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열 명이라. 몇몇 얼굴이 떠오른다.
“아웃사이더 님! 같이 사진 좀!”
“음?”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어제까지 내 가명도 못 외우던 놈이 갑자기 친한 척이야. 저 녀석은 그 흉측한 클럽 ‘포레버아싸’의 일원이로구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프란츠! 나 혼자 나갑니다!”
“뭐? 위험해!”
“아, 몰라요!”
나는 목책을 박차며 수평 방향 도약을 시전했다.
-쐐애액!
* * *
“아웃사이더 님!”
남자는 목책 아래로 뛰어 내려간 아웃사이더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진 찍어달라는 말, 못 들으셨나···.”
아웃사이더가 달려든 곳에선 오크의 거대한 육신이 날아다녔다. 몽둥이질 한 방에 하나씩.
“장난 아니다.”
북부 전선에 복무하면서 여러 번 오거를 만났다.
소대가 협력해서 한 마리를 겨우 잡곤 했는데, 허리케인 만난 파라솔 마냥 하늘로 날아오르는 오거를 보고 있으니 피가 끓었다.
“아웃사이더 님! 저도 갑니다!”
남자의 레벨은 184, 결코 낮지 않다. 포레버아싸의 일원으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목책에서 아래로 떨어진 남자는 아웃사이더를 향해 뛰었다.
몇 걸음이나 뛰었을까? 그는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고 위를 쳐다봤다.
“어?”
오거가 떨어졌다.
자신의 머리 위로.
“꾸엑!”
* * *
“쟤는 왜 갑자기 뛰쳐나와서···.”
뭐, 잘 됐다.
저런 게 팔자라는 거다.
오거 다섯 마리 중, 남자를 깔아뭉갠 놈 하나 빼고는 다 잡았으니까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나는 그길로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아예 깊숙이 들어가서 포니투를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갈 셈이었다.
‘탈퇴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흑건은 그날그날 살아남은 자에게 일괄 수당을 지급하는 막가파 용병단이다.
며칠 두각을 나타내며 골드와 신임을 모두 얻은 나지만 이쯤에서 접는 편이 낫겠다.
“오, 저건 울프 라이더잖아.”
추정 레벨 180. 라이더를 이끄는 팩 리더는 190 전후 정예. 그간 치고 빠지는 전술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기다려라. 봉인 해제한 아웃사이더가 간다.”
가는 길에 선물 좀 챙겨도 괜찮잖아?
* * *
“님도 오셨군요.”
“네, 또 뵙네요. 그런데 아웃사이더 님은 못 보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안 보이네요.”
“용병단에 계셨다던 회원님은?”
“아마 죽어서 기지에서 부활한 모양이에요. 금방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아, 오늘은 조공도 준비했는데.”
전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일남일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잠에서 소식 들은 후 이렇게 가까웠던 건 처음인데.”
“우리 포기하지 말고 얼른 찾아봐요!”
“그래요! 이렇게 놓칠 순 없죠! 회원 단체 메시지 보낼게요.”
* * *
“오, 저건 아이스 트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트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한 대.
두 대.
-깡! 깡!
예티와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그렇지만 두경부는 모든 동물의 급소다. 두개골을 깰 힘만 있다면.
빙룡의 수하들이 오늘 총공격으로 날을 잡았나? 그간 간간이 보았던 상급 몬스터가 전부 출동했다.
“진수성찬이네.”
상대해 보고 싶었던 놈들이 자꾸 나타나는 바람에,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아, 몰라. 마지막 날이니까.’
조금만 더 잡고 가자.
자주 오는 날이 아니다.
그때 내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이쪽! 이쪽이 분명합니다!”
조금 멀지만 분명히 사람 소리다. 여기까지 사람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나는 사람 소리를 피해, 조금 더 깊은 적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니, 저 사람들이 단체로 미쳤나?”
한참 더 들어갔는데도 그들은 계속 따라왔다.
결국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는 적의 본진에 거의 도달한 때였다.
“아웃사이더 님이 저기 계신다!”
“와아! 아웃사이더 님을 도와라!”
몇몇은 눈에 익었다.
