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 나는 모르는 일이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연해주 서남단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의 끝부분을 파고든 금각만 안쪽에 자리했다.
극동지역 해상 무역의 본거지이자 군사 거점으로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고 있다.
따라서 무역 및 여객, 군사 기지 등의 다목적 복합 항구로서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무역항, 여객항, 군항을 두었다.
노선이 많지 않은 여객항은 무역항의 부속 항구처럼 운영되었으며, 군항은 해군에서 독자적으로 관리한다.
늦은 아침.
일단의 차량 행렬이 태평양 함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군항을 지나 기차역과 이웃한 무역항 초입 경비초소에 도착했다.
경비병과 몇 마디 나누고는 거수경례를 받으며 당당히 통과했다.
무역항은 한때 5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던 대형 항구답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종합무역항으로 일반화물, 컨테이너·보세지역, 수산물, 광물자원 등 각각의 전용 부두를 갖추어 구역이 나뉘어 있다.
차량이 속도를 늦추자 탑승자들은 목을 빼고 항만 시설과 하역, 선적 등 물류 작업을 구경했다. 그들은 아프간 참전 영웅전우회 용사들이었다.
“이야! 가까이서 보니 겁나 크구나.”
“저게 컨테이너선이라는 거지?”
“난 군함이 제일 큰 줄 알았는데 화물선이 더 크네.”
이윽고 수산물 전용 부두에 도착했다.
차량에서 백수십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자 항만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현장 관리자가 버럭했다.
“구경났어? 일 안 할 거야!”
작업 재개를 지시하고는 무전기를 입에 댔다.
“빈대 새끼들 떴어. 어, 어, 그래. 피 빨아 먹기 전에 잡아야지.”
항만의 물류와 선적·하역 작업을 담당하는 여러 업체가 모여 항만조합을 이루었다.
소련이 강대국 시절 살만했을 때는 노동 배치 계획에 따라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러나 재정이 바닥나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노동자가 대폭 감소했다.
이때부터 고용 형태에 변화가 생겼다. 국영 수산물 무역회사에서 자금을 융통해 그때그때 부족한 인력을 고용한 것이다.
그렇게 항만조합이 인력사무소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부분에 이권이 걸려 있다.
일자리 소개비.
그리고 비공식적인 무역, 밀수.
그러니 부두 끝 쓰레기가 쌓인 창고에 몰려가는 자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가 콧방귀를 끼며 몸을 돌렸다.
“흥! 며칠이나 가나 보자.”
*
“하하! 킴 대표, 어젠 잘 들어가셨소?”
항만 경비대 대대장 일리야 키슬랴크 중령이 김찬영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음이 맞는 분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쌩쌩합니다. 오늘도 달려 보쉴? 생각이 있으신지요?”
이반 샤바로프 사단장의 소개로 만나 찐하게 친분을 나누었다.
국제 항구와 해안은 국경의 개념이어서 항만 경비대는 국경군 소속이다.
“하하하! 좋지요. 우리는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소.”
잡스러운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함께 경비대 본부를 나섰다.
항만청 관리본부로 가는 길이었다.
“말했다시피 최고 감독관은 당서기 사람이오. 내가 언질을 주었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요. 어쩌면 킴 대표가 의장 줄을 타고 내려와서 견제하려 들지도 모르오.”
최고 감독관은 항만청 수장을 가리킨다.
“대장님이 계신 데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사실 당서기의 권력은 바람 앞의 촛불이다. 쿠데타 실패 후 소련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회수할 시기였지만, 두 명의 최고 권력자가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벌이느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3주 뒤 12월 초, KGB 해체가 새시대가 왔음을 알리면서 구시대의 산물인 공산당은 유명무실해진다.
또 3주 뒤 전격적으로 소련 해체를 선언하는 순간 완전히 권력을 잃게 된다.
관리본부에 도착하자 선객이 와있었다.
두 무리로 수산물 무역회사와 항만조합이었다. 그리고 상석에 최고 감독관과 고위직들이 앉아 있었다.
일명 항만 트라이앵글. 저 빈틈없는 삼각 편대로 엄청나게 해 먹고 있다.
물론 저들의 뒤에는 권력자가 도사린다.
항만청은 공산당, 무역회사는 노멘클라투라(고위 관료), 항만조합은 보리 갱단이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
최고 감독관이 경비대장 키슬랴크와 김찬영을 번갈아 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떻게 둘이 같이 들어와요? 아는 사이요?”
