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마음
이번에는 떨어지는 일 없이 잘 날았다. 공중에서 본 폴리나 섬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가운데 저건 화산인가?’
죽은 화산인 것 같지는 않다.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으니까. 공기는 나잠보다 훨씬 습했다.
나잠은 뜨거웠지만 건조해서 그리 덥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폴리나는 착륙을 위해 고도를 살짝만 낮춰도 금방 후끈함이 느껴졌다.
“어, 덥다.”
뜨거운 공기를 가로지른 그리핀은 폴리나의 착륙장에 도착했다.
“환영합니다!”
그리핀에서 내리자마자 전통 복장 차림의 여성이 화환을 걸어주고, 얼굴에 요란한 칠을 한 남자들이 구릿빛 피부를 드러내고 전통춤을 췄다.
역시 폴리나. 사람들이 속속 몰려오고 있었다. 크기로 치면 나잠이 훨씬 대도시인데도 승강장은 폴리나가 훨씬 붐볐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단 하나.
‘절대 포니투 꺼내지 말자.’
여기서 들켰다간 숨고 자시고 뭐 아무것도 없다.
얼른 승강장에서 내려가 기념품샵부터 찾았다. 현지에 숨어들려면 옷부터 바꾸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나잠에서 배웠다.
‘이 도시에선 튀는 것이 가장 안 튀는 길이구나.’
길에 수영복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반쯤, 화려한 프린트의 셔츠나 비치웨어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나머지 반이었다. 갑옷이나 무기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없다.
기념품 샵에서 거대한 선글라스와 화려한 야자수 무늬 보드쇼츠, 아이 러브 폴리나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셔츠를 사서 입은 후에야 비로소 위화감이 없어졌다.
“휴··· 이 정도면 됐겠지.”
드디어 마음 놓고 로그아웃할 시간이다.
* * *
“김 비서.”
“다녀오셨어요.”
“내 집들은 어떻게 됐나?”
말을 뱉어놓고 스스로 뿌듯하기 짝이 없었다. ‘집’도 아니고 ‘집들’이라니.
“주인님의 영지 무인도는 현재, 기본 개발 32%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택은 개발 중에도 사용할 수 있으니, 나중에 한 번 다녀가셔서 인테리어 방향을 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좋아.”
게임 속의 집은 다음 접속 때 가보기로 하자.
“이사하실 집은 몇 군데로 추려서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나는 김 비서가 건넨 패드를 받아 위아래로 들춰봤다.
경기도 남부 신도시의 중형 평수 아파트, 서울 외곽의 작은 단독 주택 등 다양한 입지의 물건이 있는 가운데 하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로스트 파라다이스 게이머 전용 독신자 아파트?”
보조 발전기를 구비하여 안정적 전력 공급. 게이머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파티룸. 게이머 전문 피트니스장 구비.
“마음에 드십니까? 관리비가 비싸고 전용 평수가 좁은 편이지만 혼자 사는 게이머를 위해서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만 빼고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요? 저는 거기 조건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요?”
“음. 게이머와 교류할 생각 없고, 내가 전업 게이머인 거 알리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사실 그렇게 천년만년 게임만 하고 살 생각도 없고.
“조금 생각해 볼게.”
게임 내에서 영지를 얻었더니 현실에서 집 마련 욕구가 뚝 떨어져 버렸다.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본격적으로 천마 벽화를 탐사하기에 앞서 나의 영지 ‘무인도’부터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방금 김 비서와 작별하고 게임에 들어왔는데 영지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는 이제 작별 인사 같은 거 할 필요가 없겠다. 어딜 가도 김 비서가 있네.”
“에이, 그래도 현실과 게임은 구분하셔야죠. 게이머 권장 사항에도 들어가 있는 내용이라고요.”
김 비서는 확실히 구분하고 있는지 말투부터 달랐다.
”알았다. 그럼, 집부터 볼까?”
“넵!”
아직 개발 중인지 현장소장처럼 작업복을 챙겨입은 김 비서가 경례를 붙였다.
