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빙룡의 레어 근처에는 한 개의 던전이 더 있다.
바로 빙룡을 섬기는 최강의 수하, 리치이자 네크로맨서인 아카드의 은거지.
빙룡의 레어는 일단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아카드의 지구라트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고, 몬스터 레벨도 조금 낮다.
하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고, 현재 공개된 던전 중 빙룡의 레어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레벨.
165에 불과한 현재 내 레벨로는 입장조차 안 되는 곳이다. 최저 입장 레벨이 185니까.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레벨 뻥튀기의 당의정: 비약]
[5초 동안 레벨을 두 배로 만들어준다.]
그것은 바로 낙원의 클랜 금고에 들어있던 쓰레기 중 하나였던 파티 드럭.
원래 효과는 몸 크기를 5초간 두 배로 만들어 주는 거였다. 그 외에는 힘이 늘어나는 것도 없고, 그냥 잠깐 웃고 즐기기 위한 알약에 불과했는데.
그것이 로스트 파라다이스로 오면서 효과가 이상해졌다. 숫자로 표시되는 레벨을 두 배로 부풀려준다.
‘실제로는 스탯도 전혀 변화가 없지만.’
보이는 레벨만 두 배가 되는 거다.
쓰레기임에는 변함이 없는데, 지금 내 입장에서는 사용해 볼만한 재활용 쓰레기다.
약을 먹고 던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들어간 다음 레벨이 낮아지면 강퇴당할까?’
시험해 볼 만하다. 통하지 않으면 일단 물러나서 다른 던전으로 가면 된다.
“아쉬울 거 없지.”
여전히 기지 내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과, 몬스터의 눈을 피해서 조금씩 전진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포니투를 타고 오면 10분 안에 올 수 있는 거리인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
⋮
“여기구나.”
지구라트의 크기는 거대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피라미드만 한 거대 건축물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그 건물 사방을 내 키의 몇 배 높이 벽이 둘러싸고 있다. 이 던전의 입구는 바로 정문.
“엇!”
발각되었다.
주변을 돌고 있던 오거와 트롤 부대가 나를 발견하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다.
나는 얼른 입에 알약을 털어 넣었다. 순간 트롤과 오거가 급정거했다. 저들의 생태를 잘은 모르지만, 얼굴색이 변한 것도 같다.
“느낀 건가?”
현재 내 레벨은 330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이 순간, 숫자만 놓고 보면 던전의 주인보다 내 레벨이 한참 높을 거다.
나는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셋, 둘, 하나.”
성공이다.
레벨이 떨어졌다고 해서 강퇴당하지는 않았으니까.
이제 초반이 중요하다. 잘 버텨서 내 레벨이 올라갈수록 안전해질 테니까.
“빈혈이 나와라.”
“그워헙!”
나는 빈혈이가 나오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주인 무슨 일인가···?”
“조용히 해. 여기 나오는 적들 등급이 다 200이 넘는다.”
“그···워. 나 지금 133인데?”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는 거야.”
“알겠다. 그워.”
빈혈이는 아주 작게 전장의 함성을 질렀다. 이 정도면 함성이 아니라 속삭임에 가깝다.
“자, 그러면 뒤에 잠깐 숨어있어.”
“내가 앞에 나가서 시선을 끄는 게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보면 내가 널 고기 방패로 쓰려고 데리고 다니는 줄 알겠다.”
“아, 아닌가?”
나는 빈혈이를 정문 벽 뒤에 숨겨두고 병풍 스킬을 켠 후, 고개를 슬쩍 내밀어 보았다.
밖에는 구울과 좀비가 아무 목적도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흠, 영한이가 알려준 대로구나.’
지구라트 건물로 들어가기 전, 벽과 건물 사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은 전부 구울, 아니면 좀비.
영한의 표현에 의하자면 병풍의 천국.
지능이 낮은 그것들은 원거리에서 나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벨 차이가 있으니까 너무 가까이 가면 곤란해질 지도 모르지만.
-깡!
시험 삼아 가장 근처를 돌아다니던 좀비를 잡아 봤는데, 소리에 잠깐 반응했던 다른 놈들은 곧 흥미를 잃고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이크!’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중간중간 돌아다니는 눈깔 모양 몬스터.