김찬영이 빈자리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이반 샤바로프 사단장님 소개로 만났소만. 무슨 문제라도?”
“이봐, 젊은 친구. 건방 떨 자리가 아니야.”
항만조합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들은 누구와 달리 밤새 달려 속이 쓰린 듯 인상을 벅벅 긁고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키슬랴크가 끼어들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잘됐습니다. 인사들 나눕시다. 여기 이 분이 고려 무역 킴 대표요.”
“반갑소. 킴 빅토르요.”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장부터 국경군 사단장을 들먹거려 계산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힘이 빠졌어도 KGB는 KGB다. 거기에 국경군까지.
대형 기업인 극동 수산 간부가 먼저 견적을 뽑은 듯 입을 열었다.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들었지만. 해산물을 배분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이미 진행 중인 수출 건을 당신들에게 넘겨 줄 수도 없고, 넘겨 준다 해도 바로 클레임 먹죠. 수입회사에. 혹 아실랑가?”
“바이어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계약 내용을 준수하면 바로! 클레임을 걸지는 않죠. 어쨌든, 오더(주문)는 벌써 땄소. 아마 지금쯤 엘씨(신용장)를 개설했을 거요. 바이어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FOB를 받아주더군요.”
FOB(Free On Board)는 바이어가 운송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을 말한다.
“······.”
우습게 봤던 젊은 사장이 전문가 포스를 뽐내자 무역회사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더구나 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일단 한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항만에서 쫓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업관리국을 압박해 해산물 배분을 받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제 공은 항만조합에 넘어갔다.
각 부두를 대표하는 4명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의 탈을 쓴 깡패다.
“장비가 낡아 툭하면 고장이 나서 큰일이오. 빌려줄 장비가 없으니.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일꾼 고용 계획을 미리 올려야 하는데 그것도 문제군. 선적이 한참 밀리겠소.”
대놓고 업무 방해를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영웅 물류가 새로 생겼더군. 그쪽에 맡겨 보려는데···, 그전에 장비가 당신들 건가.”
모든 게 국가 소유다.
“그렇지만 우리 손때가 많이 묻어 있지. 초보자는 쓰기 힘들 정도로. 나도 뭣 좀 물어봅시다. 그자들, 그쪽 사람이오?”
김찬영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허가받을 때 도움을 준 게 다요.”
“실례했소. 아무튼, 선적 날짜가 나오면 알려주시오. 최대한 힘 써 보리다. 뒤로 한참 밀릴 것 같지마는.”
가벼운 신경전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부관이 키슬랴크에게 귀엣말을 전했다.
“흠! 킴 대표, 부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소. 고려 수산 창고를 치우다가 싸움이 일어났다는군요.”
그러면서 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보그단이란 이름을 가진 물류업자였다.
“당신 짓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아.”
“난 모르는 일이오.”
*
창고 청소를 마친 용사들은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고 몸에서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환하게 웃었다,
“이곳이 오늘부터 우리의 일터란 말이지.”
“흐흐흐! 앞으로 생선은 배 터지게 먹겠다.”
실직자가 넘쳐나는 어려운 시절. 멋모르고 시위 한 번 했다가 꿈의 직장을 얻었다.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장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이런 기회를 준 젊은 보스에게 고마웠으며,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온다! 손님 맞을 준비 해라!”
그들의 자랑스러운 첫 임무는 청소였다. 창고 청소뿐만이 아니라 부두에 기생하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포함된다.
“받아. 보스의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바실리 살티코프가 킴 드미트리에게 짧은 쇠몽둥이를 내밀었다.
드미트리가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쇠몽둥이를 대검 다루듯 휘둘렀다.
“옛날 생각나네.”
“반야 협곡의 도살자가 깨어났구먼.”
적에게 포위당해 몰살 직전까지 갔던 전투로 처절한 백병전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
드미트리는 그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도살자’란 별명을 얻었다.
아무래도 킴 가문 핏줄엔 싸움꾼 DNA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살티코프는 무기를 품은 채 대기 중인 전우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잊지 마. 전투력 상실이 목표다.”
죽이지 말고, 어디 한군데 못 쓰게 만들라는 소리였다.
그때 전통 씨름 코레쉬 선수 같은 놈이 배를 내밀며 다가왔다. 그 뒤로 1개 중대급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배불뚝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와. 발목에 닻을 달아 바다에 던져 버리기 전에 썩 꺼져!”
