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뒤틀린 신념 Ⅰ

#024. 뒤틀린 신념 Ⅰ
"유환이는 요새 안 보이네?"
내가 다용도실에 들어온 4 도시 친구들에게 묻자, 지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응. 요새 당에서 청년 대표니 뭐니 선출되더니 학교도 잘 안 나와. 사실 안 나와도 상관없지만."
"학교에 안 나와도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지수는 내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우리 사이에 놓인 투명한 가림막을 손가락으로 마치 무언가를 적듯 끄적이며 말을 이었다.
"유환이는 사실 학교에 안 다녀도 상관없어. 일찌감치 대학에 들어갔어도 안이상했지. 그런데 그냥 자기 아버지 때문에 다니는 거야. 아마도 서민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서민적인 이미지?"
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서 안경을 만지작 거리던 준수가 지수의 말을 거들었다.
"유환이네 집은 도시에서 손에 꼽히는 부잣집에다가 대대로 시에서 정치를 해오고 있어. 그래서 그런지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아이들을 이런저런 정치적인 행사에 데리고 다니고 그때부터 여러 정치인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인맥도 쌓고 하지. 놀아야 할 때 일을 배우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애가 그 모양 그 꼴이 된 거지."
지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우리 아빠는 공업구역에서 제약 회사의 원장으로 계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나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 물론 지금은 아빠가 나를 반 정도 포기한 상태라 그럴 일이 없지만··· 당시엔 거의 일상이었지. 유환이네 가족도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들 중 하나였고. 처음 봤을 때 유환이는 지금 같지 않았어. 뭔가 천진난만하고 어떻게 보면 4차원 느낌의 아이 같았지. 엉뚱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지수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회상하는 듯 마스크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비추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재밌었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내 머리 색이 노랗다고 바나나 같다고 말하며 놀리던 모습이 기억나. 내가 화가 나서 쫓아가자 도망치면서 계속 '바나나 머리'라고 소리치면서 공원에서 한 동안 계속 뛰어다녔거든. 그때의 유환이는 딱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이었던 것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
어느새 지수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지수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어설프게 말했다가 괜히 더 슬프게만 만들 것 같아 입을 꾹 닫고 그저 공감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이로도 어느 정도 공감할걸? 너네 아버지도 2 도시에서 공무원이었다고 했잖아? 그것도 고위직이었다고."
"그런 소릴 지금 뭐 하려 해."
나는 눈치 없이 끼어들어 쓸데없는 말을 하는 진수를 노려보았고, 진수는 뭐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수는 그런 그의 말이 흥미롭긴 했는지 어느새 조금은 풀린 얼굴과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진짜야? 그럼 너도 유환이처럼 재미없는 삶을 살다가 이리로 온 거야?"
"아···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확실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몇몇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었다. 당시엔 아빠의 회사 친구들이라고 엄마에게 들었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내 삶은 유환이와 많이 달랐다. 부모님은 늘 왁자지껄하고 좋은 자리에만 나와 동생을 데려갔다. 아버지와 가까운 동료들과의 식사자리나 아니면 어머니의 친구들과의 모임 같은 곳에 말이다. 동생인 수로가 태어난 다음부터는 그런 외식이 확 줄긴 했지만, 그래도 집으로 늘 보던 사람들을 초대해 다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또래 친구들도 만나게 됐고, 지금 생각해 보면 따뜻한 시간들이었다. 잘 웃지 않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보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이로야 괜찮아?"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지어보인 뒤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삶은 살지 않았던 것 같아. 그냥 그 나이에 맞게 항상 자랐어.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구나···"
오늘 대화의 분위기는 여러모로 평소와 달랐다. 괜히 유환이 얘기를 꺼냈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지던 중, 반장 준수가 헛기침을 하더니 이전처럼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현재 시설 내의 분위기라던가 그리고 변화한 점이 없는지 등 근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지수도 언제부턴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우리는 그렇게 최대한 슬픔 감정을 떨쳐내려는 듯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굳이 설명에 설명을 더해가며 억지로라도 말을 길게 만들었다. 그게 아예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닌지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귀신같이 4 도시 인솔 선생님이 다용도실로 들어왔다.
"자 이제 슬슬 돌아갈까 얘들아?"
"휴··· 네."
