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차에서 내린 사람은 모두 6명. 그중 두 사람은 레이첼 홍과 강한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 중 한 명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물론 직접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은 다 아는 얼굴. HS 그룹 부회장 김현성이다. 병석의 창업주가 죽고 나면 곧바로 회장 자리에 취임할.
“뭐 하는 거냐니까?”
그런 그가 내 집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 아버지. 그게···.”
새끼, 그러게 평소 행실 좀 똑바로 할 것이지. 표정 보니까 뭐라고 해도 안 믿어줄 기세인데?
나를 대할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아버지 보자마자 그게 뭐냐. 꼭 아빠한테 끌려갈 때 포니투 얼굴하고 똑같잖아. 불쌍하게.
“저기, 부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대용이가 제 팬이라고 안 받겠다는데도 자꾸 아이템을 주고 싶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게임 내에서 간신히 돌려세웠는데 결국 집까지 찾아왔네요. 자식, 재주도 좋아.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김 부회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렇습니까?”
“네. 그렇지, 대용아?”
“...네.”
이는 악물지 말고 대답해야지, 자식아. 이 나가면 치과 가야 하는데. 거기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총체적으로 괴로운 곳이라고.
“형은 네 마음만 받을게. 너희들도 대용이 데리고 가라. 나중에 게임에서 보자.”
“네, 네!”
대용과 그 똘마니들은 이미 대용의 아버지를 본 순간, 도망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내가 형이라 한들 자기들이 어쩔 거야. 진짜 형인데.
놈들이 가고 나자 이제 좀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형.”
강한이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화면보다 더 잘생겼다.
젠장.
“네가 강한이구나. 방송 잘 봤다.”
“부끄럽네요.”
“춤 잘 추더라.”
나는 강한과 주먹을 마주쳤다.
“멋있었다. 너는 이미 강한 남자야.”
“.......”
강한의 눈이 좀 붉어지는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엑스마키나 님.”
“고마워요.”
그녀는 다짜고짜 나를 껴안았다. 중년의 여자는 지금 글로벌 기업의 회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머니였다.
결국 누추한 내 집에 세계적 기업의 회장 모자와 국내 1위 대기업 회장을 들였다.
“집이 좁아서 좀 민망하네요.”
“괜찮아요. 나도 젊을 때는 이런 데서 살았으니까.”
레이첼은 창업자니까 그럴지 몰라도, 김현성은 극빈 체험일 텐데.
“아참. 김 비서, 이리 와서 인사드려.”
김 비서는 내 말이 떨어지자, 레이첼 홍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
엑스마키나가 게임 속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듯, 레이첼 홍은 자신의 안드로이드와 교감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이 김 비서의 머리에 가볍게 얹혔다.
“잘 있었니?”
“네. 주인님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좋은 주인을 만나 다행이구나.”
“어머님과 주인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짧은 인사를 나눈 김 비서는 음료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갔다.
“설마 저 친구가 안드로이드입니까?”
김현성이 레이첼 홍에게 물었다. 그 표정은 놀라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네. 현재 저희가 만들어낸 아이 중 최고의 작품이죠.”
“정말 놀랍습니다. 홍회장님에게 얘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자동차와 산업용 기계, 가전까지 안 다루는 것이 없는 대기업 HS의 회장이 직접 레이첼 홍을 모시고 다닐 때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사정은 자기들끼리 얘기하겠지. 하지만 나는 강한이가 궁금할 뿐이다.
“형, 저 한국에서 대학 다니기로 했어요.”
“응?”
캐나다나 미국에 훨씬 좋은 대학이 많지 않나?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있을까?
“이왕이면 형 가까운데 살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런데 나 곧 이사 갈 것 같은데?”
“어디로요?”
“경기도에 단독주택을 하나 샀어. 인테리어 공사 중이다.”
“엄마.”
“그래. 알았다.”
레이첼 홍은 아들이 하는 말을 다 들어줄 기세였다. 하긴 나 같아도 7년 만에 아들이 세상에 나왔으면 뭐든 해주고 싶긴 하겠다.
“아, 그리고 제가 로스트 파라다이스에서도 집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길드 하우스 말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제가 나중에 초대할 테니 시간 나시면 꼭 들러주세요.”
강한이와 레이첼 홍은 한참 동안 머물고 돌아갔다.
게임과는 거리가 먼 김현성 회장은 중간부터 못 알아듣는 말이 너무 많아 대화에 거의 끼지 못했지만, 최대한 친밀한 태도를 유지하며 경청했다. 뭔가 큰 것이 걸려있는 게 분명하다.
“레이첼 홍 회장을 어머니라고 부르는구나?”
“포스 다이나믹스에서 만든 모든 안드로이드는 회장님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레이첼 홍을 거론하는 김 비서의 표정은 더없이 경건했다.
다음날, 또 어머니라 불리는 한 여자의 편지가 게임 속에서 도착했다.
* * *
[네 덕에 우리 터전을 마련했다. 거의 완성이 되어 가는구나. 와 보거라. 네 집도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 아리엘 디아즈.]
아리엘 디아즈.
하이 엘프이며 현재 타이한 제국으로 건너온 모든 엘프의 대모가 보내온 편지였다.
“여기가 어디지?”
서한에 명시된 위치와 지도를 비교해서 겨우 어디인지 찾았다. 나로서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지역이라 지도가 해금되지 않았다.
그곳은 제국령의 서북 방면, 빙룡과 세력을 겨루는 북쪽 지방, 서부 부족연합, 타이한 제국령의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산지였다.
‘자리 잘 찾았네.’
도움을 준 제국령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존에 사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렇다고 제국이 직접 참견하기에는 애매하게 멀다.
