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마음
[네, 그렇습니다. 제가 ‘신성모독큰형’입니다.]
실제로 내가 생일도 빠르고 키도 더 크니까 큰형 맞다.
[퀘스트 수락한 ‘폴리나엄홍길’입니다.]
이름이 참 믿음직스럽다. 어느 산에 간대도 잘 데려다줄 것만 같고.
[언제 가실 예정일까요? 제가 로그아웃 시간이 빠듯해서.]
[저도 오늘은 시간이 다 돼가는데 내일 아침 괜찮으신지.]
[그러시죠. 내일 아침 9시에 폴리나 북문에서 만나실까요?]
[제가 폴리나가 초행이라 길을 잘 모릅니다. 모험가 길드 앞은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만 제가 좀 멀리서 오는 거라 시간 낭비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제가 지도에 위치 찍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하기도 그래서 알았다고 한 후 로그아웃했다.
게임 채널을 틀어놓고 쉬고 있을 때였다.
[속보. DNC 길드 공식 기자 회견.]
데스티니가 결국 칼을 뺀 모양이다. 조금 기다렸더니 영상이 나왔다.
데스티니와 여자 몇 명이 나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마구 터지는 가운데 그녀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현실에서 내가 얼굴을 아는 것은 이시연과 부 길드장 강지민뿐이다. 나머지는 실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저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안녕하세요. 데스티니 이시연입니다. 오늘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시연의 얼굴은 검은 복장만큼이나 어두웠다.
-그저 게임이 좋아서 만들어진 사적 모임이 길드로, 그 길드가 길드를 넘어 회사가 되기까지 2년. 본의 아니게 길드장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길드를 이끌어 왔습니다.
“세계 랭킹 2위가 길드장에 안 어울린다고?”
-그러나 최근 멤버들 사이에 게임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을 빚는 일이 생겼습니다. 급기야 의견 대립 수준을 넘어서, 일부 직원과 길드원이 결탁하여 길드에 큰 해를 끼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배신자는 미트라였을까?
-이에 저는 DNC 길드를 완전히 해체하고 한 명의 게임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응? 해체?”
그 폭탄선언에 게임계가 발칵 뒤집혔다.
길드 규모에서는 순위권에 들지 못하지만, 인지도와 인기만 두고 보면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DNC가 해체라니.
해당 인터뷰 기사에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
└ 해를 끼친 길드원과 직원이 대체 누구냐?
└ 언니! 힘 내세요!
└ 아깝다. 조금만 더 버티면 상장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 이렇게 되면 광고 위약금도 장난 아니겠다.
└ 잘 됐다. 꼴 보기 싫었는데. 얼굴만 믿고 설치더니.
└ 세계 랭킹 2위를 두고 얼굴만 믿고 설친다는 분, 신성모독이세요? 대체 본인은 몇 위 하시길래 그런 소리를?
└ 불화 좀 생겼다고 해체까지 해야 해? 그런 식이면 우리 집도 해체해야 하는데. 어제 우리 엄빠 대판 싸웠음.
└ 안녕하세요. 데스티니 본인입니다. 길드에 도둑놈이 들끓어서 아예 길드를 없애버렸습니다.
└ 내가 데스티니인데 이거마따(덜렁).
“생각보다 화끈한 스타일이네.”
말이 길어서 일 처리도 늘어질 줄 알았더니 전광석화처럼 정리해 버렸다. 그것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강지민하고 한 실장만 내치고 말 줄 알았더니만.”
아, 그리고 누군지 모를 배신자랑. 댓글을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김 비서가 다가왔다.
“주인님, 전화 왔습니다.”
“누구?”
“데스티니입니다.”
“뭐?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전화하고 그런 사이였던가? 물론 전화번호는 진작에 교환한 사이지만.
“스피커로 연결해 줘.”
“네.”
이 시점에 왜 연락을 해? 나 때문에 길드 깨졌다고 원망하려는 건 아니겠지.
“여보세요.”
“아웃사이더님 맞죠?”
“그런데요.”
“술 좀 사주세요.”
한참 고민했다.
술 사주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동네 호프집에 데려갈 수는 없지 않나.
나야 좋지만 이시연이 그런데 갔다간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즉석 사인회가 개최되겠지.
이시연이 평소 가는 보안 좋은 곳 없는지 물어봤는데, 한 실장 아니면 강지민이 소개해 준 곳이라 가기 곤란하다고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저는 말이죠. 오빠 처음 봤을 때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한 실장님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데 한 실장이야말로 이상한 놈이었네? 게임도 안 한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게임 캐릭터가 있네? 심지어 한 실장하고 강지민 이 계집애는 동거 중이었네?”
“시연아, 너 그거 이미 세 번 한 얘기다.”
“알아요.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이시연은 손가락에 묻은 양념치킨 양념을 쪽 빨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맥주는 너무 약하다고 거기에 소주도 말았다. 소맥이라는 얘기다.
“아, 좋다! 나 관리한다고 이런 거 3년 만에 처음 먹는 거 알아요?”
알지.
좀 전에 얘기했잖아.
“주인님. 아무래도 집으로 부르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누가 봤다간···.”
“아, 우리 김 비서님! 아무리 봐도 미인이셔. 레이첼 홍이 직접 보내줬다니 부럽다.”
“술에 취해도 여전히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그런 얘기는 몇 번 반복하셔도 괜찮습니다.”
혹시나 해서 집에서 마셔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김 비서를 보여줬더니 안심한 모양이다.
방금 사람에 속아서 길드 해체하고 온 애가 또 이렇게 사람을 쉽게 믿네.
물론 나야 믿을만한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엠티 온 것 같아 오히려 재미있다고 내 방에 들어온 이시연이다.
