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
“아빠, 여기는 좀비가 훨씬 많아.”
“그렇구나. 조심하자.”
그리 길지 않은 골목이다. 여기에는 클랜 하우스 몇 개 외에는 별것이 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이렇게 많은 좀비가 몰려있는지 모르겠다. 얼핏 봐도 백 구는 되어 보였다.
“이렇게 하자.”
“어떻게?”
“여기는 내가 혼자 들어갈게. 미영이는 여기서 에드윈, 그레이하고 기다려.”
“아빠 혼자 가면 위험하잖아?”
훗, 귀여운 녀석.
내겐 시바 교수가 떠먹여 준 ‘병풍’이라는 엄청난 스킬이 있단다.
“나는 괜찮아. 쟤들은 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할 거야.”
“진짜?”
“그럼.”
“대단하다! 그런 기술은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어?”
“나는 학교에서 배우긴 했는데, 다른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네.”
“나도 학교 가고 싶다!”
얘기가 이렇게 흐르면 대답이 곤란해진다. 나는 얼른 일어났다.
“그레이, 에드윈. 미영이를 부탁한다. 잘 숨어있어.”
“걱정 마라.”
“마스터, 숨어 있기만 할거라면 나는 마스터를 따라 나가서 한바탕 해도 되지 않아?”
“아니, 미영이 잘 지켜.”
나는 한사코 도움을 거부하고 일어나서 병풍을 켰다.
“어, 진짜 아빠가 안 보여!”
“여기 있잖아.”
병풍은 에드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레이에게는 통하는군.’
장담컨대 좀비 따위가 나를 알아볼 일은 없다. 게다가 칭호 ‘미친개’ 때문에 선공도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위험할 일은 없는 것이다.
“간다.”
나는 여유 있게 골목으로 나갔다.
어슬렁거리는 좀비의 뚝배기를 깨는 일은 손쉬운 일이다.
-콰직! 콰직!
한 방에 죽지 않아도 병풍의 효과 때문에 나를 찾지 못하니 이보다 쉬운 일이 있을까?
한 70구 정도 없앤 후에는 마나가 간당간당해서 병풍은 해제했지만, 그 정도 숫자를 줄였으면 이제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슬슬 끝내볼까.
“체인 라이트닝!”
남은 마나를 모아 마법을 갈기고, 뒷정리를 위해 메이스를 움켜쥐는 순간.
-쾅!
뭔가 박살 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미영이가 숨어 있는 곳이다.
“미영아!”
경비대 갑옷을 갖춰 입은 좀비가 나타났다.
“마스터! 막아줘!”
그레이가 미영이를 안고 튀어나왔다. 미영이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감히!”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고작 좀비 따위가.
“죽어!”
보통 좀비는 아니었다. 내 일격에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가까이서 본 검게 죽은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기도 했다. 이 초보 마을의 경비대장.
하지만 그뿐.
-쾅! 쾅! 콰직!
한 번으로 안 되면 여러 번 때리면 된다. 나는 사정 볼 것 없이 경비대장의 투구를 뭉개버렸다.
“미영이는!?”
나는 그레이가 도망친 곳을 바라봤다.
“아빠, 나 괜찮아. 살짝 까진 거야.”
미영이는 에드윈을 끌어안고 그레이의 품에 안겨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레이의 손이 빛나면서 힐링 마법이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레이, 이제 그만해.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응.”
미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아빠.”
미영이가 다가와서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미안해. 내가 궁금해서 머리를 내밀었어.”
미영이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나는 그제야 화가 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 되겠다. 빨리 정리해야지.”
활을 꺼내서 남은 좀비를 정리하고 루팅까지 마쳤다.
백여 구의 좀비에게서 276골드를 거두어들였으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른 해치우고 나가야지.’
이 골목에 있는 집 중 문이 잠긴 것은 세 채.
문이 잠겼다는 것은 클랜 하우스 용도로 쓰이는 집이라는 뜻이다. 나머지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주인 없는 집이다.
빈집에 들어가서 안에 돌아다니는 좀비부터 다 해치웠다. 위험 요소는 없다.