나로스에서 살 때보다 조금 추운 지역이기는 하지만 엘프라는 종족이 원래 환경에 잘 조화되는 종족이니까 별 상관없을 테고.
“갑자기 집이 막 생기네?”
영지도 모자라서 엘프족 한가운데 별장이다. 얼른 가서 좋은 입지로 침 발라두자.
⋮
폴리나에서 그리핀을 타고 일단 나잠으로 왔다. 아직 항로가 열리지 않아서 엘프의 마을까지는 육로로 가야 한다.
광활한 초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초원의 모험가.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내가 탄 것이 전동휠이라는 점이다.
“영 폼이 안 나네.”
갑옷 입고 전동휠, 아니 마력휠이라니. 이런 데선 포니투를 타고 질주해야 제격인데.
물론 가까이서 보면 수다와 간지럼증이라는 중병을 앓는 놈이지만 그림은 그게 맞다.
돌돌돌돌돌.
중간에 만나는 야수들 좀 때려잡고, 행상을 만나서 간식도 사 먹고, 절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한참을 달렸다.
“에잇! 거, 없으니까 되게 심심하네.”
그레이는 불러내면 사람들이 알아볼까 무섭고, 빈혈이는 불러내면 몬스터에 쫓기는 거로 오인할까 곤란하다. 물론 탈 것이 없으니까 쫓아오지도 못할 테고.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제 오냐?]
“노친네 성격 한번 급하네. 편지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열심히 가는 중인데요.]
[걸어서?]
[네.]
[탈 것을 보내주려고 했는데 뛰는 것을 즐기는 편인가 보구나. 여기 와서 보니 인간 중에는 아침이고 밤이고, 아무 목적 없이 뛰는 자들도 꽤 있더라만.]
“아, 그럼 그것부터 말해주지!”
나는 아무 목적 없이 나가서 뛰다간 개의 오줌 세례를 받는 종류의 인간이다.
[안 즐깁니다! 보내 주세요!]
[좌표.]
대모님 말투가 상당히 힙해지셨네.
좌표를 찍어주고 길가에 한 십분 앉아 있었더니 무언가 날아왔다.
흔히 보던 그리핀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깃털이 화려하고 좀 더 새에 가깝게 생긴 그것은···.
“히포그리프?”
히포그리프 위에 탄 것은 나로스에서 만난 미남 엘프 도리언이었다.
“인도자님!”
도리언은 채 착륙하지도 않은 히포그리프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인도자 님을 뵙습니다.”
와··· 폼난다. 잘생긴 사람, 아니 엘프는 무릎만 꿇어도 그림이 되는구나.
“어, 도리언 오랜만이에요.”
“어서 타시지요. 대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히포그리프는 상당히 큰 녀석이라 둘이 타도 충분했다.
“이 히포그리프는 어디서 난 거예요?”
“저희가 자리 잡은 지역에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공격적이지 않아서 금방 길들일 수 있었고요.”
원래 에우로파 대륙에 살던 놈들이었군. 나는 새삼 아직도 내가 로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날아다니는 건 꿈도 못 꿨는데 여기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히포그리프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도리언은 즐거워 보였다.
“좋아 보이니 다행이네요.”
“이게 모두 인도자님 덕입니다.”
비행은 길지 않았다. 계속 전동휠을 타고 왔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겠지만, 날아오니 십 분이면 충분했다.
내가 도착하자 마을 주민인 엘프 모두 반갑게 맞이해줬다. 이것이 바로 인도자의 위엄인가?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늘씬한 미남미녀 사이에 홀로 낀 오징어 같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려웠다.
‘너무 자주 오지는 말아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리언이 이끄는 집으로 들어갔다.
“왔구나.”
“대모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리엘의 모습은 처음 볼 때와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귀 뚫으셨어요?”
“수도에서 유행하더구나.”
“그 짧은 치마는···.”
“수도의 젊은이들이 많이 입더군. 내 나이도 어느덧 900살이 넘었다. 이제 살아봐야 한 백 년 더 살면 갈 텐데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봐야지. 왜, 너도 잔소리하려고 그러느냐?”
그 말에 도리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가 잔소리했는지는 잘 알겠다.
“아뇨, 예쁜데요.”
빈말이 아니라 저러고 가면 클럽을 뒤집어 놓으시겠다.
가서 헌팅당하고 나이도 좀 속이고. 좋잖아? 900살인 것만 안 들키면 된다.
“그렇지? 도리언 얘는 200살밖에 안 먹은 애가 꽉 막혀서는.”
“대모님···.”
“그러고 보니 사는 곳도 좀 달라진 것 같은데요?”
낙원 온라인 시절에 엘프가 사는 곳은 나무를 변형시켜 거주 공간을 만든, 말하자면 다람쥐 집 비슷한 곳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완전한 집 형태. 제국의 영향은 받은 것이 분명한 건축 양식으로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 ‘집’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역시, 용사 출신이라 척하면 척이로구나. 도리언, 나가서 인도자에게 집을 안내해 드리려무나.”
“예, 대모님.”
도리언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와 문을 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죄송합니다. 인도자님 앞에서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대모님이 굉장히 활기를 되찾으셨네요.”
“그건 좋은 일입니다만, 연로하신 대모님이 저러시니 건강이라도 상할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그 연로하신 대모님이 저보다 훨씬 오래 살 것 같은데요.
“이리로 오시죠. 집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도리언은 나를 숲 가운데로 이끌었다. 숲 가운데 공터가 있어 채광이 좋은 곳이 있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건축양식의 집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예전처럼 나무 위에 지어진 것들도 많아서 나름 신구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도자님은 예전 방식의 집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땅 위에 지은 요즘 방식이 좋으십니까?”
선택의 기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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