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결투

이성을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와 유실은 부끄러워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유실이 말했다.
“그 패트릭, 오늘은 날 훈련시켜 줄 거지?”
‘맞다, 나 훈련관이었지. 최근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네.’
“응,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마력강화]를 알려줄게.”
유실과 함께 여관에서 나와 훈련장으로 향했다. 길을 걷다 보니 여러 남성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이 느껴졌다.
“저기 봐, 저 여자 정말 예쁜데? 옆에는 여동생인가?”
“저런 미인 모드릭에 있었던가?”
과거의 자신 역시 미인이 보일 때마다 지긋이 바라보곤 했었기에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약간의 우월감이 올라왔다.
유실은 다른 남성들의 시선에 질투심이 올라왔는지 걷는 도중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았다.
“윽 유, 유실?”
유실은 부끄러워하며 내 눈을 피했다.
유실의 돌발행동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거울이 있다면 적색 빛이 감도는 자신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실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손잡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잡힌 손이 신경 쓰여서 걷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손을 잡는 것이 이렇게나 의식될 줄이야.’
어떻게든 의식을 돌리며 길드에 도착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상시에는 느껴볼 수 없던 상당수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어이, 저길 보라고, 저 여자 얼굴 하나는 끝내주는데?”
“아니 옷에 가려서 그렇지 몸매도 상급이라고? 내 세 번째 다리가 근질거리는구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등록하러 온 건가?”
모험가라는 직업은 특성상 상당수가 남성이다. 특히 회복술사 등의 보조 계통 후위를 제외하면 남성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초미녀로 변모한 나의 외모는 많은 남성 모험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거기다 착용한 복장 역시 자주 입었던 옷이 아니었기에 패트릭인 줄을 알아보는 사람은 유실을 제외하면 길드에 없었다.
부끄러움에 여관에서 나가기 전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려고 했으나 쇄골 아래쪽에 튀어나온 두 덩어리로 인해 입을 수 있는 옷이 한 벌밖에 없었다.
그때 앉아있던 한 대머리인 사람이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과거에 술을 같이 마셨던 녀석이다. 그는 굴드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얼굴이 제법 미남이다.
예전에 안면을 튼 이후 가끔은 대화를 나누곤 했으나 여성을 너무 지나치게 성적으로만 바라보는 성격 탓에 다른 모험가들처럼 나 역시도 그를 기피하게 되었다.
굴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거기 여자, 신규 등록하러 온 것 같은데 나하고 파티하지 않을래? 나는 동등급이라고? 상냥하게 이것저것 알려줄게.”
그러자 유실이 내 손을 꼭 잡고 진지한(귀여운) 표정으로 굴드에게 대답했다.
“제 파티에요!”
“아앙? 뭐냐 꼬맹아, 아니 가만 보니 꽤 귀엽게 생겼는데? 너도 같이 올래?”
‘굴드 녀석 로리도(여자인 줄 알 테니) 스트라이크 존이냐?!’
녀석이 유실에게 향한 시선이 기분 나쁜 데다 너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날로 정수리를 때리며 말했다.
“됐어, 인마.”
“풉, 저 녀석 까였네.”
주변 모험가들이 다 들리게 비웃었다.
굴드는 상당히 열받았는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네년이 감히 얼굴만 반반한 주제에 나를 깔봐?”
“어 미, 미안 머리가 너무 반질반질해서 습관적으로 그만...”
“큽, 크하하학 반질반질하대! 큭 크흐흐흐”
주변에서 비웃는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
굴드는 화가 많이 나 보였다.
‘곤란하군. 이 친구 자존심 하나는 좀 강한 편인데.’
“네 이년 끝까지 날 우롱해? 결투장으로 따라 나와! 나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제이드의 파티원인 페른이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신인이지? 이 바보한테는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하던 일 하라고. 이렇게 보여도 이 친구 실력은 좋아서 아가씨가 이기기 힘들 거야.”
“페른, 참견하지 마!”
그의 말대로 그냥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아직 패트릭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상황은 꽤 재미있었다. 게다가 이런 싸구려 도발에 걸려본 게 얼마 만인가? 금등급으로서 호기로움이 올라왔다.
게다가 굴드는 통칭 분노조절잘해 병으로 강약약강인 글러먹은 인간처럼 보이나, 생각 외로 좋은 일면도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성격을 고쳐주고 싶었다.