바로 나잠에서 내 뒤를 쫓던 사람들. 선두에서 그들을 안내하는 놈은 어제까지 내 이름 못 외워서 구박받던 흑건 용병단의 동료.
‘날 쫓아온 거구나!’
그들의 수는 얼핏 봐도 수십에 달했다. 사람이 그만큼 모여서 소리를 지르는데 적진에서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적진 목책이 열리고, 적의 주력인 변종 오크와 오거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 씨, 이게 뭐야.”
앞에는 미친 빙룡의 부하들, 뒤에는 나를 추종하는 광신도(?).
사면초가다.
“적진이 더 마음 편해 보인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적에게 돌진했다.
“아웃사이더 님이 앞장서신다!”
“아웃사이더를 지켜라!”
‘뭐야, 저거···. 무서워.’
이렇게 되면 강행 돌파다. 그러다 죽으면 기지에서 살아날 테니까. 아직 죽은 적이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지금 상황에서 긴급 탈출에는 그것만 한 게 없다.
왼손에 방패를 단단히 거머쥐고 참교육을 계속 휘둘렀다.
“와아!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내가 멀어지고 싶어서 힘을 낼 수록 점점 그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
‘이게 되네?’
내가 선봉에 서고, 뒤로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도가 따르자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단 수십 기의 공격으로 수백의 병력이 모여 있던 전초기지를 박살 낸 것이다. 그것도 정예가 20기 이상 포함된 군대를.
물론 뒤를 따라왔던 내 추종자(?)는 반 이상 죽어서 사라졌다.
특히 흑건 동료였던 친구는 이미 두 번 전사했다.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은 경험치 하락 타격이 심할 텐데.
그래서인지 그는 한참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강제 로그아웃 시간은 좀 남았지만···.’
이제 와서 따돌리는 건 양심에 좀 찔린다. 할 만큼 했으니 설득해서 다 같이 철수하는 게 최선. 지금까지만 해도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저기, 여러분?”
전투의 흥분에 날뛰는 중이라 내 말이 잘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팬’이라는 말이 fanatic, 광적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아웃사이더 님!!!!”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두 번 죽은 흑건 동료. 지치지도 않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 대군을 곁들여서.
“이게 무슨···.”
그 옆에는 프란츠와 흑건 용병단 전원, 기지 주둔 중이었던 부대가 함께였다.
총공격 당하는 날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총공격하는 날로 바뀐 건가?
“아웃사이더 님!!!! 제가 설득해서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잘했죠?!”
두 번 죽고도 다시 살아온 저 인간, 지치지도 않고 방방 뛰었다.
‘잘했다, 이 새끼야.’
이러면 나 혼자 빠져나가는 건 진짜 물 건너갔잖아.
“잘했네, 엠와이!”
어느새 프란츠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네 혹시, 사병을 키울 정도의 귀족이었나? 아니면 종교 지도자라도?”
잘 모르는 사람들인데요.
“어쨌거나 잘했네, 엠와이. 덕분에 우리 용병단의 위상이 말도 못 하게 높아졌어.”
그러려고 한 거 아닌데요.
“이 기회에 전선을 올리기로 수뇌부에서 긴급 결정을 내렸네.”
프란츠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몇 년간 고착되었던 전선을 거의 자네 혼자 힘으로 밀어 올렸어. 고맙네.”
“허··· 허.”
“역시 자네 정도 되면 이만한 일을 해내고도 자랑 한 마디 하질 않는군. 대단해.”
“탈퇴하겠습니다.”
“응?”
퇴단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신이 없으니 일단 기지 건설 후 다시 얘기하자는 프란츠의 말이었다.
공병대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부대가 움직여 주변 잔당을 처리했다. 기지는 금방 완성되었다.
-띵!
[업적 달성! 북부 전선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당신은 무리를 이끌어 북부 전선을 종횡하며 열세였던 전황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놀라운 업적으로 칭호 ‘피리 부는 사나이(파티장 역임 시 파티원의 스킬 효과 10% 상승)’가 적용됩니다.]
* * *
“주인님, 오늘 또 무슨 엄청난 일을 하신 겁니까? 각종 매체에서 주인님 얘기뿐입니다.”
