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 어머니 손은 맵다
우수리스크 서쪽 외곽 지역이었다.
가옥의 굴뚝에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하나둘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마을 어귀에 대형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옛적 고려인 개척촌이라 불렸던 곳으로 강제 이주를 피한 고려인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은 외모가 비슷한 다민족 동양인 거주지역이 되어 있었다.
킴 빅토르와 초이 올렉산드로의 고향이다.
김찬영은 슬래브지붕을 올린 직사각형 모양의 가옥들을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낙후한 연변 변두리 같으면서도 반듯반듯한 게 동유럽 느낌이 났다.
15만 명이 사는 도시의 주변 마을임에도 차이가 컸다. 비포장도로에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해 공동 우물을 쓴다.
잃어버린 20년인 듯 70년대에서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초초, 얼마 만이지?”
“글쎄, 한 오 년쯤 됐나. 그때 입대하라고 막 그럴 때 집 나왔잖아.”
“아, 그랬구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재작년에 끝났다.
당시 전사자가 수십만 명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입대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전쟁 영웅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참전을 독려하는 선전을 해댄 것을 보면 거짓 소문은 아니었다.
소련은 의무병제로 법적 성인이 되는 18세부터 병역 대상자였다.
그 나이에 걸쳐 있던 킴 빅토르 등은 모집관이 마을을 들락거리며 압박을 가하자 집을 나갔다.
말이 가출이지 어른들이 전쟁터에서 개죽음당하지 말라고 등을 떠밀었다.
조금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전쟁이 길어져,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당국의 허락도 없이 거주지를 벗어나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처지여서 자연스레 지하 세계에 발을 담갔다.
농장 등에서 일손 거들고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가 2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면 고르바초프, 그 양반 덕을 봤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조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김찬영인지 킴 빅토르인지 헷갈릴 지경이네.”
눈뜨자마자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 빠르게 동기화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나는 킴 빅토르다.”
“미친놈아, 뭐하냐?”
“애들이나 깨워.”
마을 중심부에 회관을 보는 듯한 가옥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유서 깊은 킴 씨와 초이 씨 저택이었다.
김찬영은 트럭을 공터에 세우고 내리자 엉덩이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아우! 죽겠네.”
100km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런데 기차로 두 시간 반이고, 자동차는 한 시간 더 걸린다.
올렉산드로가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바로 들어갈 거야?”
“짐부터 확인······하려고 했는데 시간을 안 준다.”
차 소리를 들은 두 대가족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빅토르?”
“올렉산드로?”
*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손을 꼭 쥐고 있었고, 어머니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큼! 거 먼 길 와서 배고플 텐데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거야? 일 나갈 시간 다 됐어. 그만하고 밥 차려.”
무뚝뚝한 아버지가 구세주 역할을 해주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보게. 아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차려 줄게.”
어머니가 일어서자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쫓아 나갔다. 숙모, 고모, 이모 기타 등등 친척이었다.
김찬영에겐 낯선 광경이나 킴 빅토르는 익숙했다.
“너는 나 좀 보자.”
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숙부를 비롯한 남정네들이 따라 일어섰다.
집 밖에 나가자 그들은 일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도 태워. 아버지가 주는 건 괜찮다.”
“끊었어요.”
“별일이 다 있네. 꼬라지를 보아하니 사람 된 것 같지는 않고. 뭐 해 먹고 살았냐? 사고 치고 온 게냐?”
뒷머리를 벅벅 긁은 김찬영은 아버지를 모시고 트럭에 갔다. 짐칸 커버를 들춰 안을 보여주었다.
가득 쌓인 구호품 아래 피 묻은 총기류가 눈에 띄었다. 이 물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흐으음!”
“크흠!”
“허허! 이를 어째.”
다양한 반응 속에 김찬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 전에 쿠데타 터진 건 아시죠?”
‘8월 쿠데타’는 여러 급진개혁 정책을 시도하는 고르바초프에 반발해 공산당 보수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모스크바 시민 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쿠데타군과 맞서 싸워 결국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번에 컬러 테레비 들여놨다.”
뉴스에서 봤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소련 남자들처럼 TV를 껴안고 사는 사람이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잘 아시잖아요. 도시는 지금 전쟁터예요. 경찰은 있으나 마나고 깡패가 판을 쳐요. 내 것 지키고 억울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요.”
“집 나가서 주둥이만 살았구나. 그래 봤자 도둑놈 아니냐.”