“좋아, 해보자고! 대신 내가 이기면 이 도시의 하수관 청소 의뢰 일주일분은 네가 하는 거다.”
그러자 굴드는 입맛을 다시면서 혀를 할짝거리며 말했다.
“크흐흐흐, 그럼 내가 이기면 너희 둘은 내 노예다. 매일 귀여워 해주마.”
‘저 녀석 원래 저렇게 소름끼치게 생긴 얼굴인가?’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오 결투다! 굴드하고 신인인 미녀가 붙는대.”
“난 저 빡빡이가 이긴다에 500록 걸지!”
유실은 내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유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런 녀석한테 패배할 일은 절대 없어.”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일하던 헤린이 다가와 싸늘한(분노를 숨기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결투를 하나요? 길드에서 허락한 바 없는데요?”
굴드가 대답했다.
“저년이 먼저 날 모욕했다고! 이건 정당한 결투야. 허가해 줘.”
헤린은 잠시 날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좋아요. 대신 지는 사람은 길드에 1만록을 기부하는 걸로 어때요? 아, 이기는 사람도 결투 허가비로 5천록을 내는 걸로요.”
굴드는 즉시 대답했다.
“좋아! 받아들이지.”
“뭐? 이기는 쪽은 왜 내야 하는 거지? 결투 허가비라는 게 어딨어?”
“네년 설마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냐?”
“뭐라고?”
“좋아, 네년이 날 이기면 5천록까지 내가 지불하지. 이러면 상관없겠지?”
“호오, 후회하지 말라고.”
“그럼 제가 입회하는 것으로 결투를 진행하죠.”
헤린은 나와 굴드를 길드 소유의 외부 결투장으로 안내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험가들이 소문을 퍼뜨렸는지 관중석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어 있었다.
결투장에 자리를 잡고 서자 관중석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실이 보였다. 유실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실, 이것도 훈련의 일종이니 상대의 움직임을 잘 지켜봐.”
“응, 꼭 이겨야 해.”
헤린이 심판석에 서서 말했다.
“양측 준비되셨습니까? 그럼 결투 시작!”
“[마력강화]”
굴드는 자신의 주로 사용하는 무기인 대검을 집어 들고 마력을 주입한 뒤 내게 달려들었다.
재미가 없었다. 이유는 굴드가 나를 신인으로 완전히 착각해 크게 방심한 것이다.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채 대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고속·연속영창 중하급 황마법 [토극]”
굴드는 한 손에 대검을 높이 치켜든 채로 멈췄다. 지면에서 솟은 수많은 가시들이 그의 목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의 목에 큰 구멍이 뚫릴 것이다.
주변에서 수군거렸다.
“승부가 났군.”
굴드에게 물었다.
“계속할 건가?”
“아니, 내 패배다.”
‘유실한테 뭐라도 가르쳐 주려고 했었는데 이거야 원. 너무 싱겁네.’
헤린이 판정을 내렸다.
“저 여성분이 승리하셨습니다.”
유실은 관중석에서 달려 나와 나를 껴안았다. 아무래도 걱정해 준 모양이다. 유실의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다.
“우으, 이겨서 정말 다행이야.”
유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그때 굴드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 미안했다. 결투의 대가는 분명 1만 5천록에 일주일분의 하수관 청소라고 했었지?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너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지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방심한 것 역시 내 실력이다. 그런데 너 마도사로서 실력이 정말 뛰어나더군. 너 같은 녀석은 패트릭 이외에 처음 본다.”
“그... 굴드 미안, 내가 그 패트릭이야.”
“응? 내가 아는 패트릭은 남성이다만?”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여자가 되어버렸어.”
“분명 패트릭하고 얼굴은 닮긴 했다만... 아니 그 실력 처음 보는 신인일 리가 없지. 확실히 패트릭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는군.”
“어 그런 사유로 고생했다. 앞으로는 다혈질인 성격 좀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음? 잠깐 네가 정말 패트릭이라면 난 내 무덤을 스스로 판 건가? 이봐 이건 너무하잖아!”
그때 헤린이 굴드의 뒤로 다가왔다.
“굴드씨 길드에 1만 5천록 납부 부탁드립니다.”
