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예전 방식은 일단 재미가 있다.
어릴 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나무 위에 내 비밀 기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엘프의 옛 방식은 그 꿈을 이루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낙원에 있을 때 엘프의 집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생각이 나서 재미있었다.
다만 올라가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새로운 양식은 한마디로 말해 그럴싸하다.
이쯤은 되어야 기지 수준을 벗어난 집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나중에 인간 플레이어가 와서 보면 우쭐대기도 좋고.
엘프의 도시 중심부에 집이 있는 플레이어. 그것이 바로 스웩이다.
“대모님 말씀대로군요. 고르기 어려우시죠?”
“그렇군요.”
“인도자님은 용사님이기도 하시니 옛 방식에도 미련이 있을 거라고 하셔서 둘 다 준비해 봤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뭐야, 뭐야.
엘프는 뭐 미리 얘기 안 해주는 게 종특인가?
둘 다 준비했으면 고민 안 하게 미리 말해주지. 히포그리프 때는 좀 열받았지만, 이번 거는 되게 마음에 드네.
“보시다시피 여기는 새로운 양식의 집입니다. 하지만, 여기를 열고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면 2층이 나옵니다.”
“오! 재미있네요.”
“그럼 편히 둘러보시길. 저는 좀 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대모님이 만찬을 준비하라 하시더군요. 시간 되십니까?”
“기꺼이 참석하죠.”
이층집을 주고 저녁도 준다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뉴 스타일.
대모님의 패션처럼 새롭게 태어난 뉴 타입 엘프 하우스 1층과.
2층이라더니 적어도 15미터는 되는 나무 위의 집을 오가며 희희낙락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인도자님.”
“예!”
“많이 좋으셨나 봅니다. 혼자 춤도 추시고.”
“······.”
최근에 갑자기 현실의 집, 게임의 영지가 생겨서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별장은 별장 나름의 감동이 있었다.
“못 본 척해주시죠.”
“기뻐해 주시니 도리어 감사할 뿐입니다.”
도리언을 따라 집 밖에 나갔더니 중앙 공터에 엘프가 한가득 모여 음식을 차리고 앉아 있었다. 마을에 있던 엘프는 다 나왔나 보다.
“모두 하나 되어 잔을 들자.”
대모의 선언에 엘프들이 일제히 잔을 들었다. 낙원 시절에도 있던 과실주 엘븐 펀치. 과연 로파의 맛 재현력은 어떠할까?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기리고.”
어두워진 숲에 은은한 달빛이 부서졌다.
“인도자에게 축복을.”
중앙에는 샐러맨더 몇 마리가 꿈틀거려 온기를 더해주고, 실프가 유영하며 기분 좋게 그 온기를 날라 주었다.
“새로운 엘븐하임이여, 영원하라.”
“영원하라!”
나는 엘프들이 하는 대로 과실주를 한 모금 마셨다. 새콤달콤. 깊고 은은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과일과 식물성 요리도 맛이 있고. 비건들이 좋아하겠네.
“어때, 입에 맞으냐?”
“네.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요?”
“그래? 거래라···.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이사까지 온 마당에 못 받아들일 것도 없겠지.”
“하지만 만들 수 있는 양이 적습니다, 인도자님.”
도리언은 난색을 표했다.
“많지 않은 편이 더 좋죠.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양을 제한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불만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건 아주아주 비싸게 팔면 해결됩니다.”
“어째서 그러하냐?”
인간이란 동물이 그렇습니다, 대모님.
“어설프게 비싼 것이 사기도 어렵다면 불만을 가지지만, 엄청나게 비싸면 오히려 희소성이 높을수록 좋습니다. 갖지 못해 안달이 나는 법이거든요.”
“이해는 안 되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처음부터 명품 전략을 써서 포지셔닝을 하고··· 그렇지! 대모님이 아예 모델로 나서는 겁니다.”
“내가?”
