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비현실 Ⅰ

#027. 비현실 Ⅰ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도 귓가에 선명히 들릴 정도로 말이다. 고급 원목으로 짜인 책상, 푹신하다 못해 구름 위에 있는 느낌이 드는 의자, 거기에 번쩍 거리는 만년필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나를 위한 맞춤 공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한 곳에 있다 보면 여러 생각에 잠기기 마련이었다. 당장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은 다름 아닌 어제 만난 애들의 모습이었다. 시설에서 어쩌다 마주칠 거라 아예 생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하필 그렇게 힘을 주고 가는 날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애들은 각자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2 도시 애들은 뭔가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고, 준수는 어딘가 예상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그리고 지수는··· 지수는 거의 이제 나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달라진 내 모습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도 들고, 그리고 그런 애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애들과 어울러 다니면서 희희낙락 거릴 수는 없는 위치였다. 아버지의 기대도 있고, 이제는 당의 기대와 지지도 전폭적으로 받기 시작하는 내가 이전처럼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애들을 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똑똑]
"들어오세요."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머리가 아파지려 할 때쯤, 생각의 틈을 깨는 노크 소리와 함께 박정아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아이보리 색상의 정장을 깔끔하게 갖춰 입고 있었는데, 오전에 봤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옷 갈아입고 온 거예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박정아는 마스크 속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옷매무새를 훑으며 나에게 되물었다.
"어때요? 이런 건 싫어하실까요?"
"아니요. 사실 뭘 입어도 문제가 안될 거예요. 부모님은 이미 박정아 씨를 많이 좋아하시는 모양이니까."
"그래요?"
이번엔 박정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어쩌다 이런 감정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애들과 멀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박정아와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런 모습 때문인지 양가 부모님들의 지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정확히 어떤 관계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연인에 근접한 아니면 이미 연인 같은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은 사석에서 처음 뵙게 돼서 너무 긴장되네요."
박정아는 긴장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나는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늘은 어머니가 박정아를 우리 집 저녁식사에 초대한 날이었다. 아마 유년기 때 행사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정도를 빼면 사실상 처음으로 어머니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 가볼까요?"
"좋아요."
아직도 조금은 긴장된 모습의 박정아를 이끌고 나는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이미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숙여 보였고, 나는 맞다는 듯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차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도시 외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보통 사람들의 퇴근시간보다 조금은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우리 앞을 가로막는 교통체증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박정아는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계속해서 깨물었고, 나는 긴장 말라는 듯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린 뒤, 우리는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통로들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박정아는 가는 길 내내 정말 숨소리도 안날정도로 조용히 있었고, 평소에 그렇게 똑부러지던 사람이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들어갈까요?"
내가 초인종 앞에서서 박정아에게 묻자 박정아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띵동]
"안녕하세요 어머님!"
"드디어 보는구나~! 어서 들어와라 둘 다. 많이 피곤하지?"
현관문이 열리고, 박정아 못지않게 힘을 잔뜩 준 듯한 어머니가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을 뽐내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런 어머니 뒤로 아버지가 인자한 모습으로 서있었고, 어딘가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의 집으로 우리는 발을 디뎠다.
"이쪽으로 와서 다들 앉으렴."
"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식탁에 평소에 보기힘든 여러 요리들이 올라와 있었다. 각종 고급 요리부터 친숙한 음식들까지, 마치 이 정도로 준비 해놓으면 좋아하는게 뭐라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생각나는 건 전부 차려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어머니가 뭔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정아는 절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준비 해주셔서."
"시장님 따님이 우리집에 온다는데 대충 준비할 수 있나? 하하하. 그럼 다들 먹자고."
"네! 잘먹겠습니다."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식사는 시작됐고 우리는 천천히 대화를 주고 받으며 식사를 즐겼다. 처음에는 박정아의 아버지인 시장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우리 가족 이야기도 하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가고 음식이 하나 둘 치워지며 과일과 차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조금씩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둘이 같이 시설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현장 상황은 어때?"
