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했습니다
“Здорово, брат.(안녕, 형제.)”
“안녕, 형제.”
백발노인과 흑발청년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둘러싼 10여 명의 사람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스베틀란스카야 거리에 있는 고려 무역 사무실이었다.
김찬영은 금괴 수송단과 함께 내려온 크라이 오르가니자치야의 파한(보스) 아나톨리 추바이스에게 예의를 다했다.
그는 크라이 조직 세 명의 빅보스 중의 한 명이었다.
같은 보스라도 ‘스훗키’라는 빅보스 협의체의 구성원과는 엄연히 서열을 구분한다.
본사 최고 경영진과 자회사 사장의 차이였다.
추바이스가 보드카로 입을 축이고는 말했다.
“다시 한번 고향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이. 지금처럼 형제로서 우정을 이어 갔으면 하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변치 않는 우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시작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으이. 신뢰의 증표는 잘 받았네.”
라스베이거스에서 세탁한 돈을 바하마 은행 계좌에 입금하여 건네주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돈이라 마음껏 꺼내 쓸 수 있었다.
다만, 아직은 러시아에 외환 시장이 열리지 않아 해외에서만 입출금이 가능하다.
“저희도 잘 받았습니다. 대금 지급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금괴 판매 대행을 말함이었다.
현재 국제 금 시세는 1kg에 대략 9천5백 달러로 1온스 당 300달러 꼴이었다.
여기에 각 나라의 관세와 소비세(부가가치세)가 붙어 시가를 형성한다. 투자용 금은 면세지만, 순금 금반지에는 소비세가 붙는다.
한국의 경우 세금이 20%가량이었다.
마약과 총기는 생산지 원가가 10분지 1이지만, 금은 전혀 다르다. 최소액이 국제 금 시세다.
시중에 유통된 금 밀수에 해당하는 사항이고, 불법 채굴로 캐낸 금은 이윤이 많이 남는다.
카레이스키 조직은 국제 시세의 60% 가격에 구매했다.
금괴 3백kg의 이윤이 대략 1백만 달러. 크라이 조직의 판매 대행 수수료 수익의 20%, 12만 달러를 더하면, 이번 금괴 밀수로 1백 1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바하마 계좌로 넣어주게.”
“예, 깨끗하게 돌려서 입금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로 또 5만 달러를 벌었다.
그렇다고 크라이 조직이 손해는 아니었다. 돈세탁 수수료가 30%에서 15%로 낮아졌으니 말이다.
“그래,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약을 어디서 들여오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중국하고 중앙아시아네.”
“중앙아시아에는 형제가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중앙아시아에는 보리 갱단이 없다.
보리는 가슴에 성당 문신을 하고, 손가락에 새긴 십자가로 높은 신분을 나타내듯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반면,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계 공화국들이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정도는 아니어도 정교회 신자와 손잡고 보리 갱단의 형제가 되지는 않는다.
“맞네. 듣자 하니 ‘차르’라는 족보도 없는 양아치들이 우리를 흉내내는 모양이더군.”
차르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양국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었다.
“타바르 갱단도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그자들이 아프간의 마약을 서쪽으로 옮깁니다.”
운반책이었다. 판매는 주로 모스크바의 솔른체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탐보프스카야 같은 대조직이 한다.
추바이스가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도 생각해 본 적이 있네만, 그곳에서 활동하기 쉽지 않을 걸세.”
“타지키스탄 국경만 손에 넣으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타지키스탄은 남쪽 국경이 아프가니스탄과 맞대고 있었다.
바로 헤로인의 주요 유통경로였다.
아프가니스탄 →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 → 카자흐스탄 → 러시아 → 소비국(유럽·미국).
현시점은 레케티리 같은 강도단이 보따리 무역하던 시기라 댐에 구멍이 뚫린 정도였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면 봇물 터지듯 터진다.
“잠시 잊으셨나 본데 저희 카레이스키입니다.”
“아! 고려인이 있었구나.”
“30만 명이나 살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위치에 많은 분이 계십니다.”
한민족은 어디를 가나 근면 성실함으로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진다. 비록 지금은 수난을 겪고 있지만.
“선발대를 보내 현지 사정을 살펴볼까 하는데, 함께 하시겠습니까?”
크라이 조직과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미국과의 유통망과 러시아 서부 지역 보리 갱단과 마찰이 생겼을 때 교섭을 위해서였다
“이거 참.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형제에게 신세만 지는 것 같으이.”