“윽, 그 좀 깎아주면 안 될까?”
“네, 1록이라도 끝까지 받아낼 겁니다.”
굴드의 절규를 뒤로한 채 유실과 함께 길드 건물로 향했다. 걷는 도중 유실이 말했다.
“굴드씨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응, 그 녀석 성격은 다혈질이어도 약속은 잘 지키는 데다 모험에서는 신뢰하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지.”
‘여성을 대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신사적이었다면 좋은 녀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건물로 들어가자 관중석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페른이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훌륭한 솜씨던걸? 아까는 정말 괜한 참견이었군.”
“뭐, 대단한 것도 아니야.”
“겸손하긴,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내 이름은 페른, 동등급 모험가야.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 우리 파티에 들어와. 우리 파티 리더는 무려 은등급, 아가씨의 실력이라면 어중간한 곳보다 훨씬 나을 거야. 아, 들어온다면 옆의 작은 아가씨도 같이 받아줄게.”
“풋, 후훗”
“왜 웃는 거야?”
“그래 나 정도의 실력자가 들어가기에는 너희 파티가 조금 부족하네.”
“뭐? 아가씨, 모드릭에서 우리 파티보다 더 강한 모험가 파티는 없어.”
“그래 알아.”
“그런데 대체 왜?”
“페른, 이제 눈치채라고? 나야 패트릭”
페른은 순간 당황했다. 아마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너, 너 왜 그 모습이...”
“사정이 있어서 여자가 되어버렸다. 미안,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그때 제이드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이 페른, 좋은 의뢰 찾았어?”
“아니, 아직”
“여태까지 뭐 한 거... 헉!”
제이드는 나를 보더니 빠르게 다가와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오른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우리 파티에 들어와. 실력이나 등급은 전혀 상관없어. 내가 반드시 지켜줄게. 그리고 결혼하자!”
살다 살다 친구한테 프러포즈 받기는 처음이었다. 역겨움과 우월감이 동시에 올라오는 이 느낌, 황당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커헉”
메이린이 제이드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정신 차리고 잘 봐 멍청아.”
“그게 무슨...”
그제야 제이드는 아까부터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왼손을 꼭 잡고 있는 유실을 발견하고는 내 정체를 알아냈다. 아니 애초에 정체를 숨기려던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제이드가 유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유실.”
“흥”
“아하하, 토라졌네. 그런데 패트릭 왜 여자가 되어 있는 거야?”
“그게 말이지. 사정이 좀 생겼다.”
제이드와 메이린 그리고 페른한테 백랑족의 종족 특성이 반사되어 여자가 된 것으로 대강 설명했다. 메이린이 물었다.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야?”
“아니, 종족 특성이라 아마 불가능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제이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남자로 못 돌아가면 나랑 결혼하자!”
역겨움이 우월감을 이겼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너, 그런 취향이었냐?”
“눈앞에 미소녀가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어,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자 유실이 질투하는(귀여운) 표정으로 제이드에게 화내려고 한 것 같으나 그보다 빠르게 메이린이 제이드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쳤다.
맞은 제이드가 기절한 것을 보니 메이린은 마력을 담아서 때렸다. 정말이지 무서운 여자다.
“흥, 미소녀는 주변에도 있는데 말이야...”
“어이, 아무리 그래도 리더인데 괜찮은 거야?”
페른이 대답했다.
“아 제이드는 이래 보여도 튼튼하니까 괜찮아.”
“너희들도 고생이다.”
“늘 있는 일인데 뭐.”
메이린은 날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패트릭이야말로 이것저것 바뀌어서 힘들겠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
페른은 기절한 제이드를 둘러업고 말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의뢰를 찾으러 가볼게.”
페른과 메이린이 떠나간 후 유실과 함께 훈련장으로 향했다. 길드 소속 모험가는 누구든지 무료로 훈련장을 이용할 수 있다.
부연설명
모험가의 결투
모험가 사이의 결투는 공식적으로 길드에서 허가해야만 효력이 있으며, 공정성을 위해 반드시 길드의 입회하에 진행된다.
결투에서 패배한 사람은 결투 전에 내건 조건을 이행해야 하며, 불이행 시 길드에서 모험가 자격 박탈이나 강등 등의 조처를 취한다.
- 작가의말
서브히로인의 등장까지는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동안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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