살티코프가 빈정대며 받아쳤다.
“방금 거 신선했다. 우린 거시기를 잘라 목구멍에 처넣는다고 하는데. 해줄까?”
“허! 파도가 날 이기겠어, 네가 날 이기겠어?”
“아휴! 좆만아, 사람 봐가면서 이빨을 들이대라. 우린 너희랑 수준이 달라.”
말싸움이 길게 이어지자 드미트리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주청사 앞에서도 그렇고 너무 오래 쉬어 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가 냅다 쇠몽둥이로 휘둘렀다.
빠악!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배불뚝이가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휴! 깜짝이야. 디미트리, 말 좀 하고 들어와.”
“뭣들 해? 가자!”
“우와아아!”
사기 충만한 참전용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창고에서 뛰어나갔다.
부두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
“뭐? 우리가 깨졌단 말이야?”
보그단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힘 좋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골라 뽑은 행동대로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을 관리자에 앉혔다.
아무리 참전용사라고 해도 모두가 일당백일 수는 없다.
“겁만 주랬더니 일이 왜 그 지경이 된 거야?”
“놈들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끄응! 개새끼들, 작정하고 들어 왔네.”
패싸움은 기세 싸움이다. 단단히 준비한 놈들에게 밀려 무너진 것이었다.
“분명히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있어.”
자신의 뒤에 센트랄니 패가 있었다. 그들에게 대적할 조직은 도시를 양분하는 체사레비치 패밖에 없었다.
보그단은 이마를 짚었다. 잔뜩 겁을 준 다음 물류 일을 조금씩 주면서 흡수하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처음부터 4개 구역 행동대를 전부 동원했어야 했다.
체면이 말은 아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나야. 벌써 들었어? 아니야. 뒤에 체사레비치 패 놈들이 있어. 그래, 그놈들. 그래서······.”
다른 구역장들도 위기감을 느낀 듯 순순히 응해 주었다.
“상한 애들이 좀 있어서 다음 주에 날 잡자고. 어, 들어가.”
고액의 용역비가 나가겠지만, 밥그릇 빼앗기게 생겼는데 돈이 대수인가.
해결책을 마련했으니 이제 내부 단속을 할 차례였다.
보그단은 간부들을 불러 값비싼 양주를 대접했다.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고는.
“다음 주에 박살 내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그 순간,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곧 비명이 울렸다. 습격이다.
보그단이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쾅!
항만청에서 만났던 고려인 사장놈이 문밖에 서 있었다.
“네놈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나 싶은 순간 김찬영은 대여섯 발짝의 간격을 눈 깜작할 사이에 좁혔다.
“하앗!”
테이블 끝에 선 놈이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을 날렸다.
앞으로 고개를 숙여 피하며 크로스 카운트 쳤다. 그런데 손에 역수로 그립을 잡은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서걱!
망설임 없이 목을 베고는 몸을 옆으로 틀었다. 놀라 입을 반쯤 벌린 놈이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었다.
반대 손으로 아래턱을 쳐올렸다. 목이 훤히 드러나자 그대로 베었다. 모두 죽이겠다는 듯 손길에 인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탁자에 뛰어오르자 뒤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따라온 집행자 박춘배였다.
뒤는 그에게 맡기고 보그단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
그가 양주병을 휘둘러 위협했으나 그의 품 안에 몸을 던지며 한쪽 팔로 막고 어깻죽지를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동맥에서 피가 뿜어지기 전에 어깨와 목 사이를 찔렀으며, 울컥 뿜어질 때는 칼끝이 심장을 파고든 뒤였다.
“끄으으윽!”
숨이 넘어가는 놈을 밀치고 몸을 돌렸다. 올렉산드로가 가세해 잔당을 소탕하고 있었다.
김찬영은 나이프를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건물이 조용해질 무렵 행동대 팀장 니콜라이 체르카소프가 들어왔다.
“보스, 목격자는 없습니다.”
“고생했다. 여기 깨끗이 뒷정리하고, 저놈 대가리는 극동 수산 사장한테 보내.”
그들이 떠난 자리는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새롭게 단장한 고려 무역 사무실에 키슬랴크 경비대장이 찾아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보그만 일당이 밤새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혹시 아는 것 있소?”
김찬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등은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호 및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