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의 개망나니가 되었다
“야, 아카드.”
“네.”
“라이프 포스 베슬 손에 들고 저기 벽 앞에 서.”
“알겠습니다.”
아카드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말을 따랐다.
-철컥
탈리스만은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손바닥 한가운데 찰싹 붙었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탈리스만의 표면에는 여태 보지 못한 영롱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베슬 몸 한가운데로 정확히 들어.”
“네···.”
아카드의 눈빛이 슬슬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간 많은 회초리질로 충분한 데이터를 쌓았다.
저건 복종이 풀릴 때가 되었다는 증거다. 그러니 시간 끌지 말자.
“하나, 둘.”
“자, 잠깐─”
“셋.”
그것은 단순한 마력탄이 아니었다. 쇠로 된 히어로가 나오는 서양 영화에서 나오는 리펄서같이 약해빠진 것도 아니었다.
굉음도 진동도 없이 나타난 빛줄기는 사람 하나쯤은 우습게 덮을 만큼의 굵기로 끝없이 뻗어나갔다.
고요했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어···.”
그 빛은 아카드와 베슬을 흔적도 없이 삼키고, 뒷벽, 그 뒤 성벽, 저 멀리 하늘까지 닿았다. 닿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면서.
“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하늘 너머 텍스쳐가 망가져서 울렁거렸다. 그 사이로 0과 1 몇 개가 돌아다녔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했지만.
“사, 사라졌다! 사라졌어!”
빈혈이는 몸을 덜덜 떨었다. 내게 당할 때나, 회초리에 당한 녀석들을 볼 때도 이 정도로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뭐야, 시체도 없네?”
“주··· 주인, 이건 너무 무섭다.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개발자 놈들 대체 뭘 남겨둔 거야.
나는 빈혈이를 소환 해제하고 던전 밖으로 나왔다. 던전의 모습이 잠깐씩 깜빡깜빡하는 게 뭔가 사단이 나도 크게 난 것 같다.
나는 모르겠다.
이브가 알아서 하겠지.
좀 과한 감이 있었지만, 오랜만의 던전 공략 결과로 참교육이 여섯 단계나 성장했다.
[참교육: 둔기]
▶공격력 228-268(두경부 적중 시 2배 적용), 성장형
▶장착 효과: 힘+114, 민첩+114
정예 20마리 잡으면 한 단계 오르던 것에서 30마리에 하나씩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생각만큼 많이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골 종류가 풍부하게 서식하는 던전이었던 덕에 뼈 마사지를 많이 받아 내 상의도 10단계나 자랐다.
[무자격자는 헬창을 꿈꾼다: 상의]
▶방어력 770, 성장형
▶장착 효과: 힘 +99, 체력 +99
몬스터의 밀도가 높은 던전이었던 덕에 레벨도 7 올랐다.
‘아직 172구나.’
‘레벨 뻥튀기의 당의정’은 이제 두 알 남았다. 그새 185를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 자리에서 로그아웃은 조금 위험하니까 일단 영지로 가자.
* * *
“주인님~! 오랜만이에요!”
푸른 바다가 보이는 나의 영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라고? 세 시간 전에 밖에서도 봤잖아.”
“영지는 오랜만이잖아요.”
“그랬나?”
생각해 보니 파티 이후에 영지는 처음 온다. 미영이와 낙원을 동시에 잃고 헤맨 지도 한참. 별로 노닥거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주인님이 안 오시는 동안 몇 가지 성과를 거뒀답니다~.”
“뭔데?”
“이리 와 보세요.”
김 집사는 내 팔을 붙들고 집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먼저, 창고를 만들었어요. 팔기 싫은 물품이나 오래 보관할 것 있으시면 넣어 두시면 되고요.”
창고는 집 밖에 따로 붙어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클랜 금고가 생각나서 또 그날을 떠올리게 된다.
내 얼굴을 보고 김 집사는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영지에서 직접 경매장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어요. 보세요.”
집 안에 마치 현금인출기처럼 생긴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혹시 경매에 올릴 것이 있으신가요?”
나는 10개의 데스나이트 갑옷 중 하나를 내밀었다.
