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 신 앞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매우 화창한 날이었다.
마트베이 루킨은 자신의 밝은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입단 시험을 본다고 하니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나온 길이었다.
늦은 오후에 오라고 했지만, 마음이 급해 서둘렀다.
그는 자전거에 올라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20여 분을 달려 드디어 자동차 경주장 도로에 들어섰다.
도로 끝에 스포츠단 상무팀 훈련장이 있었다.
공장 폐수로 썩은 개천 냄새를 맡으며 신나게 달리다가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브레이크를 잡았다.
“허! 왜 이렇게 많아?”
저 멀리 훈련장 앞에 사내들이 바글바글했다.
“망할 새끼, 아무나 소개 시켜 주지 않는다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루킨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각오를 다지면 본관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막혔다.
거의 2m에 육박하는 거구가 눈을 쫙 깔고 고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누구 추천이야?”
“그, 그게 그러니까······ 저기 술집에서 일하는.”
니콜라이 체르카소프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잘랐다.
“꺼져.”
보스는 분명 형제들이 추천한 후보자만 받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말이 샜는지 자동차 패거리에게 알려져 어중이떠중이가 몰려왔다.
“한 번만 기회를 주··· 컥!”
체르카소프가 루킨의 멱살을 잡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는 창립 멤버로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싶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루킨을 내동댕이치고는 체육관 한편을 노려보았다. 이 사달을 만든 주인공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니들 이따 보자.”
또한, 보스는 시험을 본다고 했다. 필기시험은 아닐 테니 정당하게 죄를 물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쫓겨난 루킨은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왜 사내들이 체육관 밖에서 너구리 소굴을 만들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끙! 카악, 퇫!”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고는 체육관을 향해 침을 뱉었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푸자노프, 개새끼 만나기만 해봐라.”
돌아가려는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줄담배를 피워대는 사내들을 보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사실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었다.
“거 불 좀 빌립시다.”
*
밖의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찬영은 별관 사무실에서 이반 두코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얘길 왜 이제 해. 그 사람 지금 뭐하는데?”
서류와 씨름하는 모습을 본 두코프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극동연방 대학교의 전신인 블라디보스토크대 경제학과를 나온 친인척이 있다는 것이다.
“대외무역은행에서 근무하는데 그쪽 사정도 좋지 않은가 봅니다.”
소련 대외무역은행은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를 담당하는 곳이다.
당연히 국영 은행으로 곡물 수출 공사 같은 회사에 재정 지원은 물론 무역과 관련된 금융 업무를 맡고 있었다.
현재 소련은 외환보유고가 텅 비어 물자를 수입하지도 못한다.
에너지 자원을 팔아 달러를 벌어야 하는데 미국과 맞짱 뜨다가 서방의 경제 제재를 당한 상태에서 유가마저 떡낙 했다.
수출입 업무가 마비 상태였다.
“굿! 데려, 아니 당장 모셔와. 그런 능력자 더 없나. 금융, 법률 이쪽 계통 전문가 말이야.”
“하하! 알아보겠습니다.”
“둘이 있을 땐 말 편하게 해. 그건 그렇고 포그라니치니 잘 다녀왔어? 폴타브카와 비교하면 어때?”
두 곳 모두 국경 도시다. 폴타브카는 우수리스크와 가깝고 포그라니치니는 북쪽으로 100km가량 올라가야 한다.
전자는 시골 소도시, 후자는 인구 1만 명 규모의 중소도시라는 점이 다르다.
“제 생각에는 포그라니치니가 나아 보여요. 아예 도시 전체가 밀무역에 가담한 것 같아요.”
극동 지역은 젖줄인 시베리아 횡단 철도 노선을 따라 발전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우수리스크를 거쳐 항카 호수 북동쪽으로 향하는데 포그라니치니는 정반대인 북서쪽에 있었다.
흔히 말하는 사각지대다.
밀무역하기엔 최적의 장소지만,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유통이 어렵다.
“구심점이 있을 거야. 누군지 알아보고 거래를 트자고. 밀수품 팔아 주겠다는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물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무리해서라도 비축해야 할 시점이었다.
부으으응! 끼이익! 툴툴툴툴!
