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 소련에서 온 검은 머리 귀인
블라디보스토크 무역항에서 출발한 1천 톤급 화물선 세즈드호가 금각만을 빠져나갔다.
수산물 명태와 오징어를 가득 싣고 부산으로 향하는 냉동 컨테이너선이었다.
한국의 명태 소비량 54만 톤 중 80%를 극동의 경제수역에서 공급하고 있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다만, 오리 새끼가 어미 오리를 쫓아가듯 세즈드호를 따라가는 어선들이 눈길을 끌었다.
고급 수산물인 해삼, 대게, 전복 등을 싣고 있는 활어선이었다. 한국·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고가에 거래된다.
재밌게도 해삼은 연해주 사람들에게 고양이나 먹는 저급한 해산물 취급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하이선웨이’(海参崴)라고 불렀는데 ‘해삼이 많이 나는 웅덩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흔한 해산물인데도 활어 상태로 장거리 운송하는 기술이 부족해 수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인당 해산물 소비량 세계 1위에 빛나는 한국의 기술력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뿌우! 뿌우우!
연안에서 벗어나자 부쩍 자란 오리 새끼가 작별 인사를 고하고는 제 짝을 찾아 떠나갔다.
“오냐, 가서 돈 많이 벌이 와라.”
김찬영은 진짜 오리처럼 거친 물살에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가는 활어선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공해상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한국 어선과 밀회를 즐기러 가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입항하지 않고 해양경찰의 감시를 피해 해상에 떠 있는 배들이 있었다. 조업선이자 운반선이었다.
이들은 소련 어선에서 건네받은 수산물을 싣고 한국 해역에 들어가 또 다른 어선에 옮기는 밀수 수법을 주로 쓴다.
내년 한국과 러시아의 어업 협정이 체결되면 한국 어선이 러시아 경제수역에서 조업할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는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김찬영은 활어선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세즈드호보다 세 배는 더 큰 대형 화물선에 시선을 빼앗겼다.
광물자원을 수송하는 배로 일본을 거쳐 부산에 입항한다.
“엄청나게 해 처먹고 있겠네.”
원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그는 수산물 밀수출로 거액을 벌고 있으면서 광물·목재 밀수출에 군침을 흘렸다.
사실 자원 밀수출은 수입국 정부의 암묵적인 승인이 필요하다.
수산물처럼 상품이 아니라 공장에 들어가는 원자재이기 때문이었다.
명태 한 마리는 팔 수 있어도 석탄 한 덩어리는 못 판다.
자원 밀수출 고객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은 경제 성장에 목말라 있는 자원 빈국으로 국가 차원에서 밀수입해서라도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빨대를 꽂은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라서 문제지만.
날씨가 좋지 않은 탓에 배에서 16시간을 보낸 뒤에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와! 한국이다. 세상에 내가 한국에 오다니······.”
초이 올렉산드로는 조상님의 고향에 돌아와서 감격에 겨운 듯했다.
반면, 김찬영은 낯설었다. 그가 기억하는 부산이 아니었다. 해운대의 고층 빌딩 숲이 보이지 않았다.
“야경이 참 멋졌는데 아쉽네.”
한 20년은 지나야 그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하하하! 킴 대표, 잘 오셨소.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하오!”
부산항 하역장이었다.
영도파 두목 천남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김찬영을 덥석 끌어안았다.
“반갑소. 안색이 좋아 보여 다행이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초조해 보였는데 지금은 여유가 묻어났다.
주머니가 든든해지고, 걸림돌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하하! 모두 킴 대표 덕이 아니겠소. 내 정말 요즘 살 맛이 나오. 자자, 밖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천남길이 김찬영 일행을 세관에 데리고 갔다. 얼마나 뻔질나게 드나들었는지 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소련에서 오신 귀한 손님이야. 내 얼굴을 봐서라도 불편함 없이 빨리빨리 입국 수속 밟아 드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화물선을 타고 입국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반적인 출입국관리심사보다 복잡한 법적 절차와 규제가 따른다.
그래서 일반 비자가 아니라 특별한 승무원 비자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승무원 비자가······ 아니, 외교관?”
