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입대
“서준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과몰입 증후군이야. 나하고 병원부터 좀 가보는 게 좋겠다.“
“그래요. 오빠. 얼른 로그아웃하고 나와요.”
자식들, 누구보다 몰입 중인 세계 랭킹 1, 2위가 누구더러 과몰입이래.
“알았어. 그전에 일단 따라와 봐.”
나는 산장 지하실로 가는 바닥 문을 열었다.
“뭐야, 이거. 이런 데가 있었어?”
영한은 나를 따라 내려오며 두리번거렸다.
지하실에는 온갖 물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연은 그중 밀키트 하나를 집었다.
“이건 요즘 물건이잖아요?”
“그러네. 서준이, 네가 가져다 놓은 거냐?”
구석에 냉각용으로 잘 사려놓은 쇠사슬은 녹슬어 있었다. 나는 휴게실로 통하는 문이 있는 벽을 가리켰다.
“너희 저 벽 보여?”
“저건 뭐야? 감옥이냐?”
“그거 말고 보이는 거 없어?”
“뭐 말하는 거예요?”
“환각도 보냐, 너?”
두 사람 다 씨크릿 포인트는 보지 못했다.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되는지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파티원을 데리고 휴게실로 들어가 보자.
안되면 말고.
나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벽을 향해 걸어갔다.
“왜 이래, 징그럽게.”
“오빠, 거기 벽인 거 알고 있죠?”
“믿고 따라와 봐.”
성큼성큼.
“어, 어. 부딪힌다. 야, 야!”
두 사람의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 세 사람은 휴게실로 무사히 들어왔다.
“어?”
“서준 오빠, 이게 대체 뭐예요?”
다행이다.
되는구나.
“두 사람한테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있어. 아주 긴 얘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
로그아웃 시간이 되었다.
결국 영한과 시연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긴 얘기를 하기에는 나도 그편이 좋을 것 같다.
* * *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음. 영한이하고 시연이 오기로 했거든. 손님 준비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시연과 영한은 금방 도착했다. 저녁을 겸한 음식과 술을 곁들인 자리에서 시작한 내 얘기는 밤이 늦어서 끝이 났다.
처음 낙원에 끌려갔던 때부터 미영이와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나는 그간 숨겨뒀던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았다.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 거다.”
“미영이가 불쌍해요.”
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휴지로 찍어냈다.
“허, 참. 이거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믿지 않는 것 같아서 중간에 스타코인 계좌도 보여줬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곤란했겠지만, 믿을 만한 두 사람인 데다가 그 정도 돈은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부자니까.
“그러니까, 우리 클랜원이 다 같이 모은 골드를 독식해서 월 2억을 벌게 된단 말이잖아. X나 부럽다.”
“2억 아니고 일억 칠천 정도라니까.”
취소다.
부자도 부러워하는구나.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그 캡슐에 들어있던 게 죽은 이의 여왕 같지 않냐?”
로스트 파라다이스 뉴 에라의 메인 스토리 주인공인 두 사람, 하얀 기사와 죽은 이의 여왕.
“그렇다면 결국 죽은 이의 여왕을 깨운 것이 나였다는 소리인데.”
나만의 싱글 게임이라며 좋다고 낙원을 돌아다녔다.
돈 몇 푼에 신나 하면서.
‘몇 푼··· 은 아니지만.’
그게 죽은 이의 여왕에게 놀아난 결과로 돌아왔으니, 스스로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난다.
영한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과몰입이라고 할 수만은 없겠구나.”
“그러네요, 저라도 이렇게 됐을 것 같아요.”
“이해해 줘서 고맙다.”
“대신 시간제한만 좀 하자, 콜?”
“아니, 이해한다며.”
영한은 김 비서에게 손짓했다.
“김 비서, 잠깐 이리 와 볼래?”
“네.”
“네 생각은 어때?”
“저도 동의합니다. 절반으로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야! 야! 삼 분의 이! 더는 안 돼!”
