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마음
바위틈에서 갑작스레 뿜어진 화산 가스는 내 몸 전체를 감쌌다.
다행히 온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계란 썩은 냄새가 나서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휴···.”
폴홍길의 표정은 복잡했다. 성공의 안도감과 죄책감이 버무려진 얼굴이었다.
“그 가스에 직격당하면 처음엔 살짝 어지러운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4대 스탯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곧이어 마비가 오죠. 노출된 지 10초가 넘으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가스인데요.”
남자는 팔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이제 막 10초가 지났군요. 미안합니다.”
“그럼, 좀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요.“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어 나왔다.
히드라의 독연에서도 무사했던 나다. 그만큼 내 복면 ‘마기꾼’의 성능은 검증된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폴홍길은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수작 부리지 말고 길 안내나 잘하세요. 몰라서 넘어가 준 거 아니니까.”
“.......”
“아니면 베아트리체한테 가볼까요? 제가 지금까지 찍은 영상 들고?”
“아,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
보나 마나 전업 게이머일 텐데.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적어도 일주일 접속 제한 조치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싫으면 왜 이러는지 시원하게 털어놔 보시죠.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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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굴로 가는 길만 정확히 알아내고 폴홍길은 돌려보냈다. 본인이 퀘스트를 포기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공짜로 안내받았네.”
예상대로 그는 사주를 받았다.
최대한 골탕 먹이며 목적지로 데려오라. 그 와중에 한두 번 죽으면 더 좋다.
대가는 게임 머니가 아니라 현금. 그것도 상당한 액수였다.
이미 중턱까지 올라왔으니, 목적지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어차피 길이 없어 가장 어려운 곳은 폴리나 산의 저지대. 위쪽은 가파르고 오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시야는 확보되어 있다.
대략 30분 정도 더 산을 오른 끝에 결국 동굴을 찾았다.
‘여기로군.’
동굴은 폴홍길이 설명한 바로 그 위치에 있었다. 동굴 안은 어두워서 그냥은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자 비로소 안쪽 벽이 잘 보였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천마도. 생각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흠··· 애매하네.”
확실히 그냥 말 그림은 아니었다.
발 아래, 마치 바람을 표시한 듯한 물결무늬가 있었고, 좀 모호하지만 머리엔 뿔도 달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깨 부위에 슬쩍 그려진 선이 날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뭔데 그렇게 열심히 보러 온 건지 모르겠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뭐 숨겨진 퀘스트라도 있나?”
남자는 호화찬란한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잘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의 곁에는 우락부락한 남자 십여 명이 서 있었다.
“글쎄. 그걸 알아보러 온 거니까.”
내 대답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 봐?”
“누군지는 모르지만 올 건 알고 있었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마도를 한동안 바라봤다.
“어쩐지 같이 다닌다 싶었더니, 이시연하고 비슷한 짓을 하고 다니는군. 이런데 찾아다니면서 비밀 찾고, 퀘스트 얻는 놀이가 그렇게 재미있나? 난 잘 모르겠던데.”
‘이시연 때문이었군.’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그게 궁금해서 미행을 인지하고서도 모른 척한 거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그 ‘그레잇드래건’이라는 사람인가?”
“내 얼굴을 몰라? 한국 랭킹 21위인데?”
“세계랭킹 21위도 모르는데 한국랭킹 21위를 어떻게 아나? 댓글에 17위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새 한참 떨어졌구나.”
세계랭킹 1, 2위 얼굴은 잘 아는데.
“입은 살았군. 랭킹 산정도 안 되는 초보 주제에.”
“그래서 할 말은?”
“알고 있잖아? 데스티니는 내가 찍었어. 그러니까 꺼져라.”
아니, 대체 아무 관계도 아닌 데스티니와 나를 왜 이렇게 엮지 못해서 난리야.
“직접 말하지 그래?”
“차단당했다.”
“큭!”
허를 찔려서 그만 웃어 버렸다. 생각보다 솔직한 놈이어서 밉지는 않았다.
“웃어?”
“아, 미안. 너무 훅 들어와서.”
“짜증 나니까 뒈져라. 몇 번 죽고 인생의 쓴맛 좀 느껴봐. 가뜩이나 뒤 세계 NPC 고용하느라 고생했는데 시발놈이 쳐 웃고 있어. 너 같은 새끼는 좀 죽어봐야 정신 차리지.”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 * *
“후···.”
그레잇드래건, 한국명 이대용은 동굴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이 담배가 끝나기 전에 저놈은 죽을 것이다. 폴리나의 신전 근처에서 부활하겠지.
그러면 거기서 대기 중인 NPC가 또 죽이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한 열 번만 반복하면 자기가 안 빌고 배길까.
계정 삭제 후 다시 만들면 몰라도 작정한 대용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라 직접 얼굴을 드러냈지만, 평소에는 플레이어나 NPC를 사주해서 여러 차례 해본 일이다. 예외는 없었다.
남자들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끝났나?”
“어, 끝났어.”
이대용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에는 멀쩡한 모습의 아웃사이더가 서 있었다. 주변에는 자기가 데리고 온 NPC 열 명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
“자, 나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만큼 감정이 깊은 것도 아니고. 그냥 오늘 하루만으로 끝낼게. 대신 확실하게 그 몸에 교훈을 새겨주마.”
“네 놈이 감히!”
“구속.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크아아!”
대용은 레벨 200이 넘는 강자. 그 정도에 죽을 리가 없다.
몇 초 지나자, 대용은 구속이 풀리는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역시 강하군.”
마법 저항도 꽤 붙어 있는 것 같다고 아웃사이더는 생각했다.