그러자 구석에서 팔자 좋게 신문을 보고 있던 직원이 쓱 일어났다.
국가 안전기획부, 안기부 요원이었다.
외국인 입출입하는 공항, 항만은 당연하고, 심지어 일반 회사에도 안기부 요원이 파견 나가 있었다.
“어디 봅시다. 음! 킴 빅토르? 고려인인가. 한국말 할 줄 아시오?”
눈길이 곱지 않자 김찬영은 외국인 행세를 했다.
“조금.”
안기부 요원이 삐뚜름한 시선으로 킴 빅토르 일행을 훑어보았다.
없는 간첩단을 만들어 내고, 고문치사 사건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개소리 지껄이던 시절이었다.
“잠깐 좀 봅시다. 소련산 빨, 공산당은 오랜만이네.”
피식 웃은 김찬영은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사무실 전화기를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교환을 거치는 듯하더니 안기부 요원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받아.”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고는 수화기를 귀에 댔다.
“예? 소련 영사관이라고요? 예, 예, 외교 문제요? 아이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가벼운······ 예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조심스레 수화기를 내려놓은 요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련 영사관에서 외교를 들먹거릴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런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올 것이지 화물선으로 들어와선, 생각 없이 빨강이라고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가도 되나?”
“하하! 그럼요. 영사관에서 보증한 분인데 바로 가셔도 됩니다.”
알렉산드르 추파요프 지부장을 중앙에 올려보내 놨더니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김찬영 일행이 세관을 나가자 안기부 요원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부산항 파견대입니다. 소련에서 킴 빅토르란 자가, 빅토르 킴이 아니고 킴 빅토르. 예, 방금 입국을 했는데······.”
안기부 감시 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
거대한 크레인에 매달린 냉동 컨테이너가 트레일러에 안착했다.
하역업체 직원이 손을 흔들자 트럭이 출발했고 그 자리에 다른 트레일러가 들어왔다.
김찬영 일행은 바삐 돌아가는 하역 작업을 지켜보았다.
한국의 하역 시스템을 보고픈 마음과 올해 첫 1천 톤급 수출이라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태가 제철이어서 수출 물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이달에만 7만 톤 이상이 거래된다. 대략 4천만 달러어치였다. 아쉽게도 지금은 고스란히 소련의 국고에 들어간다.
공식적인 수입 신고서 내용은 그러한데 실제 물량은 10~20%가량 더 많다. 밀수출 물량이었다.
수산물 밀수출로 한 달에 평균 2백만 달러, 성수기에는 4백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는 소리였다.
4백만 달러의 밀수출 매출에서 고려 수산의 몫은 60% 정도로 원가를 제하면 수익이 1백만 달러가 조금 안 된다.
금괴 3백 톤을 한 번 밀수 하는 게 낫다.
그러나 수산물과 생계 물자는 안정적인 고정수입이었다. 한 달에 2백만 달러 상당.
무기 판매가 늘고 있고, 금괴 규모가 커지고 있으니 곧 고정수입을 추월할 것이었다.
또한, 히든카드가 여러 장 남아 있었다.
김찬영은 도심 방향에 시선을 두고 옅게 웃었다.
“이제 중소기업쯤 됐나?”
내일부터 대기업으로 발돋움할 발판이 되어줄 바이어와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이제 약속을 잡아야 하는 대어도.
김찬영이 몸을 돌리자 올렉산드로와 이반 두코프가 따라붙었다.
셋이 새까만 가죽 롱코트 깃을 펄럭이며 걷자 세기말에 개봉하는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았다.
영도파 넘버 쓰리 이수복이 삼각별 대형승용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행분들은 뒤차에 타시지요.”
대충 한국말을 알아들은 두코프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뒷좌석에 박춘배가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그들을 태운 차량은 서구 자갈치 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위쪽 도심 진구는 칠성파의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영도파는 영도구와 부산항 일대에서 활동한다.
“박가이, 수고했어.”
칠성파 부두목 오성식 총기 살인 사건은 사회면을 장식할 정도로 이슈였다.