“대모님은 소녀미와 성숙미를 동시에 갖춘 흔치 않은 모델. 거기에 터전을 잃고 이주해 올 수밖에 없었던, 우수에 찬 눈빛을 한 방울 첨가하는 겁니다. 그런 대모님이 ‘엘븐하임의 숨결을 느껴보세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아리엘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수도에서 좀 산다 싶은 처자들은 엘프제 물건을 하나라도 갖기 위해 혈안이 될 겁니다. 어머, 이건 가져야 해.”
아, 그만 직업병이 도져버렸다. 홍보와 마케팅 부서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나.
결코 엘프의 수입 0.1퍼센트가 내게 떨어지기 때문에 신난 것이 아니다.
“진짜로?”
“장담합니다.”
엘프에겐 희망을, 나에게는 수수료를.
서로의 니즈가 맞아떨어진 만찬 자리가 길어졌다.
“대모님, 혹시 ‘죽은 이의 여왕’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어요?”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나로스를 그렇게 만든 원흉이라고는 하던데.”
“만나본 적도 있으실까요?”
“아니. 우리야 원체 타 종족과 교류가 적었으니까. 드워프는 어떤지 모르겠구나. 인간과 교류가 깊었으니 좀 알지 않을까?”
“하얀 기사는요?”
“그건 또 누구냐?”
“죽은 이의 여왕에 맞서는 저항군이라고 하던데요?”
“전혀 모르겠구나.”
혹시 영한이가 퀘스트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물어봤는데 별 소득이 없었다.
“인도자님. 드워프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가 인도자님을 접대한 후 그쪽에 모셔 드리기로 했으니 가서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방문해야 하는구나.
아무래도 내가 두 곳을 다 방문해야 정착이 끝나는가 보다. 그러면 두 종족이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정식 종족이 되겠지.
로그아웃 시간이 되어서 내 엘븐하임 별장 2층의 침대에 누워 로그아웃했다.
다음날, 엘프의 배웅 속에 뉴 엘븐하임을 떠났다. 내가 탄 히포그리프는 이미 길을 아는지 거침없이 날아 어느 산맥 아래에 나를 내려주었다.
“야, 여기가 어딘데?”
히포그리프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볼 뿐. 한동안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히포그리프는 그대로 떠나갔다.
“야! 여기 맞아?!”
퍼덕퍼덕
무심한 히포그리프는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떠나갔다.
“저, 저 새대가리, 저거.”
뉴 엘븐하임의 번영을 위해서는 히포그리프의 조련에 조금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다.
안락한 여행경험은 보다 손쉽게 지갑을 열게 하니까.
“큭큭. 저럴 때 보면 그냥 기계가 낫지, 안 그래?”
“그룸!”
저 수염 부숭부숭한 아저씨가 이리도 반가울 수가.
“좌표를 다시 알려줬는데, 역시 지난번에 도리언이 왔던 곳과 똑같은 자리에 내려줬군.”
“여기서는 엘프와 교류가 빈번한가 보네요?”
“빈번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나로스에서보다 나은 정도지. 아무래도 사는 환경이 다르니까 자주 보기는 어려워도, 우리 두 종족 다 여기서는 이방인 아닌가.”
그룸은 나를 산 안쪽으로 인도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정신없었지. 공석인 뮈르크 다시 선출하고, 마을 위치 선정하느라 한참 걸렸어. 아무래도 니다벨리르만큼 커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 온 동족이 적지 않으니, 처음부터 터전을 제대로 된 곳에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죠.”
“적당한 광맥을 찾아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네. 마을은 아직 건설 중이라 어수선할 걸세.”
암반으로 가려진 굽잇길을 돌아서자, 마을이 나타났다. 산기슭에 광산으로 보이는 거대한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있고, 그 좌우에 건물이 한창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이건, 마을 수준이 아닌데요?”
“숫자가 많으니까.”
뛰어놀던 드워프 아이들이 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뮈르크 님, 구원자님 안녕하세요?”
“구원자님, 감사합니다!”
엘프와 달리 드워프 종족에는 아이들도 많았다.
“뮈르크? 지금 그룸한테 한 말 맞죠?”
“그렇게 됐네.”
나는 엘프의 대모와 함께 식사하고, 드워프의 지도자가 마중 나오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야··· 출세했네요, 그룸.”