인솔 선생님의 말에 지수와 준수는 아쉬운 목소리로 대답한 뒤 가져왔던 노트 같은 것들을 주섬 주섬 가방에 넣었다. 나와 진수는 물끄러미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 못지않게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음 주에 또 오는 거야?"
내가 자리에 일어나며 묻자 지수와 준수가 당연하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 보고 싶다고 울지 마?"
"아··· 아니 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지수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내가 버벅거리며 대답하자 지수는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가 안 보고 싶다는 거지? 알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손을 휘저으며 변명하려 하자 지수는 재밌다는 듯 키득이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보던 인솔 선생님도 "좋을 때다."라고 하며 웃음 가득한 소리를 냈다. 다소 어두웠던 분위기가 마지막에 기분 좋게 전환되면서, 오늘은 왠지 웃으면서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어?"
먼저 문을 열고 나간 지수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마냥 문 앞에서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우리들은 그런 지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고, 거기서 지수가 마주한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환이잖아?"
유환이었다. 유환이는 남색으로 몸에 딱 맞춘 듯한 정장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고, 흰 와이셔츠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주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장 재킷에는 눈에 띄게 반짝거리는 금색 배지가 달려있었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그런 유환이를 보고 있으니 무언가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유환이 옆으로는 열명 정도 돼 보이는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예전에 아버지의 부하 직원들이 아버지를 대하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용인가 했었던 사무관부터, 장하나 주무관, 거기에 치안대 대대장까지 마치 유환이를 엄청나게 중요한 손님처럼 모시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가장 들어왔던 건 마치 일부러 맞춰 입은 듯이 똑같은 색과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있는 한 여자였다. 우리 또래인 것 같긴 했지만 칠흑같이 검은색의 긴 머리에 뭔가 더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유환이 바로 옆에서 어떤 문서들이 들어있는 폴더를 팔에 끼고 서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한 인물 납시었네."
지수는 그런 유환이와 그 옆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어서 아마 누군가 들어도 안 이상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환이 옆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소통 담당관님 친구분들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이 정기적인 방문일인 줄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아 참. 저는 박정아라고 합니다. 지금은 당에서 청년 대표이자 임시 거주시설 소통 담당관으로있는 김유환 대표님의 보좌를 맡고 있어요. 다른 분들은 다 아마 아실 것 같은데 저는 처음이라 일단 이렇게 인사드릴게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이지수고, 이 친구는 강준수, 그리고 여기 나란히 서있는 친구들은 2 도시에서 온 한이로, 오준수라고 해요."
지수가 차가운 어조로 그러나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어서 박정아 보좌관에게 대답했다. 뭔가 압도되는 분위기에 나와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박정아 보좌관도 그런 우리를 따라 가볍게 목례를 했다.
"다들 너무 만나 뵙게 돼서 기쁘네요. 특히 지수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역시 제가 들은 대로 엄청 미인이시네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안 좋아진 건지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지수는 더 이상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대답했고, 박정아 보좌관은 아까의 그 미소를 유지한 채로 유환이의 어깨에 한 손을 슬쩍 올려 보였다.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희 대표님이랑 말씀 나눌 시간이 필요하실까요? 저희가 일정이 조금 타이트하긴 한데 필요하시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도록···"
"아니에요 그냥 가죠."
박정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환이가 우리를 응시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박정아는 그런 유환이를 슬쩍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늘은 바빠서. 다음에 보자 다들."
"어··· 그래."
유환이는 그렇게 말을 남긴 뒤돌아서서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1층을 향해 내려갔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내려가는 걸 기다리는 데에도 몇 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지수는 물론이고 우리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방금 있었던 일이 우리와 유환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하게 된 순간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이없어."
침묵을 뚫고 지수가 먼저 그렇게 말했다. 나와 나머지 친구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고, 어느 정도 유환이네 사람들과 거리가 벌어진 걸 확인한 인솔 선생님은 그제야 지수와 준수를 데리고 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진수와 나는 긴장이 풀린 건지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환이는 이제 우리랑 못 만나는 걸까?"
진수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진수에게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답했다.
"글쎄··· 이제 우리랑 안 만나는 걸 수도."
어딘가 씁쓸한 기분과 함께 우리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로 향하는 도중에 동생이 있는 초급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진수와 함께 멈춰 서서 확인한 교실 안에서는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동생 수로가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4 도시 사람들은 전부 쓰레기가 맞다니까!"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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