행은 다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좀 늦어졌죠?”
“괜찮습니다. 실프의 축복도 20분은 남았고, 목적지까지는 5분 안에 도착할 겁니다.”
“출발하죠.”
마지막 스퍼트다.
⋮
“저기인 것 같군요.”
나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돌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가트 마을 근처에 외따로 떨어진 집이다. 멀리 사가트 마을을 둘러싼 돌벽이 보였다.
“사가트 마을은 그리 크지 않은 곳인데도 성벽이 있네요?”
하긴, 나도 이 게임에서는 마을 단위에 저런 돌벽이 있는 곳은 처음 봤다. 목책은 가끔 있었어도.
“들어가 보면 그냥 마을보다는 훨씬 큽니다. 낙원 시절에는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와 조상님, 낙원 라떼 시전하신다!”
플로라 넌 아무래도 범인이 맞는 것 같다.
돌집이 좁아 보여서 우선 나와 이시연만 집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처마 밑에서 일단 대기.
문도 잠그지 않고 방치된 탓인지 먼지는 많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깔끔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에는 책상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대도의 흔적을 찾아온 퀘스트였기 때문에 은근히 보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조금 실망했다.
‘숨겨진 장소가 있을지 몰라.’
그런 생각으로 집안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에 가죽 양장으로 된 얇은 책을 하나 발견했다.
-띵!
[퀘스트 완료! 대도의 유산을 찾아라 ⅘]
[퀘스트 보상: 대도의 일지, 대도의 만능열쇠]
갑자기 퀘스트가 완료됐다. 이 낡은 책이 대도의 유산이라고? 책을 펼쳐봤지만,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냥 백지뿐이었다.
다만 그 사이에 끼어있던 열쇠가 하나 떨어졌을 뿐.
[대도의 만능열쇠]
[대도의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다. 이 열쇠로 열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하나만 빼고.]
‘좀 허무하네. 보상도 짜고.’
차라리 여기 와서 얻게 된 엘프와 드워프 관련 퀘스트가 몇 배는 더 나았다.
-띵!
[퀘스트 발생! 대도의 유산을 찾아라 5/5]
[대도는 마지막까지 대도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귀한 성물을 훔치러 떠났던 그는 마지막 원정지에서 숨을 거뒀다. 그곳으로 가서 마지막 유품을 찾아라.]
-띵!
[퀘스트 완료! 대도의 유산을 찾아라 5/5]
[대도의 마지막 원정지에서 유품 ‘대도의 두 번째 반지’를 찾았다. 대도의 꿈은 이제 당신에게 계승된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퀘스트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띵띵거리다가, 퀘스트는 나타난 순간 완료되었다. 페트라에서 찾은 반지가 마지막 퀘스트에서 찾아야 할 유품이었다.
‘연계 퀘스트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런가. 순서가 뒤죽박죽이네.’
어이없이 5부작 연계 퀘스트가 끝났다. 레벨은 11이나 올랐지만, 솔직히 보상이 이게 뭔가 싶다.
‘뭐, 여기 와서 많은 것을 얻어가니까 그거로 만족할 수밖에.’
-띵!
[퀘스트 발생! 대도의 마지막 소원.]
[세상 모든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대도. 그가 열 수 없었던 마지막 자물쇠를 열어라.]
퀘스트 완료, 발생, 완료, 발생.
허름한 집에 들어와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로그 창이 난리가 났다.
대도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퀘스트가 지도상에 찍은 목적지는 사가트 성벽 안쪽.
멀지 않다.
나는 일지와 만능열쇠를 인벤토리에 넣고 일단 물러났다.
“계획했던 것 다 이루셨나요?”
이시연이 다가와 물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계획이 또 생긴 것 같지만. 내가 동의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 계약 이행 완료]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마 이시연에게도 같은 메시지가 갔으리라. 이제 동행이 끝이 났구나.
처음에는 좀 그랬지만, 같이 모험하면서 일행에겐 나름 정이 들었는데.
“저기,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인가요?”
“아직 정확히 어떻게 할지는 정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희와 같이 다니지 않으시겠어요?”
“네?”
“저희는 앞으로 열흘쯤 더 이곳을 탐사할 작정이거든요. 갈 곳을 정해두지 않으셨다면 같이 다니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간 서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됐고, 신뢰도 쌓였으니까.”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뒤를 쫓는 자들이 있다.
나를 쫓는 것인지, 이시연을 쫓는 것인지 불분명한 그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행보는 어렵다. 이쯤에서 이시연에게 사실을 밝혀야 하나?
“악!”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집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나와 이시연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트라 언니가 화살에 맞았어! 복면을 쓴 남자였어, 설화하고 플로라가 쫓아갔는데!”
“화살?”
미트라는 팔을 감싸고 스스로 힐을 걸고 있었다.
“난 괜찮아. 좀 놀랐을 뿐 위력 자체는 별거 아니었어.”
쫓아갔다던 설화와 플로라는 금방 돌아왔다.
“놓쳤어?”
“아니, 그게 아니고 죽었어.”
“뭐? 잡아서 공격한 이유를 물어봐야 하는데 죽이면 어떻게 해.”
이시연의 말에 플로라는 두 팔을 들며 항변했다.
“몰라. 그냥 툭 쳤는데 죽었어. 죽일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야.”
“무슨 마법을 썼는데?”
“매직 애로우.”
“설화는?”
“평타.”
“몹은 아니었어. NPC 아니면 플레이어가 분명해!”
불길하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 로그아웃하던가, 아니면 이참에 이놈들을 찾아서 일망타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저건 뭐지?”
하이디가 한쪽을 가리켰다. 하이디가 가리킨 곳에서는 먼지구름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건!”
나는 얼마 전에 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로 벤드리스와 클로드를 물리칠 때.
그때 그들이 끌고 오던 좀비 떼가 저런 먼지를 일으켰다.
“저기도 있어요!”
그런 먼지구름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그것은 총 다섯 개.
중요한 길목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각자 탈것을 타고 피합시다!”
그러나 나는 곧 포니투를 불러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우리 왜 아직 전투 상태야?”
전투가 벌어지면 그 상태를 해소하기 전까지는 탈것을 불러낼 수도, 로그아웃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트라를 공격한 남자가 죽어서 사라졌는데도 전투상태는 해소되지 않았다.
“아까 미트라 공격한 거 한 명 맞아?”
“분명 하나였어!”
이제는 다른 도리가 없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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