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원치 않던 변화 Ⅱ
#012. 원치 않던 변화 Ⅱ
4 도시 친구들과의 첫 만남 이후 시설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4 도시 친구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찾아와서 나와 진수,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돌아가며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시설 내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통해 전달된 문제들이 학교 또는 유환이를 통해 건의됐고, 다는 아니지만 꽤나 많은 문제들이 점차 해결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공작소'가 생긴 것이었다. 공작소에는 크고 작은 기계, 도구들과 여러 재료들이 가득했고, 경험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곳을 찾아 옷, 생활용품, 마스크, 운동기구 등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공작소를 찾는 사람들은 소수였으나, 이렇게 경험 많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이 시설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지금은 건너 건너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공작소를 찾아 그들의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배워서 만들 수 있었던 물건 중 가장 인기가 많던 것은 당연 마스크와 필터 같은 것들이었다. 매일 써야 하는데 보급되는 양은 한정적이었고, 누구나 더러운 마스크보다는 매일 새 마스크를 쓰길 원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덕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래전 마스크 회사에서 일을 한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두 분은 공작소가 생긴 다음부터는 거의 그곳에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마스크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재료가 없어 불투명 일회용 마스크만 하루에 두 세장 정도 만들어내는 정도였지만, 조금씩 장비가 더 추가되고 재료도 늘어나면서 이제는 우리가 보급받는 것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꽤 훌륭한 투명 마스크를 하루에 수십 장씩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며 마스크 만드는 일을 도왔고, 그 대가 아닌 대가로 투명 마스크를 공짜로 매일 두 장씩 받을 수 있었다. 이게 뭐 별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됐다. 동생과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꽤나 많은 돈을 현금으로 받고 이곳에 도착했다. 처음 일주일 완전 격리 기간 동안은 물론 이 돈을 쓸 일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이후 어느 정도 생활이 보장되면서, 편의점이 들어오고 그다음부터 돈을 쓸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인원수에 맞춰, 휴지, 마스크 등 각종 소모품들을 매주 보급받았는데 그 양이 턱 없이 부족해서 화장실을 갈 때 휴지를 몇 칸 뜯어 써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마스크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원래 매일 갈아 쓰는 게 권장되는 마스크였지만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 동안 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편의점을 자주 찾았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었던 편의점에는 보급되는 물품 외에 좀 더 나은 퀄리티의 마스크나 휴지 등이 있었는데,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평소보다 두 배 세 배의 가격으로 올려놓아도 들어오는 족족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만들어내는 마스크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점점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마스크를 하나씩 팔기 시작했다. 물론 가격은 편의점보다 훨씬 저렴한, 납득이 되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마스크를 만들어내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에도 각자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취미용품이나 운동기구 등을 만들어내는 어른들도 처음에 나눠주던 물건을 조금씩 팔기 시작했고, 그렇게 알게 모르게 시설 내에서는 돈이나 물물교환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돈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 큰 집이나 차 같은 건 살 수 없었지만, 편의점에서 값비싸게 팔리는 간식거리 등을 사는 데에는 엄청 유용했다.
하지만 이렇게 돈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그랬지만 일부 어른들 중에서도 현금이 많이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인터넷이 안되고, 거기다 핸드폰도 먹통인 이곳에서 현금이 아닌 통장 내의 숫자들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2 도시 은행에 돈이 많이 있었던 사람일지라도 현금이 없으면 이곳에서 불편한 생활을 계속해서 해내야 했다. 보급품도 있고, 배식도 해주니 생활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현금이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그들의 표정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생활의 질이 얼마나 다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점차 길어지면서 서로를 돕고 의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뭔가 설명하기 힘들고, 입 밖으로 꺼내기 싫은 느낌이었다. 덕호 할아버지와 영미 할머니 옆에서 마스크 만드는 일을 돕다보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와라. 학교는 잘 마쳤고?"
"네."
여느 때처럼 공작소에는 각종 섬유 냄새와 금속 냄새가 가득했다. 덕호 할아버지와 영미 할머니는 평소처럼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평소처럼 그런 두 분의 옆 자리에 앉아 마스크와 끈 이음새를 천천히 조립하기 시작했다.
"수로는?"
"친구들이랑 위에서 놀아요. 친구가 축구공을 산 모양이에요."
"축구공? 저기 옆 영감탱이가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벌써 팔린 모양이구만."
덕호 할아버지는 구석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하나를 슬쩍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 공작소로 얼룩진 마스크를 쓰고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하나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잘은 몰라도 현금이 없고 불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것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어··· 저기 선생님들."