레벨 1에 체력도 1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시야에 닿으면 은신 스킬은 전부 취소다. 물리, 마법 공격에 모두 면역이라 피하는 수밖에 없다.
-깡! 깡!
한 마리, 많아야 두 마리.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숫자는 그 정도다.
셋을 처리하다가 걸릴 뻔한 이후로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레벨이 185만 됐어도 이렇게까지 조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어유, 갑갑해.’
레벨 200 찍으면 일부러 발각된 다음, 한데 모아놓고 잡아 버려야지.
지금은 레벨 차이가 너무 나서 두 대는 때려야 죽으니까 천천히 가자.
결국 마당에 돌아다니던 놈들을 정리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빈혈아, 가자.”
“그워! 나 안 잤다.”
“그래.”
던전 내에서 수면 시간을 보장하다니 이 정도면 좋은 주인 아닌가.
눈깔을 조심스레 피하면서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직사각형인 지구라트 1층 내부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첫 번째 구역은 납골당으로 각종 스켈레톤 전사와 구울이 한가득이다.
두 번째 구역은 플레쉬 골렘. 살점과 장기를 누덕누덕 기워서 마력으로 이어 붙인 괴물이 지키고 있다.
세 번째는 데스나이트 부대가 지키는 건물 전체의 동력실.
네 번째가 아카드에 의해 깨어난 스켈레톤 드래곤이 지키는 방이다.
건물 한가운데는 위층으로 가는 전송진이 있다.
“꼭 순서대로 클리어하라는 법은 없잖아?”
다른 지역을 클리어해야 보스방으로 갈 수 있는 일반적인 던전과는 달리 이곳은 언제든 위층으로 갈 수 있다.
-위잉
전송진이 작동되고, 2층 전체를 차지한 보스방에 도착하면 아카드가 플레이어를 맞이한다.
덜그럭덜그럭.
방바닥 전체에 온갖 해골이 잔뜩 깔려있어서, 밟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져서 긴장했는데 착각이었나? 이런 한심한 자가 어찌 홀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말이냐.”
“오, 여기서 그걸 느꼈어?”
“게다가 아래층 부하들도 건드리지 않고 온 모양인데···. 자살을 힘들게 하는 편이로구나.”
이죽거리는 아카드의 뒤에는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항아리가 하나 있다.
저것이 바로 아카드의 라이프 포스 베슬. 저 항아리가 부서지기 전에는 아카드는 불사다.
“귀찮으니 죽어라.”
아카드의 가벼운 손짓에 방 전체를 가득 채운 해골이 짝을 찾았다.
“주, 주인!”
“빈혈이는 들어가 있어.”
“그웟!”
전장의 함성을 한 번 더 급히 튕겨주고 빈혈이는 사라졌다.
리치하면 베슬, 베슬 하면 리치 아니겠나.
베슬을 부수면 리치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상식인데, 저렇게 뻔히 보이는 곳에 베슬을 전시한 이유는 단 하나.
저 베슬은 지금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 그래서 보이기는 하지만 건드릴 수가 없다.
베슬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것은 아카드가 불사라는 소리다.
“여기 직접 온 대가를 치르거라.”
사실은 1층의 네 구역을 모두 돌면서 보스를 잡아서 그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룬석을 모아야 한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베슬에 던지면 비로소 차원 위상이 맞춰지고, 그 후에 베슬을 건드릴 수가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1층을 다 클리어하기 전에 위로 오면 안 되는 것인데.
달각달각, 덕컬덜컥.
생전에 무엇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다양한 종의 스켈레톤이 일어났다. 그 수는 50구 이상.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뼈다귀들하고 궁합이 좋은 것 같아.”
“미친놈이로구나.”
아카드는 턱뼈를 달그락거렸다. 혀가 없어서 혀를 차지는 못했지만, 말투만 들어도 뭐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죽여라.”
아카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켈레톤의 일제 공격이 퍼부어졌다.
“절대방어.”
-타다닥펑펑쾅콰직
이것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세심한 손길. 이것이 바로 성장의 맛?