“아니, 이 귀한 것을?”
좋은 것임은 알고 있었다. 빙룡의 레어를 제외하면 최상급 던전 몇 개 중의 하나니까.
이 데스나이트 갑옷은 레벨 제한 190. 나는 아직 레벨이 안 돼서 입지도 못한다. 떨구는 확률도 낮아서 한번 클리어할 때 한 벌 맞출까 말까.
착용 후 귀속이라 경매장에 나오는 물량은 훨씬 적고.
“세트로 팔면 얼마쯤 될까?”
“싸게는 4,000만 원, 비싸게는 6,000만 원 근처입니다.”
오우 씨, 던전 한번 털고 몇억 벌었네.
“여기 더 있다. 한 벌만 빼고 다 팔아라.”
“풀 세트로 아홉 벌이군요.”
김 집사는 한 벌만 경매장 기계를 통해 등록하고 나머지는 모두 창고에 넣었다.
“한 번에 올리면 가격이 하락할 수 있으니, 시차를 두고 한 벌씩 풀게요.”
“그래. 한동안 그 던전 뺑뺑이 돌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가져올 거야.”
“넵!”
다음 날, 두 번의 공략 성공.
그다음 날, 또 두 번.
결과적으로 레벨 22, 참교육 24 단계, 상의는 31단계 상승했다. 그리하여 내 레벨은 194.
조금만 더하면 진정한 고수의 기준인 200에 도달하게 된다.
아이템의 수확 성과도 나쁘지 않아서 렙제 190인 일반 데스나이트 갑옷 세트가 37개, 대장 데스나이트가 한번 흘린 195 렙제 유니크 데스나이트 세트도 획득했다.
”이걸 다 풀면 가격에 문제가 생기겠는데?”
“최대한 천천히 풀게요.”
김 집사는 내가 내려놓은 장비를 들고 창고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성과라면.
“여기는 죽음의 기운이 너무 적군. 지나치게 생명력이 넘쳐흘러.”
빠악!
나는 아카드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이 자식이 아직 여기가 자기 지구라트인 줄 아나.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왜, 왜 때리는가?”
“가? 가? 누가 말 그 따위로 하라고 했어!“
”왜 때리··· 십니까?“
아카드는 내 일격에 떨어진 해골을 집어서 다시 자기 머리에 끼웠다.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으니 좋군.
“누가 그렇게 폼 잡으래. 빙룡은 그 꼴을 봐도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꼴 못 본다. 말투 발랄하게 바꿔.”
“발랄···?”
“그럼 인마, 네가 여기서 막내인데 어쩔 거야.”
안 그래도 안색이 어둡고 인상이 더러운데 말투까지 그러면 보고 있기 짜증 난다.
“저기 김 집사는 날 대하듯이 절대복종. 그 밑에 빈혈이가 첫째 형, 지금은 없지만 두 번 째가 그레이라는 누님이다. 넌 그 아래. 알겠지?”
“······.”
“대답.”
“네.”
“발랄하게.”
“넹.”
“좋아.”
훨씬 발랄하고 좋군. 끔찍한 얼굴이 깜찍하게 보일 정도다. 그는 베슬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네 베슬은 창고에 가져다 놔.”
“이 소중한 것을 창고에 넣으란 말인가?”
“발랄하게.”
“말인강?”
“여기는 내 영지라서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괜찮다.”
달그락달그락.
뼈밖에 없는 하관이 움찔거렸다.
“그거 정말 대단하군용! 불청객이 원천 차단되는 장소가 있다니용! 최고의 주인님입니당!”
자식, 어떻게 빙룡 밑에서 높은 자리를 꿰찼나 했더니만 아부가 수준급이었어.
“그워! 주인 내가 가르치겠다.”
“그래라.”
빈혈이는 막내 아카드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레이가 없어지고 심심해 보이더니 오랜만에 의욕을 찾았다.
전리품과 각종 잡템을 정리하고 해변에 털썩 앉았다.
“이제, 어쩐다?”
아카드의 지구라트를 더 돌아도 좋겠지만 이제 그건 효율이 좀 떨어진다. 남은 선택은 두 가지. 빙룡의 레어로 쳐들어가느냐, 나로스로 가느냐.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주인님 베아트리체의 연락이에요.”