오히려 좋다.
길게 할 수 있으니까.
“죽여주마!”
“1번, 2번 껴안아.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그냥 꽉.”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1인당 1,000골드라는 거금에 고용한 고레벨의 악당 놈들이 왜 저놈 말을 듣는 거지? 여전히 내 파티창에 같은 편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이 한 번 더 늘었다. 그에 비례해 고통이 커졌다.
“으아아아!”
“야, 시끄러워. 산짐승 놀란다. 산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건 상식 아니냐.”
200은 안 되지만 150레벨은 족히 넘는 놈들 둘을 뿌리치기란 대용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스킬을 사용해서 간신히 뿌리쳤다.
“올가미,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또 한 번 늘었다.
“어이쿠! 죽으면 안 되지.”
“뭐냐! 꿀꺽꿀꺽! 나에게 뭘···.”
아웃사이더는 대용에게 윙크를 살짝 했다.
“포··· 션?”
“걱정 마. 내가 또 이쪽 전문가야.”
“이 미친놈!”
대용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아웃사이더가 빨랐다.
“매혹.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또 한번 늘었다.
대용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저 정도 레벨에 이렇게 마법을 난사하고 마나가 남을 리 없으니까.
“어라, 마나가 부족하네. 3번, 4번 껴안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잡혔다.
몸부림치는 사이 아웃사이더는 마나 포션을 입에 물었다. 울대가 꿀렁꿀렁. 포션 넘어가는 모습에 대용은 울고 싶어졌다.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파이어 월.”
“크아아아!”
벗어날 수가 없다. 저놈 분명히 150레벨이 한참 안 될 거라고 했는데. 스킬을 난사해 자신을 붙잡은 NPC를 먼저 처리했다.
“이 새끼! 드디어!”
“쿨타임 돌았다. 구속.”
아웃사이더는 또 윙크를 날렸다.
“윙크 좀 그만해! 이 미친놈아!”
그러나 아웃사이더는 대용의 절규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한다. 문제없지?”
“.......”
“좋아. 파이어 월···.”
그레잇드래건, 대용이 죽어서 신전 앞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20여 분 뒤의 일이었다.
* * *
“내가 너무 물렀나?”
이걸 열 바퀴는 굴려줘야 몸에 새겨질까 말까 한데. 좀 있으면 로그아웃 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 성질 많이 죽었다. 빈혈이 때만 해도 파이어 월 200번 했는데.”
바닥에 떨어진 전리품을 챙기고 로그아웃했다. 밥 먹고 와서 찬찬히 살펴보자.
점심 식사 중에 김 비서가 슬쩍 다가왔다.
“주인님. 지금 방금 영지 기본 세팅이 완료되었다고 김 집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김 집사?”
“제 게임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게이머 다 됐네.”
“김 집사가 게임 내 아이템 구입비용으로 1,000골드를 요청해 왔습니다.”
“무슨 아이템?”
“의상, 장신구, 소품. 뭐 그런 쪽인 것 같습니다.”
“네가 원하는 건 아니고?”
“아, 아닙니다. 김 집사입니다.”
흠, 게임 안팎으로 고생이 많으니까.
“좋아. 2,000골드로 해.”
“예? 잘 못 들었습니다.”
“2,000.”
“와우.”
“김 집사 2,000 받고 김 비서 용돈 100만 원 추가.”
새 시대를 여는 혁명가이자, 드워프의 구원자, 엘프의 인도자인 나 박서준. 쓸 때는 쓰는 사람이다.
“주인님, 만세!”
김 비서와 김 집사가 섞인 것 같은 반응이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네.
* * *
점심 식사 후 다시 접속하여 폴리나 산으로 왔다.
“이제 좀 조용하네.”
방해자가 사라진 가운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기로 했다. 주변 동굴 벽에는 아무리 봐도 다른 것이 없다.
“분명히 뭐가 있기는 있는데···.”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하나다.
회색 벽에 하얀색으로 그려졌던 천마의 그림이 연한 붉은색으로 점멸했기 때문. 분명히 처음 봤을 때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야, 포니투 나와봐라.”
“이히힝!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어디로 갑니까요?”
“그게 아니고 여기 좀 살펴봐. 뭐 떠오르는 거 없냐?”
포니투는 발굽을 달그락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딘가요?”
“네 간지럼증을 낫게 할 단서를 찾아왔다. 이 그림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게 없냐?”
“히힝! 이게 뭡니까?”
“혹시 이거 유니콘 아닐까?”
“저하고 누님 말고 또 유니콘이 있습니까요?”
“나야 모르지.”
“글쎄요. 이 성의 없는 그림은···.”
포니투는 갑자기 정지버튼이라도 누른듯 멈춰서서 그림을 응시했다. 갑자기 포즈 버튼이라도 누른듯한 갑작스런 정지였다.
“왜 그래?”
“엄마?”
포니투의 눈에 눈물이 확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한 포니투를 보고 좀 어이가 없어졌다.
“뭔 소리야. 넌 알 상태에서 내가 주워다 키웠는데. 엄마를 언제 봤다고 오버냐?”
“주인님은 모릅니다요! 마치 이제는 남아있지도 않은 알끈이 가슴을 꽉 조이는 듯한 느낌! 이건 엄마가 분명합니다!”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순간 벽화가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났다.
“이히힝!”
‘뭐지?’
나는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벽화를 보려고 애썼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어른거렸다.
‘유니콘?’
포니투보다 거대하고, 순백색인데 반쯤 투명한, 그리고 등에 매달린 날개가 선명한 유니콘이었다.
포니투는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엄마!”
진짜였나?
나타난 유니콘은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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