“휴···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남은 것은 문이 잠긴 세 채의 집. 포커 카드 쪼는 느낌으로 우리 하우스 말고 다른 곳부터 가보기로 했다.
-철컥!
대체 이 만능열쇠는 어떻게 만들었길래 안 열리는 문이 없나. 단단한 철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공기가 퀴퀴했지만, 그것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서 들어와.”
미영이와 그레이가 들어온 뒤엔, 뭐가 따라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문도 닫았다.
‘우리 하우스하고 생긴 게 똑같네.’
남의 클랜 하우스에 들어와 보는 일은 처음이다. 벽에 걸린 클랜 휘장 말고는 가구 배치며 인테리어 등 모든 것이 같았다.
“허.”
그런데 금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부에는 동전 하나 없이 텅텅 빈 상태.
“마지막이라고 아예 금고 개방하고 다 탕진해 버렸나?”
이런 식이라면 다른 곳은 가볼 필요도 없는데. 조금 불안해졌다.
두 번째 클랜 하우스의 금고는 닫혀 있어서 만능열쇠로 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돈은 없었고, 누가 쓰던 것인지 모를 활이 하나 남아 있었다.
“이게 뭐였더라?”
그때는 내가 활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건 나중에 감정해 보고.’
드디어 우리 클랜 하우스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우리 클랜 금고에 있던 돈은 많을 때는 100만 골드, 아무리 적어도 10만 골드는 항상 있었다.
오로지 그것만 보고 견뎌온 게임 생활이다.
“드디어.”
제발 쓸데없는 아이템들 말고 골드로 넘쳐나기를, 제발.
“미영아, 파이팅 한 번만 외쳐 줄래?”
“응? 왜?”
“나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래.”
“응, 알았어. 아빠, 파이팅!”
“좋았어! 가즈아!!!!”
에드윈이 혀를 끌끌 찼지만 무시했다. 나는 지금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길드 금고는 내가 손을 대자마자 찰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쇠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모든 권한을 가진 내가 있으니까.
“이게 다 뭐냐?”
샴페인, 폭죽, 케이크, 풍선, 메가폰, 폭탄(모형), 알약
꺼내면 꺼낼수록 이상한 것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은, 그 모든 것을 다 알아보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케이크는 먹는 것이 아니라 투척용이다. 그리고 이 풍선은 음성변조 풍선. 폭탄은 더 쓸모없는 것인데 손잡이를 돌리면 정확히 5초 후에 어마어마한 방귀 소리를 낸다. 다행스럽게도 냄새는 안 난다. 알약은 5초간 내 원래 크기의 두 배로 커지는 약이었다.
‘이걸 어디서 써 봤더라?’
클랜의 금고는 그런 쓸데없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템이라고 쓰고 쓰레기라 읽는 것들을 다 꺼냈더니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아, 안 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마스터?”
[파티 개최 제안서]
[작성자: 아이는애기공듀
서버 종료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호화찬란 럭셔리 블링블링 파티를 제안합니다!
다 같이 힘내서 신나게 놀아요!
우리는 정식 오픈 후에 반드시 다시 만날 거니까.]
생각났다.
서버 종료 2주 전에 이 제안서를 받았다. 영한이도 그렇고 클랜원 모두 동의해서 흥청망청 파티를 열었더랬지.
최연장자 형님 두 분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유독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보석 세공 만렙 만든다고 바빠서 대충 허가한 뒤 금고 권한을 넘겨줬었다.
파티에는 잠깐 참석했다가 또 나가서 보석 세공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렙 반지를 만들어서 대차게 까였지.
“김미영, 이 나쁜 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왜 나 잘되는 꼴을 못 보냐.
“아··· 빠?”
“떼끼, 이놈!!!! 미영이더러 년이라니! 어디서 그런 막돼먹은!!”
“아니, 아니. 미영아 내가 지금 말한 김미영은 너와 다른 사람이야. 너는 박미영, 박미영이야. 이름만 같아. 김미영은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야.”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진정하자.
아직 금고는 비지 않았다.
더 뒤졌더니 갑옷 세트 두 개와 검 등 장비가 튀어나왔다.