“공산당은 다 도둑놈이라면서요? 도둑놈이 도둑놈 걸 훔쳤으니 잘 한 짓 아닌가요?”
아버지가 턱에 주름을 만들었다. 단단히 화난 표정이었다.
“그래서 깡패짓을 계속하겠다는 거야!”
“아니요! 사업을 할 겁니다. 저 물건을 씨드 머니로 해서요.”
사업가는 곧 마피아이던 시절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씨 뭐?”
“영어예요. 우리 말로 종잣돈.”
“허허! 네까진 놈이 무슨 사업을 한다고! 내 저건 모른 척하마. 헛소리 그만하고 형들 따라서 농사나 지어. 이번에 제법 넓은 땅을 빌렸다. 부지런히 일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게다.”
몇 해 전 집단 농장에서 벗어나 공동체 단위의 협동조합 농장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에게 농지를 빌려주는 제도가 생겼다. 사유재산을 인정한 것이다.
“농사짓기 힘드실 텐데요.”
좌천이래도 괜히 러시아에 보낸 것은 아니었다.
김찬영은 나름 러시아통이었다. IMF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제 깐에는 효도한답시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 출신은 버티고 버티면 최소 대령까지는 진급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라인만 잘 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이끌어 주십사 여기저기 기름칠을 해야 한다.
돈 없고 빽 없는 그는 재학 당시 불곰사업을 눈여겨봤다. 러시아에 정통한 전문가가 되면 희소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 불곰사업에 발을 걸치지는 못했어도 정보사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군인에 뜻을 두지 않은 탓인지 박봉에 진급은 늦어지고 상사 비위 맞추기 더러워 더 늦기 전에 대위로 예편했다.
솔직히 2010년은 여러 대기업이 러시아에 현지 공장을 세워 사업을 확대하던 시기라 길게 잴 것도 없었다.
정보사 장교 출신 러시아통은 메리트가 있으니까.
그랬는데 소련에 오게 될 줄이야.
“그건 또 뭔 헛소리야? 농사꾼이 농사를 왜 못 지어?”
“그··· 뭐더라? 땅문서 같은 거 받으셨어요?”
“땅문서? 땅문서 같은 소리 하네. 이놈아, 도둑놈들 나라에 우리 땅이 어딨어. 다 빼앗아 가기만 하지.”
“아직인가? 슬슬 나눠 줄 때가 됐는데······.”
아쉽게도 대략적인 흐름은 알지만, 시기 같은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놈의 자식이 애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뭘 처먹고 다녔길래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어!”
갑자기 나타난 올렉산드로가 진짜 헛소리를 내뱉었다.
“아버지! 저 새끼 대가리 총 맞아서 그래요. 죽다 살아났다니까요!”
“야!”
뒷목을 잡은 아버지가 한탄을 쏟아 냈다.
“뭐! 총에 맞아? 아이고! 개죽음당하지 말라고 내보냈더니! 총을 맞고 다녀. 이놈아,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는다. 어딜 도망가! 거기 안 서!”
*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떤 선물을 좋아할지 모를 뿐이다.
“미제라 그런가 맛나네.”
아버지가 사촌 형수에게 주려고 했던 분유통을 통째 들고 퍼먹으면서 한 말이었다.
서방 구호품은 주로 식량과 의약품, 생필품이었다. 포대에 담긴 곡식은 부피가 커서 통조림과 의약품, 생필품 위주로 챙겼다.
서양 제품은 암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돼 3톤 트럭 한 대가 대략 2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루블화로 암시장 환율로 환산하면 25만 루블쯤 되는데 회사원 50년치 월급이었다.
“호호호!”
여인네들은 설탕에 만세를 불렀고, 사내들은 소고기 통조림을 품에 넣었다. 안주용이었다.
김찬영은 빅토르의 가족이 좋아하는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나저나 저쪽 세상에 계신 부모님이 걱정이다. 아들이 비명횡사한 사실을 알면 기절하실지도 모른다.
실종자는 더 문제다. 아들 찾는다고 러시아행 비행기에 오르실지도. 찢어 죽일 쪽바리 새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를 처리해 찾지도 못할 텐데.
정보기관에서 요원들과 함께 사망처리 해주면 좋겠다.
“후우!”
“천장 안 무너진다. 뭘 잘했다고 한숨이야. 가만히 있어. 이놈아. 허이고! 어쩌면 좋아. 이 상처 좀 봐.”
짝!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은 어디든 매웠다.
“아야! 엄마, 아파!”
