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의 끝
빠져나갈 곳을 찾는 동안 먼지구름은 점차 가까워졌다.
“언니! 어디로 가?”
데스티니는 이를 꽉 물었다.
마땅히 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적은 명백히 의도를 가지고 우리 일행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좀비 앞에 말 탄 사람들이 있어요!”
“뭐?”
하이디의 말대로였다.
어쩐지 좀비 주제에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협응한다 했더니만.
이제는 별수 없었다.
원하는 바가 아니어도 최소한의 준비 태세는 갖춰야 한다. 이처럼 오픈된 장소에서 다섯 갈래의 좀비를 맞이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니까.
“성벽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 말에 탄 괴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것은 얼굴을 복면으로 가렸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툴의 두 직원, 그리고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는 BJ대신맨과 그의 부하로 보이는 두 명이었다.
‘그놈은 없군.’
한실장이라고 강력하게 의심되는 남자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데스티니 일행에게 얼굴을 보일 수는 없을 테니까.
“워! 워! 안녕하신가!”
성벽에 도착하기 직전, 마침내 우리 일행을 앞지른 대신맨이 길을 막고 말에서 내렸다.
“너는 누구냐!”
데스티니의 질문에 남자는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겸사겸사 모두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
“왜 이런 짓을 하지?”
“아···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간단히 말해서 저놈에게는 볼 일이 없는 대신 감정이 있고.”
그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머지 여러분에게는 감정이 없는 대신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는 과장된 자세로 크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사이 툴의 두 직원도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두 사람은 흥분된 나머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 다 됐으니 우리는 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시오.”
“안전한 곳?”
“당신 부하들이 우리를 텔레포트 시켜준다고 했지 않소.”
“그랬지.”
“텔레포트 마법진 구축 때문에 부하들도 몇 남겨두고 왔다고 했잖소. 장난치지 말고 빨리. 곧 좀비 도착하겠는데.”
“세상에··· 그런 엉성한 거짓말에 속다니. 게임에 별 뜻이 없는 건 잘 알겠는데, 이 게임에 그딴 편리한 건 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좀 너무하잖아. 저 좀비 모으다가 내 부하 다섯이나 죽은 거 못 봤어? 그렇게 입맛대로 쏙쏙 구해낼 수 있으면 왜 그렇게 죽게 뒀겠나?”
“뭐야?”
“야, 이 미친놈아!”
“크하하하!”
BJ대신맨은 배를 잡고 호쾌하게 웃었다.
“이럴 시간 없어! 우리라도 도망치자!”
툴의 직원은 속았다는 것을 알자마자 도망쳤다.
“행운을 빌어 친구들! 다음부터는 아무나 믿지 말라고!”
BJ대신맨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뜸 말에서 내렸다가 다시 말에 탈 수 없게 된 두 남자는 정신없이 두발로 도망갔다.
“자, 이제 여러분 차례. 아쉽다. 시간이 많지 않네. 다 같이 사이좋게 죽을 때까지 한 5분 남았으려나?”
“너 머리 괜찮냐? 너도 도망갈 길은 없어 보이는데? 혹시 생각 못 한 건 아니지?”
우리와 전투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파티원을 홀로 보내 죽게 하고, 좀비 몰이를 해 왔다. 이만큼 철저한 준비를 한 것치곤 본인이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
“뭐 어때?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내 계정은 네가 다 망쳤어, 이 새끼야. 널 만나고 모든 게 다 꼬였다. 계정 삭제당하고 다시 만들어서 새출발해야지.”
미친놈답지 않게 건설적이고 희망적이구나. 미쳐도 이상하게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DNC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싹 한 번씩 죽고 새출발합시다. 세계랭킹 2위는 좀 아깝긴 하다.”
“우리가 누군지 정확히 아는 모양인데, 왜 이런 함정을 판 거지?”
“입이 근질근질.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아쉽게도 말 못 해주겠네.”
도망가던 툴의 두 직원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성난 좀비 떼에 덮쳐졌다. 어디에도 벗어날 구멍은 없었다.