“받고 매일 산책 한 시간.”
김 비서야, 너 지금 강아지 조련하니?
김 비서에 이어 시연도 나섰다.
“제 캡슐 여기 하나 더 놓을까요?”
“뭐?”
“김 비서 혼자면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저도 어차피 길드 해체했기 때문에 요즘은 집에서 게임 하거든요.”
“복 받은 새끼···.”
영한과 시연은 새벽녘에야 돌아갔다.
시연의 동거 아닌 동거 제안은 간신히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아직은 혼자인 쪽이 마음 편하다.
영한은 가기 전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레벨을 공개했다. 그의 레벨은 279.
그 얘기를 듣고 시연은 어떻게 더 벌어질 수가 있냐면서 충격을 받았다. 시연이 공개한 레벨은 264.
3위권이 250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예측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어나더 레벨인 둘이다.
그에 비하면 내 레벨은 145. 그나마 나로스에서 이 며칠 발악을 한 덕에 오른 거지, 유유자적 영지 생활을 즐길 때만 해도 136이었다.
‘죽은 이의 여왕 잡고 싶지?’
‘어.’
‘그렇지만 네 지금 레벨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영한은 여왕의 숙적으로 설정된 하얀 기사와 대련을 떠올렸다. 270이 넘는 그가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했다.
‘나는 레벨업에 매진할 거야. 목표는 350.’
그야말로 상상도 가지 않는 목표였다.
‘내가 레벨업하면서 죽은 이의 여왕을 무찌를 퀘스트를 찾아볼 테니까, 너는 오로지 레벨업에만 매진해라. 그래야 여왕을 잡고 나로스에 평화를 찾아오겠다는 미영이의 꿈을 대신 이룰 수 있지 않겠냐. 네 레벨로는 그 밥상에 숟가락은커녕 젓가락 한 짝도 못 올린다.’
잔인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동 레벨 최강’, ‘레벨 대비 엄청난 공격력’ 따위로는 만족해서는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네.’
진인사대천명.
레벨업하면서 기다린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은 이의 여왕을 잡는 거다.
그것만이 나의 미영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 * *
“이봐, 마이러브! 아, 거 이름 참 적응 안 되네.”
“마이러브가 아니라 엠와이러브라고 몇 번 말하냐.”
“그거나 그거나.”
My Love가 아니라 MY Love.
-부우웅!
휘두르고 있던 연습용 목검이 바람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대머리 남자의 눈앞에 멈췄다.
“이봐, MY는 마이가 아니라 ‘미영’의 약자라고. 다음부터는 조심해. 뒈지기 싫으면.”
기겁해서 넘어진 남자가 간신히 용건을 떠올렸다.
“아, 알았으니까 어서 가봐. 대장이 불러···.”
나는 목검을 바닥에 던지고 돌아섰다.
빙룡 벨디브 세력과의 전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이곳 북부 전선.
나는 그곳에서도 가장 전방 부대, 그리고 그 부대에서도 전위를 담당하는 뱅가드, ‘흑건’ 용병단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검은 두건, 부대 표식으로 ‘흑건’을 착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려고 했는데.’
성장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입대했다.
레벨업으로 치면 나로스가 가장 조건이 좋을 것이다. 거기는 필드에 나타나는 몬스터 레벨이 높고, 정예의 비율이 높으니까.
타이한 제국령에 나타나는 필드 몬스터 중 정예는 필드 보스급 뿐으로 그 숫자나 출현 확률이 상당히 떨어진다.
다만, 나로스는 여전히 캐릭터 삭제의 위험이 있고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아 체계적인 레벨업이 어렵다.
의욕적으로 나로스에 덤벼들었던 플레이어 중 많은 수가 그런 식으로 캐릭터 삭제를 당하거나,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아 나로스 공략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이곳, 북부 전선 최전방이다.