가운데 큰 계단이 있는 전형적인 유럽풍 2층 건물의 안에 들어서니, 이제 좀 영지를 가졌다는 실감이 났다. 주민도 없고 관광객도 없는 무인도지만.
“왼쪽이 식당, 오른쪽은 서재 및 접객실로 설정되어 있어요.”
접객실이라.
나중에 가능하면 영한이는 한번 초대해도 좋겠는데.
“위층은 침실이에요. 앗! 백사장 방갈로 공사장에서 호출이에요!”
“가 봐. 나 혼자 볼게.”
“편하게 둘러보세요~!“
매일 회사원 스타일의 김 비서를 보다가 저런 말투를 들으니, 적응이 안 된다.
2층 침실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크~! 이게 오션뷰라는 거냐. 죽이네.”
침대도 푹신해 보이기는 하는데 게임 내에서 잠을 잘 이유가 있으려나. 침대의 감촉을 느끼며 여유를 부리다가 일어났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서재 책상에 앉으니 완전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
“영지도 있고, 비서 겸 집사도 있으니 귀족이지 뭐.”
서재에 앉은 김에 책을 꺼냈다. 나로스에서 얻은 대도의 일지.
대도의 완전무결한 반지에 추가된 스킬 ‘독서등’을 시전하고 반지의 빛을 일지에 비췄더니 글씨가 나타났다.
‘생각대로군.’
나는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일지는 낙원에서 플레이어가 사라진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마을 안에 득시글하던 용사 놈들이 모두 사라졌다. 단체로 원정을 떠났나? 툭하면 정의 구현이랍시고 나를 잡아 감방에 쳐넣던 놈들인데. 그럴 리가 없다. 지긋지긋한 놈들. 함정이 분명하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용사 놈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어디 가서 단체로 콱 죽어버린 게지. 잘 됐다, 이 녀석들.]
[2주일째. 아직 아무도 안 나타났다. 마을에 들어갔지만, 나를 잡는 놈이 아무도 없다. 경비대 놈들은 어차피 나를 못 잡는다. 용사 놈들이 사라진 이상, 내 은신을 알아챌 녀석은 하나도 없으니까.]
[내 세상이다! 아무리 훔쳐도 나를 잡아넣을 놈이 없는 것이다. 어제는 경비대장의 집을 털었지만 멍청한 놈! 누가 훔쳤는지 감도 못 잡고 있어, 크크.]
이후로 한참 어디서 뭘 훔쳤고, 어디에 누가 돈이 많고 이런 얘기가 이어졌다. 족히 몇 년은 될 것 같은 분량이었다.
“이거 뭐 아주 도둑이 천직이구만.”
괜히 대도가 되는 게 아니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용사 놈들이 전부 떠난 게 아니라고 한다. 어디지? 몇 놈이나 남았나? 확인해야겠다. 속쓰림이 다시 시작되려고 한다.]
[한 놈이다! 딱 한 놈! 이 멍청한 놈. 왜 혼자 낙오돼서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 남작이 마을회관에 보호하고 있다는데 가서 보는 게 맞는 걸까? 혹시 걸리면 어떻게 하지? 만약 할 수 있다면 내 손으로···.]
[결국 보고 말았다. 남작 이 인간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내가 보기에 그것은 용사가 아니라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째서 그런 것을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거지?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다.]
[중요한 단서. 열쇠는 용사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용사?]
“용사의 집이라는 게 설마 클랜 하우스는 아니겠지?”
대도가 사가트 출신이라는 건 놀랍지 않았지만, 남은 사람이 있었다는 건 놀랍다. 오류로 로그아웃 처리되지 않은 데이터가 남아 있었겠지.
[기이한 일이다. 요즘 부쩍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간질 같은 병일까? 아직 열쇠를 찾지 못했는데 병이라도 옮으면 큰일이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다.]
아마도 좀비가 되기 시작한 시점의 얘기인 것 같다. 이 대도 역시 좀비가 되었던 걸까?
‘아니지. 페트라에 성물 훔치러 갔다가 죽었다고 했잖아.’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보기로 하고 일단 일지를 덮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방갈로 공사 현장에 들렀다가 폴리나로 떠나기로 하자.
“오우!”