20여 초. 충분히 레벨 200대 스켈레톤의 뼈 때리는 감각을 느껴주고 참교육을 휘둘렀다.
-깡!
레벨 차이가 크게 나서 시간이 살짝 아슬아슬했지만, 간신히 죽지 않고 모두 정리했다.
“음?”
아카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 있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같은 소리한다. 요리 오세요. 제가 뼈 소리 ASMR 좀 들려 드릴 테니까.”
나는 참교육을 집어넣고 회초리를 들었다.
⋮
“아카드가 명한다.”
“주주주인인인님님님! 이이이게게게 무무무슨슨슨!”
시커먼 안개를 끌고 다니는 데스나이트.
길 가다 마주치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위용을 자랑했다. 목소리도 어찌나 울리는지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리 와서 전부 엎드려뻗쳐라.”
“네네네? 어어어째째째서서서!”
“아카드의 명이다.”
-빡!
나는 아카드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야! 장비 벗으라는 말을 빼먹었잖아.”
“아차,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자. 나 기분 나쁠 뻔했어.”
“아카드의 명이다. 전 대원 장비를 벗어서 이분 앞에 놓고 엎드려라.”
“그렇지. 한 번에 그렇게 하면 얼마나 편해. 다음부턴 조심해.”
“알겠습니다. 용서를.”
이 던전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아카드의 명에 절대복종한다.
아카드가 불러일으킨 녀석들이니 당연하다. 애초에 아카드가 마력을 끊으면 존재할 수가 없는 놈들이니까.
내 앞에 그 비싸다는 데스나이트의 풀세트가 켜켜이 쌓였다.
“자, 이제 참교육 시간이다.”
데스나이트가 하도 많아서 방망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갑옷을 입었다면 하나당 세대씩은 맞아야 죽는 강력한 놈들이지만, 장비 없는 맨몸으로는 한 대씩이면 충분하다.
그래도 백 마리쯤 되면 팔이 아프긴 매한가지. 중간중간 아카드의 복종이 풀릴까 봐 회초리질을 추가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빈혈이 나와라.”
“그워! 우왓!”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온통 시커먼 놈들의 사체와 장비. 아카드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고.
“나와. 네 덩치가 내 뒤에 숨어지기는 하냐?”
“아, 안 무섭다!”
“빈혈이는 아이템 수거하고. 아카드, 다음 방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이 잔인한 복종의 먹이 사슬. 삽시간에 나는 던전 내 최고 포식자가 되었다.
플레쉬 골렘은 흐물흐물 좀 역겨워서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대만 때려도 살점이며 장기가 휙휙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버렸다.
스켈레톤 드래곤도 하나밖에 없어서 뚝딱 해치웠다. 어찌나 체력이 높은지 다섯 대는 때려야 했기에, 혼자 잡았으면 좀 버거울 뻔했다.
스켈레톤이 가득한 납골당에서는 절대 방어 쿨타임이 끝나서 한바탕 더 타골 마사지를 진행했다.
“그만, 이제 모두 엎드려뻗쳐.”
스켈레톤은 장비가 부실해서 아쉽네. 데스나이트는 세트가 아주 기가 막히던데.
“자, 아카드. 이제 2층으로 올라가자.”
“네.”
“그워, 주인은 역시 회초리를 들었을 때가 제일 무섭다.”
“야, 회초리 덕에 너도 자유를 얻은 거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나는 아카드를 데리고 2층으로 갔다. 1층을 돌면서 모은 룬석을 합쳐서 라이프 베슬에 툭 던졌더니, 드디어 베슬을 직접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아카드. 이걸 먼저 부수고 널 때려야 되냐, 아니면 죽인 다음 깨버려야 하냐?”
“그야···.”
“아니다. 귀찮은데 한 번에 하지 뭐. 시험해 볼 것도 있고.”
인벤토리에서 ‘개발자의 탈리스만’을 꺼냈다.
“100%가 끝인 줄 알았더니만.”
[충전율: 235%]
무려 235%. 원거리 무기라는데 235%짜리 위력 한방이 나가는 걸까? 아니면 100%씩 두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써보면 알겠지.”
빈혈이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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