“하하! 나중에 꼭 갚으십시오.”
*
“아놔, 그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는데 거길 다시 가라니. 하아! 돌겠구먼.”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었다. 길쭉한 가방을 둘러맨 십여 명의 사내들이 상행선 열차에 올라타며 투덜거렸다.
“가기 싫으면 말던가. 스팔니 바곤(일등석 침대칸)을 다 타보고 좋구먼.”
그들은 아프간 참전 영웅전우회에서 선발한 조직원들이었다.
선발 기준은 명확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자였다.
킴 드미트리는 수도 카불 인근에서 복무했지만, 고려인이란 이유로 선발대 대장을 맡았다.
일등석 2인용 침대칸이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넓은 평야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전이 터지기 전에 고려인을 빼 와야 한다라······ 믿어 주려나 모르겠네.”
‘늦은 봄에 전쟁이 터지니 연해주로 갑시다.’ 하면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큰형 킴 이고리가 전소 협회장인가 뭔가 하는 양반에게 연락을 넣어 놓는다고 했으니 가 보면 알 것이다.
“근데 이 녀석을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모르다가도 모를 놈이라니까.”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는 악사나 리사초바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어느새 우수리스크 역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드미트리는 길쭉한 가방을 메고 멀뚱히 서 있는 예닐곱 명의 사내들을 불렀다.
“어이! 후배들, 이쪽이야.”
소총이 든 가방을 일반인이 메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전우회 선배님입니까?”
“그려. 자네들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들인가 보구먼. 반갑네. 인솔자가 누구인가?”
짙은 눈썹에 눈매가 매서운 사내가 나섰다. 인상과 달리 반짝이는 눈빛은 뭔가 재미난 일이 곧 벌어지기를 바라는 듯 기대감이 가득했다.
“루슬란 베레츠키요.”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자 오르지.”
잠시 뒤 그들은 객실 칸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베레츠키가 가볍게 말했다.
“5백 루블이나 하는 일등석을 제공하다니 회사가 돈이 많은가 보오.”
“어. 많아. 임금을 떼먹는 일은 없을 거야.”
“하하! 꼭 사장처럼 말하오.”
“응, 로얄패밀리야.”
못 알아들었는지 두 눈을 껌벅였다.
“보스가 내 조카라고. 에헴!”
“오! 그러셨소. 좋겠수다. 그런데 말이오. 임금을 달러는 준다는 거짓말이 사실이오?”
드미트리가 베레츠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실이긴 한데. 아무나 그런 특별 대접을 받지는 못해. 자네 실력이 좋은가 보군.”
정조직원에 한해서 달러로 지급한다. 창립 멤버에게 50달러를 수고비로 주면서 달러 가치가 두세 배 오를 거라고 했던 일로 인해 굳어졌다.
당시는 보리 갱단식으로 건별 수당을 지급했다.
조직이 결성된 이후 기본급 1백 달러에 건당 인센티브제로 정비되었다.
따지고 보면 적은 기본급이지만, 두어 달 전만 해도 평균 월급 400루블이 40달러에 거래됐다.
지금은 수백%의 초고도 인플레이션 상황이어서 가치가 두 배로 올랐다.
조직원들은 실질적으로 일반 노동자의 다섯 배 수입을 올리는 고소득자로 만족감이 컸다.
내년에 물가가 3천%, 즉 30배 가까이 상승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김찬영을 신으로 떠받들지도 모른다.
이들과 더불어 고급 인력 또한 달러를 받는다. 그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스페츠나츠요. 어디 가서 명함 내밀 정도는 되오.”
“그런가. 나는 로얄패밀리이자 참전용사 경력직일세.”
“하하하!”
웃음이 가시자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를 살피며 머리를 맞댔다.
“우리는 아프간에 들어갈 생각이야. 자네들이 뒤를 맡아 주겠나?”
“설마······ 그거요?”
드미트리가 비릿하게 웃었다.
“수당이 월급보다 셀 걸세.”
*
“고려 무역을 지주회사로 해서 수직 계열화를 시켜야겠어.”
고려 수산, 영웅 종합물류, 그리고 고려 유통과 고려 해운이 있었다.
뒤에 두 회사는 설립 예정이었다.
며칠 전 옐친은 개각을 단행했다. 3, 40대 젊은 정치인들을 기용 내각을 구성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본격적인 자유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알린 것이다.