그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 정중히 인사하더니 회색으로 변해버린 마스크 끈 밑에 깔린 얼굴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흠흠··· 정말 죄송한데 혹시 마스크 하나만 주면 안 됩니까?"
그런 그의 말에 덕호 할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영미 할머니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측은한 눈으로 그런 노인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안됩니다. 하나 주기 시작하면 찾아오는 사람 다 줘야 돼요. 그럼 그동안 우리가 마스크를 판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미안합니다."
덕호 할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정중히 노인의 요청을 거절했고, 노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서 공작소 밖으로 걸어 나갔다.
"퉤!"
"저런 미친···"
노인은 걸어 나가다가 우리 쪽을 향해 갑자기 침을 뱉었고, 그 모습을 본 덕호 할아버지는 삿대질을 하며 그런 그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늙었으면 곱게 늙어야지! 뭐 하는 짓거리야!"
"아이고··· 그만해요."
덕호 할아버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노인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화가 잔뜩 난 덕호 할아버지는 씩씩 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들은 상종을 하지를 말아야 돼. 돈이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저런 식으로 평소에 행동하는 놈들이 짐승이랑 다를게 뭐가 있어?"
"그만해요 좀··· 이로도 옆에서 듣는데."
영미 할머니의 말에 덕호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로? 이로도 옳고 그른 건 다 판단할 수 있는 나이지. 이로야. 너는 저런 것들이랑은 아예 상종을 하지 말아라. 세상에는 멀쩡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야. 안이든 겉이든 부서진 놈들이 가득하다고."
"아··· 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결국 할아버지의 화는 영미 할머니에게 까지 번졌고, 우리는 그렇게 공작소 안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한 동안 아무 작업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불 같이 쏟아내더니 이내 숨을 고르며 화를 식혔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것 오늘 더 이상 못해먹겠구먼. 이로야 그만 가자. 당신도 그만 접고 올라가자고. 도저히 일할 기분이 아니야."
할아버지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도구들을 내려놓더니 앞장서서 공작소를 빠져나갔고, 할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내 손에 평소처럼 마스크 두 장을 얹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저 영감이 아무래도 단단히 심술이 난 모양이야."
"네··· 전 괜찮아요. 오늘 많이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 네 잘못이 아니잖니. 다 저 영감 탓이지 뭐··· 그럼 이만 올라가자꾸나."
"네."
정말이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영미 할머니와 함께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할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았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길게 뻗은 계단 때문에 할머니는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숨을 더 가쁘게 쉬었다.
"이놈의 계단은 정말··· 적응이··· 안 되네."
"천천히 가요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이로야."
나는 할머니의 등을 뒤에서 살짝 밀어드리며 계단을 올랐고, 그렇게 할머니와 나는 조금 느리지만 안전하게 계단을 올랐다.
"굉장히 소란스럽구나."
"무슨 일이 있는 걸 까요?"
"그러게···"
위로 올라갈수록 평소와는 달리 더 큰 소음이 우리 귓가를 때렸다. 무언가 기쁜듯한 느낌이 아닌 어딘가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의 소음이었다. 마치 사람들이 무언가를 향해 소리치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느낌이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계단을 타고 밖으로 나오자 우리는 그 소음의 원인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짜 미친 거야?!"
"그래 미쳤다!"
아까 그 노인과 덕호 할아버지가 광장 한가운데에서 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노인은 할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며 달려들었고, 할아버지는 그걸 얼굴 정면으로 받으며 노인의 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그런 둘 주위에서 이도 저도 못하며 "좀 말려봐요."라고 소리만 치고 있었고, 정작 말려야 할 치안대 요원은 단상 위에서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서서 그런 노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가서 말려야겠어요!"
보다 못한 내가 뛰쳐나가려 하자 영미 할머니가 한 손으로 그런 나를 막아서며 말했다.
"아니야 넌 여기 있어 할머니가 말릴 테니까."
할머니는 처음이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주먹질을 멈추지 않는 두 할아버지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두 노인의 격투는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미친 노인네 그깟 마스크 하나 얼마나 한다고 하나를 못 줘?"
얼룩진 마스크를 쓴 노인은 온갖 욕설을 해대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무언가를 재빠르게 꺼냈다.
"그만해요 두 분 다!"
그리고 그 순간 영미 할머니가 두 할아버지들 사이에 끼어들었고, 노인이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가 엉뚱한 사람의 몸에 꽂히는 것이 보였다.
"하, 할머니!"
"어··· 어···"
할머니 배에는 작은 송곳이 꽂혀있었고, 무너지는 할머니와 함께 그곳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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