밖에서 차량 소음이 나자 김찬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합회 직원을 끝으로 조직원이 다 모였다.
*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서른에 달하는 한인 조직원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후보자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찬영은 그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 본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체육관 상황이 가관이었다.
두 패로 갈라져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왜 당장이라도 한 판 붙을 듯 으르렁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 무리의 리더를 불렀다.
“율리안! 토박!”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골치가 아팠다.
형제들은 개나 소나 데려와 화가 났고, 자동차 패는 무시 당해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나 후보자 추천을 하는 줄 알아!”
“우리가 뭐 어때서! 보스께서 받아 주셨잖아! 우리도 조직원이야!”
“그만!”
김찬영은 이마를 짚었다. 분명 토박 쪽의 잘못이었다.
솔직히 자동차 패는 양아치나 다름없어 정식 조직원 감이 못 된다. 곁에 두고 지켜보면서 옥석을 가릴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처지도 모르고 덜컥 후보자를 데려왔다.
무엇보다 애송이 삼인방처럼 인턴 생활을 하지도 않고 무작정 데리고 와서 정직원을 시켜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김찬영은 조직원을 불러모았다.
입단식은 소속감을 키우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준비했다.
그런데 오히려 분열을 초래했다.
잘잘못을 떠나 늦기 전에 봉합해야 한다.
아무 말 없이 대뜸 고개를 숙였다.
“내 잘못이다. 사과한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조직원들이 당황했다.
“보, 보스.”
“아니 왜······?”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무게를 잔뜩 잡았다.
“너희는 느끼지 못할 테지만, 세상이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윗분들께 부여받은 임무를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내가 욕심을 부렸다. 원칙대로 입단식에 앞서 오랜 시간 지켜봤어야 했다.”
신뢰할 수 있는 후보자를 선별하는 과정이다. 인턴 기간에 충성심과 능력을 살핀다.
“입단식은 우리의 목숨을 지켜줄 형제와 인연을 맺는 날이다. 지금도 서로를 못 믿는데 후보자로 데려온 자들을 믿을 수 있겠나.”
무언가 느끼는 게 있는지 조직원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좀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대검을 바닥에 던졌다.
채엥!
모두의 시선이 대검에 쏠렸다.
이제부터 쇼타임이다.
카리스마 뿜뿜, 하면 큰 칼 차고 광화문에 서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장군님이 최고 아니던가.
김찬영은 장군님을 떠올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나는 적을 죽여 조직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저자들의 충성심을 어떻게 증명할 건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자만이 조직에 들어올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조직의 명예에 똥칠하게 생겼어. 이를 어찌한다.”
후보자라고 데려와 놓고 그냥 돌려보내면 입방아에 오른다는 뜻이었다.
김찬영은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이번 한 번은 윗분께 잘 말해 보마.”
“가, 감사.”
“그러나! 아무나 받을 수는 없다. 율리안, 이반, 니콜라이, 예고르, 보리스!”
창립 멤버 다섯 명의 이름을 나열했다.
“예, 보스!”
“너희가 후보자들을 죽을 때까지 굴려라. 공정하게 모두.”
“죽을 때··· 까지요?”
두코프가 냉큼 받았다.
“알겠습니다, 보스. 선수 선발하듯 쭉정이를 걸러내겠습니다.”
“인내심이 강한 자를 우선하도록.”
그 말만 남기고 나가 버렸다.
*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규칙적으로 울리던 호각 소리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셔틀 런 테스트로 예비 후보자가 반쯤 떨어져 나갔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본관에서 나는 곡소리가 멈출 때쯤 김찬영은 체육관을 찾아갔다.
지독한 땀 냄새가 그를 반겨주었다.
창고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운동 기구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상무군답게 체육관을 피지컬 검사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 깔린 매트와 사각 링을 보니 피지컬만 테스트한 건 아니었다.
“보스, 오셨습니까!”
창립 멤버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하나같이 시원한 맥주라도 마신 듯 상쾌한 표정이었다.
반면, 2층 난간에서 테스트를 지켜봤던 자동차 패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묻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저 친구들이야?”