“쯧쯧, 불쌍한 친구들. 여기 있었으면 1분은 더 살 텐데, 굳이 달려가서 힘들게 죽냐?”
두 도망자 때문에 잠깐 이지러졌던 좀비의 진형은 다시 우리 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몇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좀비 떼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우리 일이 아니라면 말이지.
더 이상 잡담에 쓸 시간은 없다.
참교육의 시간이다.
“야, 진짜 저렇게 많이 모으느라 개고생─”
-깡!
나는 ‘맹렬한 돌진’ 스킬을 이용해 방심한 대신맨에게 다가가, 뒤통수를 날려 버렸다.
표행 퀘스트 이후 두 번째 PK다. 마음 같아선 몇 번을 죽여도 모자란다.
-깡! 깡!
남아 있던 대신맨의 부하 둘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하지만 좀비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멀리 있던 놈들은 대신맨과 일행이 죽어 어그로를 잃고 멈춰 섰다.
그러나, 이미 일정 수준 이상 다가온 절반 이상 좀비의 어그로는 그대로 우리를 향했다.
[퀘스트 발생! 생존]
[당신은 무방비한 상태로 좀비 떼 앞에 노출되었다. 좀비의 추격을 물리치고 생존하라. 한 명이라도 사망 시 실패. 올 스테이터스 10 영구하락.]
“갑시다!”
“어디로요?”
“저 옆으로!”
성벽 한쪽에 잠긴 쪽문이 보였다. 나는 그곳을 가리켰다.
‘만능열쇠가 진짜 만능이어야 할 텐데.’
먼지구름이 턱밑까지 다가왔다.
이제는 좀비의 얼굴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
“빨리요!”
“잠시만요!”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작은 철문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열쇠 구멍이 있는 문이었다.
DNC 길드원이 호위를 서는 가운데 나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아싸 오빠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으아아, 진짜 가깝다고!”
“잠깐만, 녹슬었는지 뻑뻑해서···.”
마침내 선두권의 좀비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데스티니와 일행이 힘을 합쳐 좀비를 잡는 동안 간신히 쪽문을 열었다.
-끼익!
“됐다! 들어와요!”
“살았다!”
나는 일행이 다 들어오길 기다려 문을 닫아걸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 문, 버틸 수 있으려나?”
하이디의 혼잣말에 다들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 언니! 왜 그런 말을 해!”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봐요. 거기서 미트라가 신성 영역 선포하고 기다리면 다 흩어질 테니까. 미트라, 스크롤 하나 남았다 그랬지?”
“키에.”
대답한 것은 미트라가 아니었다. 맨발의 여자 좀비 하나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으아! 파이어 볼!”
“잠깐! 플로라 너무 요란한 건··· 늦었네.”
파이어볼에 맞고 찌그러진 좀비 뒤로 느릿느릿 다른 좀비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깡! 깡!
“제기랄, 하나둘 없앤다고 해결될 게 아니네요. 어서 가죠!”
“네! 가요!”
나는 일행을 데리고 길을 잡았다.
이 마을에 들어오고부터 나는 계속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 골목을 돌아서면 연금술 가게, 그 옆에 보석 세공 전문가의 집.’
아무리 봐도 이곳은 낙원의 초보자 마을을 닮았다.
특히 보석 세공 만렙을 찍었던 나는 수도 없이 세공용품점을 드나들었다. 잘못 볼 리가 없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지는 꽤 되었다. 오는 길에 잠시 몸을 숨겼던 동굴.
‘플로라가 빠졌던 웅덩이. 그거 아무래도 내가 판 함정 같단 말이야.’
코볼트 동굴에서 함정 노가다 하던 게 굉장히 먼일같이 느껴졌다. 눈으로 보고서도 코볼트 동굴이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함정 때문이다.
‘함정은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어째서 여기에···.’
사가트 마을의 성벽도 무너지고 덩굴이 무성해서 그렇지 낙원에서 보던 초보 마을 벽과 기본적으로 구조가 동일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웃사이더 님! 조심해요!”