아버지가 일 얘기를 시작하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옆에서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졌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 뭐, 그냥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사람이 더 많아져서 그런지 더 활기차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나의 어정쩡한 대답에 아버지는 어딘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순간 지어 보였다.
"사람이 많아지면 안 좋은 거 아니니? 가뜩이나 재정상태가 안 좋다면서?"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묻자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던 박정아가 나를 대신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네. 어머님 말대로 상황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어제 우리 대표님과 현장 시찰을 하면서 이 상황을 타개할 몇 가지 방안들을 구상할 수 있었어요."
"오? 그래?"
박정아의 말에 아버지가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네. 그곳에 임시 학교라는 공간이 있어요. 시설 2층에 자리 잡은 곳인데 그 규모가 상당해요. 관리자인 정태용 사무관 말에 따르면 시설에서 가장 큰 공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가 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새 목을 빼고 박정아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박정아는 그런 부모님에게 살짝 미소 짓더니 옆에 앉은 나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청년 대표님은 그 공간을 현재 제한된 장소에 운영 중인 생산소를 확충하는 공간으로 전환해 보면 어떨까 싶어 하더라고요."
"학교를?"
어머니는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답했고, 아버지는 그게 사실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쉰 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공간은 상당해요. 만약 전환이 된다면 대략 계산해 봐도 현재 생산량의 두 배이상 늘릴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잉여상품이 나올 테고, 그걸 외부로 유통하면 어느 정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수익으로 적자 부분을 조금씩 메우는 거죠. 뭐···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모자라겠지만요."
"하지만 학교는 거기 있는 애들을 보살피는 곳 아니야? 만약에 그게 없어지면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니?"
어머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다시 박정아가 나를 대신해 답했다.
"아이들은 생산소에서 보조 업무를 맡으면 어떨까 싶어요. 위험하게 직접 생산을 하는 건 아니고 대신에 물건 포장 같은 정말 단순하고 안전한 일들을요."
"그래···? 음···"
어머니는 이게 좋은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생각에 잠겼던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여간··· 당신은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야. 지금 우리 시에서 계속 시설에 돈을 들이붓고 있는 상황인 건 알지? 불우 이웃 돕다가 불우 이웃 되게 생겼다 이 말이야.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저런 급진적인 해결책도 가끔은 필요해."
어머니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고, 박정아는 반색하며 그런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아무래도 유환 씨의 추진력과 결정력이 아버님께서 물려받은 게 맞나 보네요."
"하하하. 뭐 아예 없지는 않겠지?"
박정아는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아버지가 계속해서 웃는 모습에 조금은 놀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 상황을 지켜봤고, 박정아는 그런 나를 옅은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부시장님.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갑자기 가정부 아주머니가 달려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떨떠름한 얼굴로 가정부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아 들며 실례한다는 듯 한 손을 우리에게 들어 보였다.
"어, 무슨 일이야?"
근무 시간 외에 걸려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안 좋은 일들 때문이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왠지 안 좋은 소식으로 아버지를 찾는 게 아닐까 싶어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또? 이번엔 누군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씩 고조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이 맞는 것 같았다. 박정아는 조금 당황한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차분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고, 어머니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식탁 위의 과일만 하나씩 포크로 집고 있었다.
"하··· 그거 참. 알겠어 이따가 얘기하지."
통화가 끝난 아버지는 조금은 신경질 적으로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슬쩍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시설에서 사고가 하나 터졌어."
아버지는 담담하지만 어딘가 화가 잔뜩 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식탁 위로 받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 진짜 이 망할 놈의 시설 하나 때문에 도대체 하루도 조용히 가는 날이 없구만."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고, 어머니는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박정아와 나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또 왜 저래··· 일단 오늘 식사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 유환이 너는 정아 집까지 바래다주고 알겠지?"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너무 미안하네 이렇게 끝나버려서. 다음에 또 보자꾸나."
어머니와 박정아는 서로 포옹하며 다음을 기약했고, 우리가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모습을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애매하게 마무리된 저녁식사 자리를 뒤로하고 각자 핸드폰을 확인한 나와 박정아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짜증을 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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