“나도 내가 뭘 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적당히 하다가 빠지려고 했을 뿐인데 타이밍을 놓쳤다.
내가 낄끼빠빠를 잘했다면 회사 생활이 훨씬 쉬웠겠지, 그렇게 잘렸을까?
“이걸 좀 보십시오.”
김 비서가 띄운 영상은 북부 전선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주인공은 나.
내가 몬스터와 싸우는 것을 이렇게 길게 보는 것은 처음이다. 보고 있자니 ‘북부 전선의 개망나니’ 어쩌고 하는 업적이 이해가 됐다.
“온화한 표현이었구나.”
[오늘 아웃사이더 님과 함께 북부 전선에서 원 없이 날뛰어 봤습니다.
그 결과 두 번 전사. 레벨이 오히려 다섯 개나 하락했지만 여한이 없습니다. 왠지 아웃사이더 님이 계시니까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한 느낌이고, 피가 끓더군요.
영상 보시고 ‘좋아요’ 눌러주시고, 저희 ‘포레버아싸’ 많이 가입해 주셨으면 합니다.]
└ 현장에 같이 있었던 힐러입니다. 정말 마나가 마르고 닳도록 힐을 뿌리고 다녔는데, 그 와중에 아싸님께는 한 번밖에 안 해드렸습니다. 선두에서 쉴 새 없이 싸우시는데도 체력이 별로 빠지지를 않더군요.
└ 편집 없이 리얼타임 영상이 맞나요?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이죠?
└ 리얼타임 맞습니다. 쫓아가는 것만 해도 힘들었어요.
└ 대단한 전투!
└ 어제까지는 아싸님이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오늘부로 숭배의 대상이 됨. 이건 레벨만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늘의 일은 하다 하다 뉴스에도 나왔다. 전선을 북쪽으로 1킬로미터 밀어 올렸다는데, 그게 뉴스에 나올만한 얘기인가?
그렇게 난리를 쳤어도 레벨은 고작 다섯 개 올랐다. 확실히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레벨 올리기가 어려워진다.
* * *
“거긴 어떻게 되고 있어?”
시연이가 찾아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쉽지 않네요. 영한 오빠가 없었다면 우리끼리는 정말 쉽지 않았을 거예요.”
시연과 그 친구들인 전 DNC 4인방은 현재 나로스에서 영한과 함께 새로운 지역과 퀘스트 찾기, 던전 개척에 힘쓰고 있다.
그들이 가는 길이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역사인 셈이다.
“아, 저 하얀 기사 만나봤어요.”
“무슨 특별한 얘기라도?”
“아직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레벨 250 이하하고는 아예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저하고 하이디 말고는 고개 까딱하고 말던데요?”
그 말은 나로스에서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최소 250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
“그래도 저하고 하이디 대련은 해 줬어요.”
“그래? 결과는?”
“뻔하죠. 영한 오빠도 꼼짝 못 했는데.”
하얀 기사와의 실력 차이가 나로스 메인 퀘스트 공략의 바로미터다. 어느 정도 상대가 될 때까지 성장하지 못하면 죽은 이의 여왕은 꿈도 못 꾸겠다.
“대신 그 마을에 아예 자리를 잡았어요. 작지만 확실한 마을이라서 로그아웃은 맘 편히 할 수 있으니까 훨씬 편해졌네요.”
바쁜 시연은 어딘가 행사 참석 일정이 있다면서 돌아갔다.
“주인님, 산책 가실 시간입니다.”
김 비서는 저녁 식사 후 나를 불렀다. 목줄은 없어서 다행이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 강제로 시작됐던 산책은 효과가 괜찮았다.
가끔은 시연이나 강한이가 와서 함께 걷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김 비서와 둘이 하는 것이 가장 편했다.
아무 말 없이 걷는 것만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걷는 동안 내린 결론은 하나다. 이대로면 레벨업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거.
250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며, 점점 더 느려질 테니까.
“좋아, 결심했다.”
“네? 무슨 결심 말인가요?”
“시간이 부족하다. 승부수를 던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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