잔뜩 군기가 든 채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있는 모습이 신병 교육대 훈련병을 보는 듯했다.
율리안이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우리 후보는 다 합격했고. 한인도 거의 남았어···습니다.”
“상태가 영······.”
정말 죽을 때까지 굴린 듯 넋이 빠져 있었다. 두들겨 맞아 얼굴이 팅팅 부은 자들도 많았다.
김찬영은 그들을 살피며 물었다.
“일부러 숫자 맞췄어?”
“그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비슷하게 됐습니다.”
두코프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작품 같았다.
자동차 패는 한두 명씩 후보자를 데려왔다. 거의 50명이었다. 남은 자들은 10여 명.
공교롭게 각 패의 후보자 수가 비슷했다.
“고생했다. 체육관 정리해.”
“예, 보스.”
재밌는 건 자동차 패가 후보자만큼이나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그 덕에 순식간에 정리를 마쳤다.
김찬영은 단상에 올라갔다. 아흔 명에 달하는 조직원을 내려다보자 조금은 상기되었다.
창립 멤버와 애송이 삼인방을 우대해 단상에 오르게 했다.
“두코프, 누가 대표로 선서를 했으면 좋겠어?”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에스피르 토박이 적임자 같습니다.”
겪을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
토박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떨었다. 처음엔 보리 갱단을 흉내내는 정도라 생각했다.
듣도 보도 못한 카레이스키 오르가니자치야라는데 어떻게 믿겠나.
그런데 선서문 내용을 보니 오랜 전통이 느껴졌다.
그때 보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카레이스키 오르가니자치야 입단식을 거행하겠다. 대표의 선창에 맞춰 충성 서약을 한다.”
그가 턱짓을 보냈다.
길게 숨을 고른 토박은 선언문을 힘차게 낭독했다.
“나는 카레이스키 조직에 충성을 바치며, 조직의 모든 명령에 따를 것을 신 앞에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나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며, 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싸울 것입니다!”
“나는 조직의 비밀과 법과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위반 시에는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받겠습니다!”
“나는 조직의 품위를 해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형제들을 돕고 지원하겠습니다!”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배신자는 무조건 죽는다, 수용소는 본인이 가라, 가오 죽지 마라, 등등의 나머지 조항을 외쳤다.
“이상으로 충성 서약을 마칩니다!”
김찬영은 환영하는 의미의 손뼉을 쳤다. 기존 형제들이 따라 하면서 서열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가 토박에게 물었다.
“토박, 별명이 뭐야?”
“보르(도둑)입니다.”
“너랑 있으면 지갑 조심해야겠네.”
엄숙한 순간에 보스가 농담을 던지자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며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볼크(늑대), 앞으로 네 별명이다. 적의 숨통을 물어뜯는 늑대가 되라.”
“감사합니다, 보스!”
새로운 별명 수여식이었다. 별명은 조직에서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별명이 늑대가 된 토박은 무리를 이끌고 적을 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김찬영은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만 별명을 내렸다.
“멋진 별명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누가 가져갈지 기대하겠다.”
“와아아아!”
“후후! 좋아하긴 아직 일러. 지금부터 진짜 시험을 치를 것이다.”
그러고는 준비해 놓았던 달러 다발과 권총을 꺼내 흔들어 보이고는 돈을 깔고 그 위에 총을 올려놓았다.
“최후의 승자가 이 상품을 차지한다! 시작해라!”
“······?”
“뭣들 하는.”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쿵쿵 소리가 나더니 체르카소프가 쏜살같이 튀어나가 육중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뛰어 내린 그는 토박에게 달려들었다.
“이따 보자고 했지.”
옷깃을 잡았다 싶은 순간 토박의 몸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무제한급 유도선수의 위엄이었다.
“으아악!”
체육관에 메아리치는 비명이 시험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본인의 무력을 선보이라는 것.
“으아아아!”
“으랏차!”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무리를 나눠 패싸움을 벌였으나 점차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오오오옷!”
단상에 있던 형제들이 흥에 취해 뛰어내리고 김찬영 홀로 남았다.
“사내자식들은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지. 그럼 나도 놀아 볼까나.”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등은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호 및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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