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정체 Ⅲ

#042. 정체 Ⅲ
어색함이 사라진 우리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점이 조금 있다면, 전에는 유환이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 됐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유환이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로 시작하며 망설이는 모습도 보였다.
"... 아무튼, 지금은 그런 상황인 거야. 여기를 해방하려는 사람들과 옥죄려는 사람들 간의 힘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지. 나는 뭐··· 좋든 싫든 아버지 따라 옥죄는 사람들 편이지만···"
유환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눈치를 슬쩍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 안 할게. 예전에는 나도 아버지와 생각이 같았어. 아버지를 따르는 여러 사람들 중 하나였지, 물론··· 지금도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를 따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제 모르겠어. 나는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나의 질문에 유환이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들인 2 도시 사람들에게 이런 격리구역 수준의 환경을 제공하고 계속 가둬두는 일 말이야. 마치 보균자들 대하듯이."
"음···"
나는 유환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환이는 옅은 한숨을 내뱉더니 답답하다는 듯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사람들도 죽어가고 있잖아. 서로 싸우다가 죽고, 감염으로 죽고, 거기다 이제 치안대···"
유환이는 치안대 다음으로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아차 싶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런 유환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치안대 요원이 감염으로 죽었다는 거지?"
"...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나의 말에 유환이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요 며칠간 계속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녔거든. 그러다가 이제 막 그 사실을 알게 됐어. 물론, 이렇다 할 증거가 없으니까 그저 나 혼자만 아는 비밀 같은 거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기까지 알아낸 게 대단하네. 쉽지 않았을 텐데."
"뭐 운이 좋았던 거지···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 혼자 해낸 건 아니기도 하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말고 그걸 의심하는 사람들이 또 있어?"
유환이는 조금은 놀란 모습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그런 유환이를 슬쩍 쳐다본 뒤 식탁 위로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한··· 의심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나처럼 직접 여기저기 수소문 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어."
"거의 없다는 건.. 너 말고도 있긴 있다는 거야?"
유환이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그런 유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같은 방에 지내는 형이 하나 있어. 그 형도 이번에 누가 죽은 건지에 대해 의심이 많더라고··· 그 형은 지금 공무원들 중에 누군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야. 치안대 요원이라고는···"
'치안대 요원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려 했는데 순간 수진이 형 발 밑에서 발작하던 치안대 요원의 모습이 떠올라 말을 끝내지 못했다.
"괜찮아?"
유환이는 그러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정신 차리자는 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응. 잠깐 딴생각이 들었네. 아무튼··· 그 형은 공무원 하나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엔 부쩍 의심이 줄어든 모습이긴 하지만 말이야."
"흠··· 그렇구나···"
유환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치안대 요원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보통···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잖아. 그 엄청난 방역장비를 갖춘 치안대 요원이 감염으로 죽었다는 게···"
"음···"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했다.
"수소문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엿듣는 게 전부였어. 생산소에서 일하던 와중에 치안대 요원들이 잡담 나누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리고 그 주제가 죽은 치안대 요원이야기였고."
"... 그 치안대 요원에 대해 얘기한 거야?"
"응. 그리고 치안대 요원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얘기하더라고··· 무슨 시위 같은 걸 한다면서."
"아···"
유환이는 그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죽은 치안대 요원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한 동안 침묵 속에서 식어버린 차를 마셨다.
"그나저나··· 그러면 그 '소통의 장' 행사에서 이전처럼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침묵을 뚫고 먼저 말했다. 유환이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 놓은 게 없어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할 거야. 그래도··· 빨리 하면 2주 안으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유환이는 그렇게 말하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달력 같은 걸 확인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달력은 빈 곳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들로 꽉 차있는 것 같았다.
"아! 어쩌면 다음 주에라도 가능하겠는걸? 마침 혁신구역 층관리자 선발 행사도 비슷한 시기에 있어서 말이야. 층관리자들이 모일 때 몇 명 추가로 또 보겠다고 하고 추진하면 될 것 같아. 이건··· 일단 나도 애들 일정을 확인해봐야 하니까··· 만약에 다들 시간이 되면 다음 주에라도 볼 수 있겠어."
