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 크리샤, 연해주 이너 써클
소련 붕괴.
선언하듯 던진 엄청난 화두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금세 들끓어 올랐다.
김찬영과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KGB와 국경군마저 부정하고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 이유를 찾는 모습에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붕괴의 징조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사람들이 이러한데 소련의 회생을 믿는 사람들은 부글부글했다.
특히 군부는 강하게 반박했다.
5군 사령관 사코크샤로프 소장이 버럭했다.
“우리나라가 붕괴하다니! 내란 선동죄로 잡혀가고 싶나. 어디 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말게.”
도리어 잡아가야 하는 KGB는 잠잠했다.
태평양 함대 미하일 라드노 준장이 한팔 거들었다.
“일부 공화국이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연방이 무너질 일은 없소. 그 일로 다른 공화국들이 자극받아 독립을 선언하더라도 연방의 틀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소.”
“우리는 서방과 자웅을 겨루었던 초강대국이네. 잠시 주춤한다고 대국이 내부 문제로 해체된 전례가 없어.”
소련은 70년 동안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많은 국민이 체제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공산당과 군부의 권력이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개별 공화국의 독립 선언이 소련의 즉각적인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행정관료 쪽에서도 의문을 제시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경제적으로 공화국들이 소련 품을 떠나서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는 공화국들의 경제 의존도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높은 수준임을 지적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김찬영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마초 중의 마초 군부 장성들이 총을 뽑지 않은 것만 해도 상당히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욱했던 인사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상황을 냉정히 분석한 사람들이 재반박을 했다.
“꼭 그런 건만은 아니오.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의 행동이 단순한 자치 요구라고 할 수 있겠소? 그들은 완전한 독립을 원하고 있소.”
“솔직히 군부의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아요. 중앙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지휘관이 많지 않소? 어디 군부만 그런가, 경찰도 다르지 않지.”
“개혁은 실패했소.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졌음을 왜 모르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아.”
어느새 열띤 토론의 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쪽 편에 시선이 쏠렸다.
“왜 그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요?”
전 KGB 연해주 지부장이자 현 러시아공화국 연방보안부 극동 지부장 예정자 미하일 바르다초프가 멋쩍어했다.
“내일 위원회(KGB)가 문을 닫는다 하여 심란해서 말이오.”
“허허! 결국, 그렇게 되는구먼.”
“KGB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니, 확실히 새시대가 오려나 보오.”
KGB 해체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말문을 연 바르다초프가 말을 이었다.
“어제 러시아공화국 제1부 아킨페예프 총리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소.”
“저런!”
“거 보시오. 이제 시작이라 안 했소.”
“옐친 대통령의 측근들이 공화국 요인들을 공공연히 만나고 다녀요. 무얼 뜻하는 거겠소?”
잠시의 침묵 후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연방 대통령은 어떻게든 나라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분위기를 잡은 바르다초프가 김찬영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한발 물러났다.
김찬영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또다시 폭탄을 투척했다.
“러시아공화국이 독립을 원합니다.”
군부 장성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말을 이었다.
“옐친 대통령이 알코올중독자에 실무 능력은 떨어지나 정치적 감각은 남다른 사람입니다. 단숨에 쿠데타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기는 거품입니다. 그걸 누구 보다 잘 아는 옐친은 하루빨리 고르바초프를 끌어 내리고 올라서려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입니다.”
“그게 러시아공화국 독립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연방에서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없는 소련은 러시아공화국과 별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많은 5천만 명의 인구를 가졌고, 지리적으로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자 흑해와 접한 요충지이며, ‘소련의 빵 바구니’라 불리는 곳으로 소련 전체 식량의 46%를 공급한다.
우크라이나가 없는 소련, 옐친이 굳이 소련 연방 대통령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공화국들의 독립 요구에 편승해 독립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소련이 유지된 상태에서 옐친의 국민적 인기가 사그라지면, 고르바초프가 아니더라도 그의 후계자에 의해 바로 숙청당한다.
우크라이나가 없는 소련과 러시아공화국,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권력 다툼의 상관관계를 되짚어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찬영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CIS, 독립국가연합. 독립한 개별 공화국들이 경제, 군사 등의 동맹을 맺으려는 단체입니다. 독립은 하되 연방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꼼수입니다. 벌써 물밑 작업을 마치고 사인만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일주일 후에 조인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국가 간의 협정이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나올 수는 없다.
옐친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저지하는 척하면서 러시아공화국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빌어먹을 술주정뱅이가 나라를 말아먹는구나!”
소련의 붕괴를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
프레지던트 룸에 마련된 회의실이었다.
화생방 훈련장이 됐음에도 참석자들은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김찬영이 좌장 역할을 맡아 회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인수인계 동안은 여러분들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소련 해체로 15개의 독립 국가가 탄생한다. 소련이라는 부모 밑에 자식이 15명이라는 소리다.
자식들의 욕심 때문에 부모가 급사한 상황이었다.
부모가 어디 보통 부모인가.
수틀리면 지구를 날려 버릴 막강한 힘을 가진 부모였다. 상속 분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내후년까지라······ 그 이후는 어찌 될 것 같은가?”
“예상하시듯 선출직 주지사, 의원들을 제외하곤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겠죠. 아, 예고편이 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로 전환되면 바로 해고가 가능해집니다.”
김찬영의 시선이 군사 조직을 향했다.
가장 비대한 조직인 소련군은 무려 4백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15개 공화국 출신이 섞여 있었다. 군사 동맹을 맺어도 먼저 자국의 군대로 합류부터 해야 한다.