“이게 다 자네들 때문 아닌가. 그때 자네들을 발견해서 잘 대처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돼 버렸어. 에잉, 자기들이 귀찮으니까 나한테 떠넘기고.”
“싫은 겁니까?”
“싫지. 나는 그냥 망치나 뚱땅거리면서 살고 싶은데. 보라고, 당장 고민이 생겼어. 건설과 마을 유지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나.”
그룸은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을이 크긴 크다. 이 터에 건물이 다 들어서면 그건 그냥 도시다.
“학교를 먼저 지으시죠?”
“학교?”
“네. 기술학교요.”
“자세히 좀 말해 보게.”
나는 그룸과 함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드워프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기술력 아닙니까? 건축, 채광, 대장, 제련, 석조 공예, 금속 공예, 기계 공학까지.”
“물론, 그건 자신 있네.”
“쏠레 시티에 대학교 있는 거 아시죠? 거기는 전반적인 순수 학문을 가르칩니다. 반면에 여기서 짓는 학교는 전문 기술을 가르치는 겁니다. 졸업생에게는 드워븐 마이스터 자격증도 발급하고.”
실습을 위해 건축이나 채광에 투입하는 거지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것은 절대 절대 아니다.
“그러다 보면 드워프 제품을 취급하는 대형 상점도 들어설 거고, 인간과 대규모 거래도 생기겠죠. 어떻습니까?”
“크하하! 역시 자네는 드워프의 구원자일세!”
그룸은 기분이 좋아져서 나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최고 지도자가 되었어도 사는 집은 투박했다.
“자! 맥주 한잔하게.”
그룸이 내놓은 까맣고 쌉쌀한 맥주를 맛봤다.
“이것도 팔아도 되겠네요. 기회가 되시면 도리언하고 얘기해서 양조공장도 하나 지으시죠. 엘프는 과실주, 드워프는 맥주. 두 가지 라인으로.”
“엘프의 술이 어디 술인가?”
“그 술과 이 맥주는 소비층이 완전히 다를 거예요. 같이 브랜딩하면 서로 상승효과가 일어나면 일어났지, 시장이 겹치지는 않을걸요?”
“거 참, 그런 달달한 음료를 술이라고 마시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절 보세요. 둘 다 좋아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예요. 뭐 하나만 좋아할 수는 없는 존재죠.”
“그렇군.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테지. 알겠네. 도리언과 상의해 보도록 하지.”
그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룸.”
“음, 왜 그러나?”
“혹시 ‘죽은 이의 여왕’이라고 들어 봤어요?”
“들어보기만 했겠나.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는데.”
“진짜요?”
“동족이 전부 잠들고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일세. 정찰 나갔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좀비 무리가 북쪽으로 가는 것을 봤다네. 무슨 일인가 싶어 망원경으로 봤더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가마 위에 타고 있었지. 상상이나 해봤나? 그 가마를 끄는 것은 좀비였어. 그놈들이 누구의 명령을 듣는다는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좀비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 죽은 이의 여왕이 확실하겠군.
“그런데 말이지, 갑자기 그여 자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고 씩 웃었네. 망원경으로 봐야 겨우 보이는 거리에서! 부끄럽게도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네. 너무 무서워서 그 길로 도망치고 말았지.”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친다.
“얼굴은 봤습니까?”
“뒤에 생각해 보니, 얼굴 자체는 그냥 평범했어. 인간 기준으로 예쁜 편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었지. 다만 얼굴은 창백해서 꼭 죽은 사람 같았다네.”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글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데.”
자존심 강한 드워프의 정신을 이토록 위축시킬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그 여자의 무서움을 알겠다.
“하얀 기사는요?”
“그건 모르겠는데. 용사인가?”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아마 아니겠죠.”
좋아. 단서를 찾았으니 나중에 영한이한테 알려줘야지.
“궁금한 건 다 끝났나?”
“네.”
“좋아,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있네. 주는 것 없이 자꾸 시키기만 하는구먼.”
“뭡니까?”
“쏠레 시티에 가서, 편지 하나만 재상 마르크에게 전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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