“아차!”
좀비가 너무 많았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가다간 아무리 참교육을 꺼냈다고 해도 위험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좀 혼란스러워서.”
“조심하세요. 위험하니까.”
“알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나는 클랜 하우스에 가보고 싶은 생각을 애써 떨치며 길을 안내했다.
목적지는 마을 회관.
‘넓이도 적당하고, 거리도 멀지 않아.’
클랜 하우스 건물은 완전히 반대쪽이다. 물론 여기까지 온 김에 기회가 된다면, 대체 그 도둑놈이 죽으면서까지 열어보기를 소망한 마지막 자물쇠가 뭔지도 알고 싶었다.
그때였다.
-콰아앙!!!!
쪽문이 뜯겨나가면서 밖에서 맴돌던 좀비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많이 들어오는지 자기들끼리 미는 힘에 터져 죽는 놈이 생길 정도였다.
“으아아, 아싸 오빠! 빨리요!”
하이디가 닦달했다. 말이 없는 설화나 미트라의 표정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
“달려!”
-깡! 깡!
이제는 조심이고 뭐고 없었다. 가로막는 건 뭐든 한 방에 날리면서 마을회관을 향해 달렸다.
삼십 미터, 이십 미터, 십 미터.
마을회관 입구까지 거리는 금방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몇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저깁니다! 어서 들어가요!”
“아싸 님! 잠겼어요!”
“내가 열 테니까 잠깐 막아줘요!”
마음이 급했지만, 다행히 성벽의 쪽문보다는 쉽게 열렸다. 만능열쇠는 다행히 여태까지는 만능이었다.
“들어가요! 2층에 홀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1층은 농성하기에 쉽지 않다.
2층에서 계단을 막으면 시간을 벌기 용이할 거란 판단에 그리로 안내하고 문을 잠갔다.
‘문이 부실한데 얼마나 버티려나.’
미트라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미트라! 성역 선포해!”
“알았어! 1분만 막아줘!”
안에서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주문 발동 시간 동안 무방비가 될 미트라를 위해 플로라와 설화를 들여보내고, 나와 데스티니는 계단을 막아섰다.
“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보다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것 같던데요?”
“네. 그건 성역 선포 후에 다 말씀드리죠.”
나무문은 성난 좀비 떼에 의해 금방 부서졌다.
-깡!
나는 머리를 들이미는 좀비를 두드려 패서 날려버렸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야구 배트. 혹시 아싸님이 그 ‘코인좌’인가요?”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좀비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것도 나중에!”
그립 색깔만 다르고 모양은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방망이가 마을회관 계단에서 춤을 췄다.
협소한 공간 덕에 주무기인 양손검을 봉인하고도 이시연의 힘은 강력했다.
거기에 내 방망이의 아주 강한 넉백 옵션 때문에 한 마리만 때려도 뒤따르던 좀비까지 우수수 넘어지는 효과가 있었다.
-파지지지직!
이십번 때릴 때마다 한 번씩 터지는 체인 라이트닝도 다수를 상대하는 상황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제법 호흡이 잘 맞는데?’
이시연은 스킬을 줄줄이 쏟아내는 와중에도 간격을 잘 계산했다.
덕분에 협소한 공간에서도 서로의 무기가 겹치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좀비가 빠져나갈 만한 사각이 만들어지는 일도 없었다.
덕분에 갑자기 김미영 생각이 났다.
김미영과는 정말 호흡이 잘 맞았다. 귀신같이 내가 쓸 스킬을 간파하고 서포트할지, 자기가 나설지 알아냈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AI여서 그런 거였지만.’
“다 됐어요! 들어와요!”
2층에서 고개를 내민 플로라가 소리쳤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나는 참교육을 미친 듯 휘둘러 좀비를 전부 밀쳐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감과 동시에 따스한 느낌을 주는 힘이 확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성공이다!’
죽일 듯 뒤를 쫓던 좀비가 갑작스러운 신성력에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나와 데스티니는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잘했어요, 미트라!”
그런데 미트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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