이는 재편성이 필요한 경찰 2백만 명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조직은 누가 뭐래도 KGB 50만 명이었다.
자국민이 이름조차 입에 담기 두려워하는 악명 높은 조직인 데다가 쿠데타의 주범이었다.
새 시대를 여는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위 세 조직에서만 자의든 타의든 2백만 명의 대량 실직사태가 발생한다.
군부와 KGB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남의 얘기가 아닌 것이었다.
김찬영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옐친 뒤에 노멘클라투라(부패 관료)가 있습니다. 옐친은 자유주의 신봉자 이고르 가이다르를 부총리에 앉혔습니다. 경제개혁을 총괄하는 위치죠. 부총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가격 자유화였습니다.”
물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국가 가격 위원회’를 폐지하고 시장 경제에 맡기겠다는 의도였다.
“국영 상점에 가보신 분 계십니까? 지금 매대에 빵과 감자밖에 없습니다.”
주지사 예고르 코샤로프가 아는 척을 했다.
“상품 가격 통제를 풀었으니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서 곧 풀릴 거라네.”
“공문이 내려왔나 보군요. 유감스럽게도 이상주의자의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물가가 많이 올랐으니 가격을 풀어주면 공급량이 늘 거라는 아주 순진한 생각이죠. 옐친 뒤에 있는 노멘클라투라가 공급권을 쥐고 있어요. 물자를 생산만 하고 창고에 쌓아 두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노멘클라투라가 과두재벌 올리가르히로 성장하는 첫 단계였다.
“설마 그런 짓을······ 하겠소?”
“벌써 하고 있어요. 가격이 오를 걸 뻔히 아는데, 사재기란 용어가 괜히 생겼겠어요? 그렇게 벌어들인 엄청난 돈이 어디로 갈까요? 옐친과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겠죠.”
이쯤에서 바르다초프가 나섰다.
“킴 대표의 말이 사실이오. 모스크바의 그 많은 공장에서 물품을 내놓지 않고 있소. 원자재 핑계를 대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소. 공장은 돌아가거든.”
김찬영이 말을 받았다.
“중앙의 공급이 끊기면 죽어 나가는 곳이 여기라는 건 다들 아시죠? 그래서 이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돌연 풀썩 웃었다.
“제가 정치인도 아니고, 솔직히 말씀드려 우리 모두 떼돈 벌어 부자 되자는 겁니다. 멍청하게 중앙 놈들에게 빼앗기고 나중에 후회해 봤자 우리만 병신 되는 거죠.”
“크흠!”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발 빠르게 행동하면, 난 가능할 거라 봅니다. 자리보전을 걱정할 게 아니라 추파요프 지부장처럼 중앙으로 영전할 기회도 잡을 수 있는 거죠.”
코크샤로프 사령관이 눈을 반짝였다.
“자네가 그 친구를 도왔구먼.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중앙의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변방 지부장이 러시아 정보부 창립 멤버로 중앙에 영전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김찬영은 별말 없이 모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키고자 마련한 모임입니다. 연방 붕괴가 가시화되면 이런 모임이 많이 생길 겁니다. 특히 당서기 쪽 사람들. 마지막 발악을 하겠죠. 저는 분명히 한발 빠르게 기회를 드렸습니다. 이야기들 나눠 보시죠.”
그가 회의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관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입을 모았다.
“옐친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즉시 승인했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독립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카레이스키 크리샤이자 연해주 이너 써클(inner circle)을 결성했다.
*
다음날 우수리스크의 카레이스키 아지트였다.
형제들이 TV 앞에 모여 있었다. 첫 장면은 지난 쿠데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거대한 동상 앞에 몰려들었다. 그 뒤에 묵직한 돌로 된 KGB 본부가 있었다.
“이제 자유다! 더는 두렵지 않다!”
시민들은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 거대한 동상에 철사와 밧줄을 걸었다.
“시민의 자유를 위해! 무너뜨려!”
마침내 동상이 땅에 떨어져 굉음이 일으켰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철의 펠릭스'라 부른 KGB의 아버지 제르진스키의 동상이었다.
감시와 억압의 상징이 사라졌다.
화면이 전환되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가 결연한 눈빛으로 마이크에 입을 댔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역사적인 결정을 발표하려 합니다. 그간 우리 국민을 두렵게 만들었던 KGB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순간 KGB는 해체될 것이며, 그 기능은 새롭게 재편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민을 감시하고 억압하던 체제를 끝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공식적인 KGB의 해체 발표였다.
이로써 소련의 권력 유지 핵심기관이었던 비밀경찰 KGB가 사라졌다.
이는 소련 체제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의미했다.
옐친의 발표가 끝나자, 기자회견장이 술렁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오늘이 러시아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날이라는 것을.
“민주주의라······.”
이때의 옐친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새로 탄생하는 러시아 연방이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나 좀 많이 애매하다.
반대파 탄압과 숙청은 여전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블라디미르 푸틴은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선다.
김찬영은 몸을 일으켰다. 윗옷 안에 6B3 경량 방탄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손에는 AKS-74U 돌격소총을 들었다.
그처럼 무력부 형제는 모두가 스페츠나츠 개인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다.
KGB 해체는 러시아 범죄조직에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자.”
무장 병력을 태우고 아지트를 빠져나간 십여 대의 차량은 도심에 들어서자 4개 조로 나뉘었다.
중앙 시장 방향으로 1개 조가, 레닌 거리에는 2개 조가 향했으며 마지막 조는 주택가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심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타다다당! 타다다당!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등은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호 및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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