그런데 기자들의 펜은 야쿠자로 향했다. 야쿠자를 대표하는 야마구치구미가 부산에 진출해 활개를 쳤으며, 한국 조폭과 충돌을 일으켰다.
한국 당국은 뒤늦게 야쿠자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한다며 수선을 떨었다.
“별말씀을. 여기, 받으십시오.”
김찬영은 박춘배가 건네주는 권총을 품에 넣었다. 내일 만날 첫 바이어가 야쿠자이기 때문이었다.
“이수복이라고 했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수복이 상체를 틀었다.
“예, 보스님. 이수복이 맞습니다.”
“내가 가져온 물건이 있는데 오정중공업 연구소 소장한테 전달할 수 있나?”
“물론 입죠. 맡겨만 주십시오.”
대어 바이어와 미팅을 잡기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
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창가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킴 이반이 한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보스.”
김찬영은 그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천남길만큼 얼굴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사람 같아 보이는구나.”
“돼지국밥이 입에 맞아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박춘배와 킴 이반은 김찬영이 한국에 있는 동안 원거리 경호를 맡았다.
제 목숨을 가진 사람에게 얼굴을 비추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꾸벅 허리를 숙인 킴 이반이 물러가자 김찬영은 소파에 앉으며 맞은 편을 가리켰다.
“앉으세요.”
조상오가 마른 침을 삼키며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는 1백 명 규모의 봉제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10~50명의 소규모 공장이 많을 때였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었던 싱가포르 바이어가 미국 쿼터를 문제 삼아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으면서 부도 위기에 놓였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봉제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는 사양 산업이다 보니 돈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대기업 하청받는 일도 어려웠다.
빚잔치만 남는 상태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어떻게 결정하셨어요?”
김찬영은 빚쟁이 중 하나인 영도파를 통해 공장 인수를 제안했다.
봉제 공장치고는 규모가 크다고는 하지만, 5천만 원에 인수 가능했다.
그가 원하는 건 기술자와 공장운영 노하우였다.
눈앞의 젊은이가 무서운 사람이란 얘기는 들었지만, 조상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흥정을 시도했다.
“가격만 맞으면 얼마든지 팔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가격이랑 차이가 너무 커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김찬영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람은 참 신기한 동물이에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본전 생각을 한단 말이죠. 아, 물이 아니라 땅이 묻힐 뻔한 사람이었네요. 그냥 가서 묻히세요.”
“저, 저기, 사장님.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공장을 넘겨도 마이너스라 재고해주십사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사람 목숨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던 김찬영은 턱수염을 쓸면서 고민하는 척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부채는 내가 갚아드리지. 사채 빚도. 대신 공장 설비를 싹 뜯어서 연해주로 옮길 건데 그 공장을 맡아 보는 건 어때요? 사장 월급에 지분 10% 드리지.”
“여, 연해주면 설마, 소련요?”
조상오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소련에 오라니 월북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소련은 올해 망해요. 이제 민주공화국 러시아요.”
*
이나가와카이.
도쿄 롯폰기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8천 명 규모의 대조직으로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와 함께 야쿠자 3대 조직이었다.
현재는 초대 두목의 장남인 이나가와 유우코우가 3대 총장에 올라 집권한 지 2년 차였다.
태생부터 엘리트 야쿠자인 이나가와는 야마구치구미를 따라잡기 위해 정열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야마구치구미는 88올림픽 당시 한국에 진출해 부산에서 매년 망년회를 가질 정도였고, 후발 주자 스미요시카이 또한 호텔을 인수하여 거점을 마련했다.
그래서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중책을 맡은 야마모토 타로, 한국명 이준호는 어깨가 무거웠다.
그는 이나가와카이 산하 야마카와잇가의 중간 보스였다.
야마카와잇가는 가나가와현의 가와사키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조직이었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요정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금발 머리의 거한이 문을 가득 채웠다.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오자 비로소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소련에서 온 검은 머리 귀인이 등장했다.
“반갑소. 킴 빅토르요.”
- 작가의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등은 실제와 무관한 허구입니다.
선호 및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늘 감사합니다. 행운이 가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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