눈부신 남국의 태양, 하얀 백사장, 코발트 빛 바다.
조난당해 헤엄쳐 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환상적인 풍경이다. 마치 사진 속 풍경에 뛰어든 듯한 이 감동.
무엇보다 감동스러운 점은 이게 내 것이라는 점이지.
“주인님! 여기요!”
김 비서가 손을 흔들었다. 현장 소장 놀이는 집어치웠는지 그새 비치 웨어로 갈아입은 상태다.
“얘들은 누구야?”
방갈로 공사에 한창인 것은 내가 처음 보는 종족이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면 2족 보행 고양이라고 할까? 장화 신은 고양이도 아니고.
“이브가 파견한 영지 건설용 NPC예요.”
“그런데 왜 하필 고양이?”
“그냥 취향 아닐까요? 이브 마음이죠, 뭐.”
이브에게 취향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설명 듣기로는 영지 관리를 위해서 고용할 수도 있다고 해요. 고용할까요?”
“얼마인데?”
“기본 영지라서 현재는 두 마리까지 되는데, 한 마리에 500골드요.”
“매달?”
“아뇨.”
“그럼 싸네. 두 마리 고용하지 뭐.”
“와, 나도 고양이 생겼다!”
그게 왜 네 거냐? 내 거지. 하지만, 나는 부하 직원의 사소한 꿈을 짓밟을 정도로 잔인한 상관은 아니다.
‘동기 부여도 되고 좋지.’
나는 폴리나로 가는 포탈을 열었다.
* * *
폴리나의 기념품 가게 옆 골목에서 포탈을 통과해 나왔다.
김 비서의 정보에 의하면 천마가 그려진 벽화는 폴리나 섬 가운데 화산 정상 부근에 있다. 날아갈 수단이 없는 나는 걸어서 산을 올라야 한다.
나로스의 설산과 폴리나 섬의 산은 형태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높이는 폴리나가 훨씬 낮지만, 넓이 면에서는 폴리나가 한 수 위. 게다가 저지대에는 열대우림이 형성되어 있어서 길 찾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다.
‘안내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폴리나 섬 중심부로 가자 관광업체가 여러 개 있었다.
해양 던전 체험, 수상 스킬 체험 및 교습소 등 바다 관련 업체. 산악 사냥 및 캠핑 스킬 체험 업체 등 종류도 다양했다.
“저기구나.”
화산 등반 업체를 찾아서 들어갔다.
“계십니까?”
“어떻게 오셨을까요?”
“혹시 여기 상품 중에 천마도 벽화 동굴에 가는 것도 있을까요?”
“천마도? 아···. 거기는 다른 포인트와 너무 떨어져 있어서 현재는 가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 가 보시려면 개인 안내인을 구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산악 안내인은 난색을 표했다.
“소개해 주실 분은 없고요?”
“죄송합니다. 인력이 모자라서···. 모험가 길드에 가서 퀘스트를 걸면 맡을 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퀘스트라···.”
길드를 통해 개인 의뢰를 넣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NPC가 아닌 플레이어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폴리나 산 정상 부근 천마도 동굴까지 안내할 분을 찾습니다.”
“천마도 동굴 말씀입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폴리나의 모험가 길드 접수원의 말투는 홈쇼핑 AI 상담원의 것과 똑 닮아 있었다.
“천마도 동굴까지 에스코트, 난이도 D, 퀘스트 보상 150골드입니다.”
그 가격에 거기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있으려나?
“수수료 20% 더해서 180골드 내시면 등록해 드리겠습니다.”
“······.”
도둑놈들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대로 지불했다.
“감사합니다. 등록자 이름은 본명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무 이름이나 됩니까?”
“네. 본명, 가명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명으로.
“정상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수락하는 분이 메시지를 보내실 겁니다. 두 분이 일정 맞춰서 가시면 됩니다.”
돈 뜯어 간 거에 비하면 길드는 하는 게 없는데?
사기당한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어. 지금 내 입장에서는 푼돈이기도 하고.
바다가 보이는 폴리나의 한 카페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면서 십 분 정도 기다리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신성모독큰형’님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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