“망할 놈의 새끼! 이 꼴로 한 번만 더 기어들어 오기만 해봐. 그때는 그냥······. 움직이지 마!”
그럼에도 약을 발라주는 손길은 따뜻했다.
“형님, 이참에 장남 장가보내지요. 대가 끊기면 어쩌요. 손주라도 받아 나야지.”
김찬영은 흠칫했다. 선물로 위기를 넘기나 했더니 더 큰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결혼은 한 번이면······ 아!”
“뭐여? 색시 봤는가?”
봤다. 조기유학 보낸 딸내미 돌본답시고 따라가 바람이 나서 그렇지. 딸내미도 백인 새아빠와 승마를 즐기며 잘 지내고 있었다.
젠장할!
“보긴 뭘 봐요. 작은 엄마는 괜한 소리를 하셔. 장가는 아무나 가요.”
김찬영은 다급히 자리를 피했다. 누구네 딸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 같은 욕실에 들어가 씻으려 하자 한숨만 나왔다. 없다. 아무것도.
“비누가······.”
찰흙 덩어리 같은 게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문득 상점 앞에 배급표를 들고 길게 줄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경제 악화로 생필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배급제를 시행했다.
그럼에도 비누, 화장지, 세제 같은 일상용품은 물론이거니와 생필품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하나같이 꾀죄죄한 모습이 바로 이해가 됐다.
“쩝! 트럭에 비누가 있나 모르겠네.”
있었다. 킴 빅토르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챙겼으니 말이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거울을 봤더니.
“남자답게 생겼구만.”
눈뜨자마자 총격전이었다. 살인에, 범행 현장 조작, 긴 도주.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바쁘게 움직여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나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제야 얼굴을 봤다. 제법 괜찮다.
높은 콧대에 눈덩이가 푹 들어간 게 슬라브족 피가 섞인 것 같았다.
“삼시세끼 밥하는 배우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으음!”
*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었다.
“그대로네.”
이제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애송이 삼인방을 깨워 밖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소련에서 술, 특히 보드카는 필수품이었다.
아무리 고르바초프가 금주운동을 벌여 공장이 멈췄어도 음주를 막지 못했다. 밀주를 파는 암시장만 키워줬을 뿐이지.
“크흑! 형님, 막걸리 맛이 기가 막혀요.”
늦둥이 막내 삼촌 킴 드미트리가 아버지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농사에 일가견이 있는 고려인들은 개인 경작지 덕분에 그나마 곡식은 충분했다.
“그냐? 안주가 맛있어서 그런가 입에 쩍쩍 붙는구먼.”
“이 깡통 쇠고기 말이오. 시장에 내다 팔면 돈 좀 되겠는데요.”
이때다 싶은 김찬영이 끼어들었다.
“암시장요?”
“콜호즈.”
계획 경제 체제에서 원칙적으로 개인 간 거래하는 시장은 없다.
콜호즈 바자르, 집단 농장 시장은 비공식적인 시장으로 텃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거래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당근이랑 바꿀 생각 없어요.”
“사업하겠다는 놈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몰라. 헛똑똑아, 농장 시장에 가봐라. 놀라 자빠질 거다.”
시장 규모가 몇 년 사이 엄청나게 커졌다고 한다.
훗날 우수리스크 농산물 시장은 극동지역 전체에 농·수산물을 공급하는 물류의 허브가 된다.
김찬영은 돌연 애칭까지 쓰며 친한 척했다.
“디마 삼촌이 시장 사장하실래요?”
“뭐? 시켜만 주면 못할 것도 없지. 잘난 조카 둬서 팔자에도 없는 사장 노릇 하겠네.”
드미트리가 목소리를 높이자 폭소가 터졌다.
“하하하! 나도 한자리 주냐?”
“에라이, 썩을 놈아. 바람만 잔뜩 들어서. 저거저거 장가가야 정신 차리려나.”
친척들의 비웃음은 몇 달 남지 않았다.
집단 농장이 해체되고 민영화되는 것처럼 농장 시장도 같은 길을 간다.
“디마 사장님.”
“듣기는 좋네. 왜?”
“KGB에 아는 사람 있다면서요?”
“어헛! 말조심해.”
인민에게 KGB는 공포의 대명사였다. 괜히 주위를 둘러본 드미트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있지. 소개시켜 주랴?”
“내일 통조림 몇 개 챙겨드릴게요.”
뇌물을 떠나 궁금해서라도 달려올 것이다.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작과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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