그녀가 술에 취하고 나를 편하게 오빠라 부르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거 알아요? 오빠하고 게임 한 며칠 동안 저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무슨 일을 해도 길드에 피해 가는 거 아닐지 고민하는 거 솔직히 지겨웠거든요. 행사 불려 다니는 것도 너무 많았고.”
워낙 다이나믹한 며칠간이라 나로스는 솔직히 나도 즐거웠다.
“오빠도 그렇고 신성모독 오빠도 그렇고. 하고 싶은 게임 마음대로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휘둘리면서 살고 있을까. 오빠들과 헤어지고 하루도 그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어요. 오빠, 내 말 듣고 있죠?”
“그럼 그럼. 계속해.”
중언부언 횡설수설이지만 내 경험상 이럴 때는 들어주고만 있어도 된다.
내게서 뭔가 해답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사정을 다 아는 사람, 그럼에도 직접 관련은 없는 사람에게 한탄하고 싶었을 뿐일 테니까.
확실히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저 이제 너무 홀가분해요. 비록 위약금 물고 나면 빈털터리지만. 전 오빠를 만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너도냐?”
“또 누구?”
“그레이, 아니 신 그레이가 그러던데.”
“그렇구나. 난 또 뭐 다른 여자 있는 줄.”
그 말을 끝으로 이시연은 ‘픽’ 하고 쓰러졌다.
“오프 스위치 누르셨습니까?”
“중간 과정이 없는 여자였구나. 멀쩡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네.”
그러고 보니까 아직 배신자가 누구였는지 못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이시연은 김 비서가 끓여준 해장국까지 야무지게 먹고 돌아갔다. 내방 침대에 재운 덕분에 나는 캡슐 안에서 잤지만.
“종종 놀러 와도 되죠?”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우리 부모님, 미국에 사세요.”
“그렇다면야 뭐, 그런데 곧 이사 갈 거야.”
“어디로요?”
“그건 미정.”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래. 일 마무리 잘해. 파이팅이다.”
이시연은 끝내 배신자가 누구였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는 일말의 미안함이 있다나.
“김 비서야, 나 결심했다.”
“뭐를 말입니까?”
“단독 주택으로 하자.”
아무래도 이시연이 종종 드나들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하다. 스타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매입 후 인테리어 공사까지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이렇게 김 비서는 현실과 게임 양면에서 현장 소장이 되었다.
* * *
“신성모독큰형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폴리나 외곽. 나는 산악 안내인이 찍어준 장소에서 그를 만났다.
푸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산악 안내인답게 등산복과 배낭을 메고 있었다.
폴리나 시청에서 발급한 안내인 자격증을 보여준 남자는 갈 길이 멀다며 바로 출발했다.
“신성모독 팬이신가 봅니다.”
“네··· 뭐.”
“사람 상대하는 일 하다 보면 신성모독여친, 신성모독애인, 신성모독마누라 그런 분들 참 많이 봅니다.”
남자는 숲길을 능숙하게 헤치며 말을 걸었다.
“데스티니도 많습디다. 데스티니남편, 운명의데스티니, 유아마데스티니 등등.”
“그래요?”
“요 며칠은 또 아싸라는 말 넣는 게 유행인지 부쩍 늘어났어요.”
나는 그말에 놀라 혀를 깨물었다. 설마하니 그 아싸가 나 때문은 아니겠지?
“혼밥하는아싸, 전업아싸, 도둑맞은아싸. 아싸도 다양합디다.”
“아웃사이더애인, 아웃사이더마누라는 없고요?”
“전혀요.”
제기랄.
남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산길은 점점 험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사라지니까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그러죠.”
남자는 거침없이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빨라져서 잠시 뒤를 놓쳤다.
얼른 남자가 사라진 곳으로 쫓아갔으나 그곳엔 남자는 없고 고릴라 무리가 있었다.
“우워!”
오기 전에 찾아본 바로, 폴리나 화산 하단에 나타나는 동물형 몬스터의 레벨은 대략 100 근방. 중턱에 가면 130에서 150대의 야수가 나오고, 정상 부근에 가면 180가량 되는 몬스터가 나오지만, 그 숫자는 적다.
따라서, 내 칭호 ‘미친개’ 덕분에 산 하부에서는 선공 당할 일이 없다. 나는 고릴라가 즐비한 숲을 여유롭게 빠져나왔다.
“기다리셨습니까?”
고릴라가 있던 자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아? 따, 따라오지 않으시길래 잠깐 멈췄습니다.”
‘내 착각인가?’
잠깐 놀라는 표정을 본 것 같은데.
“별일···없으셨죠?”
“네.”
“계속 가시죠.”
이런 일은 중턱에 도달할 때까지 두 번 더 일어났다. 이제는 나도 이것이 우연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중턱에 접어들자 확연히 나무가 줄어들었다.
있다고 해도 허리를 넘지 않는 것이라 시야가 확보되었으므로 그런 식으로 갑자기 몬스터 무리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바닥만 조심하면 되겠군.’
여기서 나타나는 몬스터는 레벨 140 근방의 독사형 야수, 볼카닉 스네이크다.
주변 토양과 색이 비슷해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데다가 순간적인 스피드가 상당해서 어하는 순간에 당하게 되는 치명적인 녀석.
레벨도 나보다 높기 때문에 미친개 스킬도 소용없다.
“뱀 조심하십쇼. 바위나 풀 주변에는 가지 마시고요.”
뜻밖에 폴리나엄홍길, 폴홍길은 뱀을 주의하라는 말을 해줬다.
‘갑자기?’
여태까지의 행태로 봐서는 슬며시 뱀 근처로 유인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다.
발밑을 조심하며 그의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프슈우욱!
마치 거대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뜨끈한 것이 내 얼굴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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