"그래? 나랑 진수는 괜찮으니까 네가 편한 대로 해줘··· 사실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보게 된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니까."
나의 말에 유환이는 아까처럼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내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지수?"
"아··· 음···"
나는 이렇다 할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고, 유환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다 안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다른 애들은 몰라도 지수는 꼭 데려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말끝을 흐렸고, 유환이는 재밌다는 듯 키득 소리를 내며 웃다가 꺼내둔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흠··· 이제 난 슬슬 가봐야겠어. 학교로 치면 땡땡이를 치고 나온 거라 오래 있기가 힘들거든."
"그래? 그럼 어서 가봐! 오늘 너무 고마웠어."
유환이는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으로 누군가가 둔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또 보자."
유환이의 말에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문이 열리며 치안대 요원이 두터운 복면을 들고 들어왔다.
"이동합니다."
치안대 요원은 망설임 없이 내 머리에 복면을 씌었고, 나는 그렇게 다시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천천히, 이번에는 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형아!"
"금방 온다더니···"
방으로 돌아오자 수로가 한걸음에 나에게로 달려왔다. 수로와 놀아주던 수진이 형은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쉬며 나를 맞아주었다.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뭘 하고 온 거야?"
수진이 형은 책상에 엎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런 형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요즘 이것저것 수소문하고 다닌 게 의심스러웠나 봐요. 그래서 대충 대답하니까 보내주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의 대답에 수진이 형은 몸을 번쩍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나는 거짓말이 들통났나 싶어 살짝 놀랐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음을 깨닫고는 침착한 모습으로 다시 답했다.
"형은 괜찮아요. 형 얘기는 하나도 안 했어요. 그냥 요 며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게 수상했나 봐요.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답했어요. 죽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봤다고··· 물론 2 도시 사람들 중에 있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아··· 그래···"
형은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나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음··· 공부하고 있었어요?"
내가 책상 위의 책들을 가리키며 묻자 수진이 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니라 네 동생 좀 가르쳐주고 있었지."
"음···"
책상 위에는 '감염병의 역사' 교과서가 있었다. 임시학교에서 내가 보던 책이었는데, 방 어딘가에 던져 놓았던 걸 용케 찾아낸 모양이었다.
"수로 나이대 애들에게 이건 너무 일러요."
내가 책을 가리키며 말하자 수진이 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이르다니? 감염병의 역사 과목이?"
"네. 이건 중급학교부터 보는 교과서잖아요."
수진이 형은 나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맞다는 듯 박수를 치고는 말했다.
"그렇네. 내가 깜빡했다. 공부한 지 하도 오래돼서 말이야. 하하하."
'그게 헷갈릴 수도 있나?'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로가 이해하기엔 꽤나 어려운 내용들일 텐데···"
"뭐··· 잘 따라오던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수진이 형의 말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우리 사이로 수로가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형은 보균자들 잘 알아?"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수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짱을 끼고는 뿌듯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보균자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야.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보균자들을 더 괴롭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처럼 격리구역이라는 곳에서 엄청 힘들게 살아야 해. 거기다가 매일 쓰레기장이랑 소각장 같은 위험한 곳에서 우리가 먹고 버린 것들을 보균자들이 다 정리해 줘. 보균자들은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야!"
"어··· 그래?"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교과서에는 반대로 보균자들이 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만 주로 적혀있는 편이었다. 수진이 형은 수로에게 뭘 어떻게 가르쳤든 간에 그것은 온전히 수진이 형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역시 수로가 똑똑하구먼. 한 번만 말해도 다 기억하다니."
수진이 형은 뭔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수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수진이 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이건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잖아요."
그러자 수진이 형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설마 너도 모르고 있던 거야?"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 수진이 형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나는 다시 한번 수진이 형에게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알아요··· 형이 보균자도 아니고, 하물며 거기서 살아본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그렇게 어이없다는 듯 대놓고 형을 비꼬듯 말하자 수진이 형은 이내 굳은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알아?"
"네?"
수진이 형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다시 물었다.
"보균자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아냐고."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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