빙룡 벨디브의 부하들이 끝없이 나타나므로, 나로스에 건너가지 않고도 심심치 않게 정예부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가 있다.
‘동료라기보다는 방패?’
어그로를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 내가 살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나는 200까지 이곳에서 레벨을 올리고, 그 이후에 나로스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중에서도 사망률이 높아 플레이어가 잘 지원하지 않는 ‘흑건’ 용병단에 지원한 것은, 그곳에서는 가명을 써도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도 가명으로 신분을 속이고 근무하며 높은 봉급을 받는다.
나도 지나치게 알려진 이름을 잠시 봉인하고 ‘MYLove’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게다가 다양한 몬스터를 집약적으로 상대해 볼 수 있으므로 좋은 경험이 된다.
막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남자가 나를 불렀다.
“이봐 엠와이.”
용병대장인 프란츠.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멋진 흉터를 가진 중년 남자가 이 용병단의 대장이다.
“왜 불렀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는 용병단답게 상당히 평등한 구조다. 그래서 대장에게도 격의 없이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명을 거스르는 일은 없지만.
“등급은 많이 올랐나?”
“뭐 조금.”
“얼마나?”
“십 등급 정도요.”
이 부대에 들어오기 전, 렙제 150인 드워프제 장비를 사용하려고 적당한 던전을 돌면서 4레벨, 여기 와서 10레벨을 올렸으니 이제 내 레벨은 160이다.
“오우.”
프란츠는 얼굴에 둘렀던 검은 복면을 풀었다.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턱 부근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정말 금방 실력이 느는군.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비결이라도 있나?”
비결은 무슨.
플레이어가 극히 적고 NPC가 대부분이니까 거침없이 막타를 주워 먹어서 그렇지. 어디 마다할 필요가 있나.
“용건이 그겁니까?”
“급하기는. 들어보라고.”
프란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제국 제일의 미녀 이사벨 황녀를 아나?”
“이름은 들어봤죠.”
그 미끈한 황제의 얼굴에,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다던 황비 사이에 태어난 공주인데 예쁜 것이 당연하겠지.
“그 황녀가 전방 시찰을 온다는군.”
“대체 왜?”
“군의 사기 진작과 위문 차원이라는데.”
자고로 높은 양반의 전방 시찰은 없으면 없을수록 사기에 도움이 된다. 차라리 돈이나 상을 줄 것이지 뭐하겠다고 여기까지 기어와.
“그래서 그 철부지 공주가 오는 것이 나하고 대체 무슨 상관인가요?”
“공주가 위명도 자자한 우리 흑건 용병대를 꼭 봐야겠다고 해서 말이야.”
미치겠다.
수도에는 흑건의 용사 어쩌고하는 소설도 유행한다더니 이 여자가 소설을 잘못 봤나.
“자네는 탐탁지 않은 모양이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놈들도 많던데.”
“환장하겠네.”
“그래서 말인데. 황녀가 머무는 동안 자네가 공주를 좀 맡아줘야겠어.”
“맡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부대원 소개도 좀 해주고 안전한 곳에 가서 몬스터 구경도 좀 시켜주란 말이지.”
“다 좋은데, 그걸 왜 내가 해야 해요?”
“몰라서 물어?”
프란츠는 자기 얼굴의 흉터를 가리켰다.
“이렇게 겉보기에 흉악하거나, 실제로 흉악범 출신인 놈들이 태반인데 누구를 시키나. 공주가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자네가 제일 멀쩡하게 생겼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납득이 됐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요.”
“내일 아침.”
레벨업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런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나?
[퀘스트 발생! 황녀 보호]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전장, 황녀는 잔혹한 전장에 피어난 한 떨기 장미가 되고 싶다는 갸륵한 희망을 품었다. 그녀의 희망과 안전을 동시에 지켜주는 것이 ‘흑건’의 의무. 지켜라! 목숨을 걸고, 흑건의 용사여!]
퀘스트까지 뜨다니.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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