이런 만렙 50 레벨짜리 장비는 필요 없지만 또 모르지,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가져가면 적당한 가격에 팔 수 있을지도.
하도 잡템을 많이 주웠더니 자리가 없어서 일부는 미영이한테 넘겼다. 산장에 가서 지하실에 가져다 두라고.
나는 아직 배고프다.
원하는 것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
“으아아, 제발!”
잡동사니, 쓰레기, 잡템이 한 무더기 나온 뒤에 드디어 주머니가 나왔다.
“떴다!!!!”
“아빠, 왜? 좋은 거야?”
“좋지, 좋고말고!”
나는 미영이를 안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 이것은 돈주머니가 분명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낙원의 돈주머니 최고액은 1,000. 그렇다면 배가 빵빵한 이 주머니는 1,000골드에 불과하다.
‘더 있어야 해.’
미영이를 내려놓고 금고를 뒤졌다.
“아예 들어가라, 들어가, 이놈아.”
“마스터, 나 좀 부끄러우려고 해.”
있었다.
‘하나, 둘, 셋···. 전부 17개.’
17,000골드.
분명 엄청난 액수임이 틀림없지만 아쉽다. 적어도 10만 골드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다.
몹시 아쉬워.
“좋은데 너무너무 아쉬운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빠가 왔다가 금방 가 버리는 느낌!”
“······.”
“그래도 괜찮아. 금방 갈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오래 있잖아. 분명히 안 아쉬울 때도 있을 거야.“
그렇구나.
나의 낙원 탐사는 끝난 게 아니니까.
“계속 가보자.”
미영이 덕에 깨달음을 얻고 마을회관 쪽으로 탐사를 계속했다. 빠르게 정리하면서 이동하니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이 마을에는 왜 은행이 없는 거야.”
그것만 있었으면 길드 금고 따위 필요도 없는데.
“원래는 참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겠네.”
그레이의 질문에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랬지.”
작지만 평화롭고 활기찬, 좋은 곳이었어.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마을회관 앞에 좀비가 돌아다니는 이런 날 말이야.
“그레이, 정리 좀 해줘.”
“알았어.”
마나가 다시 차는 동안 그레이에게 좀비를 처리하도록 했다.
“아빠, 여기는 사람은 없는 거지?”
“아마도.”
“어디에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글쎄. 잘은 모르겠다.”
산 사람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사가트와 비교해 보면 그래도 분명히 상황이 좋은 편이다. 멀쩡한 인간을 여럿 만났으니까.
물론 처음 만난 샘은 나를 아들의 먹이로 주려 했고, 다른 놈들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산적이었지만.
“농장에서 발견한 편지 얘기해줬지?”
“응.”
“어딘가 분명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거야. 여기 다 정리하면 브리엄으로 가보자. 거기도 없으면 또 다른 곳도 가보고.”
“아빠 말이 맞아. 계속계속 찾다 보면 있을 거야!”
“그래.”
미영이는 나보다 씩씩하다. 만 칠천 골드를 얻고도 좌절하는 나보다 훨씬.
“마스터! 다 끝났어!”
“알았어. 간다.”
남은 것은 마을회관뿐. 여기만 정리하면 클리어 판정이 뜰거다. 그러면 분명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을테지.
진짜 모험은 여기부터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찰칵
마을회관 문을 따고 들어갔다. 사가트 때와 달리 회관 안에는 좀비가 꽤 있었다.
나는 사무원 지미와 제인 등, 반가운 얼굴을 몇몇 깨부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 문제의 그 캡슐을 발견했다.
냉기와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운을 풀풀 풍기는 그것 앞에는 한 노인이 엎드려있었다. 마치 지극한 사랑과 경배를 바치는 듯이.
노인은 내가 올라가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영아, 내 뒤로.”
삐그덕삐그덕.
노인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노인은 캡슐을 잠시 지켜보는 듯하더니 갑자기 돌아섰다.
“남작?”
흐려진 눈. 핏기 없는 깡마른 몸.
내가 알던 통통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졌지만, 그는 이곳의 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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