그 시발점이 12월 중순 사기업 창립과 사업자 등록의 합법화였다.
CR 그룹.
정식 명칭 Coraa 그룹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외친 ‘꼬레아 우라!’가 모태였다. 우라(Ура)는 러시아어로 ‘만세’를 뜻한다.
영어식 Corea Woora를 합쳐 Coraa로 변형했다.
카레이스키 조직임을 강조하는 의미로 고려를 썼으나 활동 무대가 넓어질 테니 다민족 국가에서 특정 민족을 부각시키는 이름은 좋지 않다.
김찬영은 고려 시큐리티를 한편으로 떼어 냈다. 이름도 바뀌어 있었다.
블랙 블러드(black blood).
상상의 산물 ‘흑혈단’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흐음! 형제를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카레이스키 조직을 블랙 블러드에 넣을지 말지가 고민이었다.
현대 러시아 마피아는 크리샤 형태였다. 크리샤(крыша)는 러시아어로 지붕을 뜻하는 단어다. ‘보호’의 의미가 있었다.
‘범죄조직-사업가-정치·관료’
오르가니자치야에서 러시아 마피아로 변하는 초창기에는 마피아가 나머지 둘을 보호했다.
모스크바에서 한 해 50여 명의 은행가가 암살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민영화를 둘러싼 암투 때문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형태가 된다.
“음지 사업을 하려면 넣지 않는 게 맞지만······.”
우후죽순 생겨나는 경비 회사의 직원이 마피아 반, 전직 경찰 반이었다.
적어도 10년은 양지와 음지 사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사업 부문으로 묶어서 마약, 무기, 밀수, 인력 이렇게 나누면 되겠어.”
어느새 직원이 1천 명이 넘다 보니 조직 체계를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형제회가 3백 명, 전우회가 150명, 상인연합회가 70여 명, 새로 채용한 시큐리티가 5백 명이었다.
고려시장 협동조합은 체인점 개념이라 제외했다.
온전한 조직원은 형제회와 상인연합회였고, 나머지는 월급을 받는 직원이었다.
물론 옥석을 가려 흡수하긴 하겠지만.
무력부문은 블랙 블러드에 몰아넣고, 나머지 형제는 각 사업에 배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사업은 경영인이 하고 조직원들은 회사 관리 역할이었다.
물론 보호세를 걷거나 클럽을 운영하는 조직원은 지금처럼 따로 둔다.
대략 큰 줄기를 잡자 두코프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보스,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오늘이 12월의 첫날이었다.
카레이스키 크리샤이자 연해주 이너 써클(inner circle)을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주최하는 날이었다.
*
외국인 전용 호텔 프레지던트 룸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TV 브라운관을 할낏거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면면 목을 살펴보면 아무도 딴지를 걸 수 없을 것이다.
하루 남은 시한부 KGB 고위 간부, 국경군 사단 지휘부, 5군 지휘부, 연해주 행정위원회 의장단 그리고 처음 모습을 보인 태평양 함대 장성이 있었다.
그는 함대 본부 정보 차장 미하일 라드노 준장이었다.
“허허! 샤바로프 사단장, 도대체 이런 자리를 누가 만든 거요?”
라드노가 같은 계급이자 같은 정보 계통이라 밀접한 이반 샤바로프에게 물었다.
“있소. 그런 자가. 곧 보게 될 거요. 주둥이만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 젊은 친구가 보통이 아니라오.”
“요즘 국경군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더니 혹시 그 친구를 말하는 게요?”
거의 매주 1백여 대의 생계 물자가 들어온다. 원가의 5~10배 사이로 팔리니 대략 4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김찬영은 수익의 30%, 약 10만 달러를 뿌린다. 국경군은 매주 3만 달러가량을 받고 있었다. 무기 판매 대금은 별도였다.
“마침 저기 오는군. 라드노 준장, 잘 사귀어 보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은 없을 걸세. 저 보게나 누가 주인공인지 다들 알지 않나.”
김찬영 주위로 참석자들이 모여들어서 한 말이었다.
그때 김찬영이 뉴스가 방영 중인 TV의 볼륨을 올렸다.
「······오늘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실시된 독립 찬성을 묻는 국민 투표에서 유권자들은 현재 압도적으로 찬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 놀라운 결과는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다른 공화국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
중간 개표 결과를 전달하는 뉴스였다.
김찬영은 TV를 끄고 좌중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했습니다.”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등은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호 및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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