“왜?”
이 시점에 갑자기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급히 한번 뵙기를 청하는데요?”
좋다. 어차피 상급 기술도 습득할 타이밍이기도 하니까.
“곧 가겠다고 전해 줘.”
* * *
오랜만에 쏠레 시티로 왔다.
수도는 그새 더 활기로 넘쳤다. 인간뿐 아니라 드워프와 엘프도 적지 않았는데 아직은 레벨이 낮아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성장해서 종족의 특성을 뽐내게 되겠지.
잡템 정리와 소모품 구매를 위해 상점가를 걷다가 건물 위에 걸린 대형 선전판을 발견했다.
“어이구, 아리엘 할머니.”
마법으로 움직이는 영상 광고판에서는, 아리엘 디아즈가 양 갈래머리에 사탕을 물고 있었다.
마치 소녀와 같은 모습으로.
그것도 모자라서 디아즈의 곁에는 수트를 차려입은 도리언이 마치 경호원이라도 되는 양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패션리더 다 되셨네.”
하긴 나뭇잎 거적때기를 걸쳐도 그림이 되는 엘프니까 제대로 된 옷을 걸치면 인간 모델 뺨을 후려쳐도 백번은 후려칠 거다.
“도리언 님 너무 멋지지 않아?”
“저 우수에 찬 눈빛 좀 봐.”
“그렇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그 광고판 앞에는 아침부터 여성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도리언을 보고 있었다.
“저 여자 엘프가 사실 엘프족에서 제일 나이 많다며?”
“진짜야? 헐, 주책이다. 양 갈래머리가 뭐니?”
동감이긴 한데.
“도리언 님의 대모래.”
나머지 두 연장자였던 벤드리스와 클로드가 죽은 지금은 도리언 뿐 아니라 현재 모든 엘프의 대모인데.
“어머, 그럼 도리언 님과 잘 풀리면 저 여자가 내 시어머니?”
“미친년. 내 시어머니다.”
너희 둘 다 미친 것 같으니까 싸우지 마. 나는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역시 수도의 상점 NPC는 싹싹하다.
“아이템 판매와 구입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눈에 걸리는 포스터가 주인 뒤에 붙어 있었다.
“저건 뭡니까?”
“이거 모르십니까? 요즘 핫한 공구 브랜드입니다. 머슬 앤 비어드. 요즘 제작 기술 연마한다 하시는 분들은 여기 물건 하나씩은 다 갖고 계시죠.”
포스터에는 꿈틀대는 팔로 망치를 든 그룸의 사진이 있었다. 까만 배경에 얼굴 반쪽은 그림자가 져 있어서 강렬한 이미지를 줬다.
‘생각보다 그럴듯하잖아.’
“곧 제작 아카데미도 연다고 하네요. 관심 있으시면 나중에 한번 가 보시죠.”
“네.”
구원자와 인도자의 도움 없이도, 두 종족은 아주 잘 적응하고 있었다.
상점을 나와서 어디를 먼저 갈까 하다가 성당으로 향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가깝기 때문에.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사제에게 부탁해 베아트리체의 성소로 향하는 포탈을 열고 들어갔다.
“아웃사이더 님. 오랜만입니다.”
“응.”
“이렇게 부름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만. 나 바쁘다.”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참 한결같은 NPC다.
“요즘 많은 일을 겪으셨더라고요. 우선 엘프와 드워프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대륙의 이야기가 정체되고 있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덕분에 잘 풀렸습니다.”
“뭐, 어쩌다 보니.”
“영지도 최초로 얻으셨고요.”
“그것도 어쩌다 보니.”
“그리고 굉장히 강력한 무기도 얻으셨더라고요?”
“.......”
그것이었나. 어쩐지 별일도 없는데 나를 찾는다 싶었다.
“그것과 관련해서 만나야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뭐? 또 GM이냐?”
“아닙니다.”
베아트리체의 뒤편에 어떤 징조도 없이 한 사람이 나타났다. 로브를 걸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경계심이 생겼다.
“소개합니다. 이 게임의 창조자, 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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