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선물(1)
화염 병아리는 말이 많았다.
밤새도록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암—.”
“졸지마욤! 아직 얘기 안 끝난다구요.”
“하지만 얘기가 너무 긴 걸.”
한참을 들어주고 나서야 병아리의 히스토리를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뭔가 많은 일들이 있긴 했는데.
한 줄 요약하자면 층을 난입한 어떤 존재한테 마력을 뽑히며 살았다는 거였다.
“한 줄 요약하지 말라구욤!”
“알아알아 네 마음.”
“뺙!”
대충 병아리를 달래주고는 창을 열었다.
그 긴 이야기를 들어준 이유는 사실 이거였다.
<돌발 퀘스트>
내용 : 화염 병아리는 10층에서의 일을 잊고 싶어 한다. 그 괴로웠던 일을 누군가가 공유해주면 슬픔이 절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어 조건 : 화염 병아리의 히스토리 숙지 및 새로운 종목명 부여
클리어 보상 : 화염 병아리의 보조지표 오픈
실패 조건 : 시간 초과 (1일 남음)
실패 페널티 : 화염 병아리의 보조지표 영구 잠김
클리어 조건은 이제 하나 남았다.
종목명 : 화염 병아리
섹터 : 공명
종목설명 : 등반자 공명이 최대 주주로 그에게 귀속되어 있다.
보조지표 : 잠김
새로운 종목명.
“뭐가 좋을까?”
“뺙?”
병아리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공명이 시선을 따라갔다.
하지만 등반자에게만 보이는 창이 보일 리 없었다.
녀석이 고개를 갸웃할 때 공명이 손가락을 튕겼다.
불길에 휩싸인 새!
이보다 잘 어울리는 종목명은 없을 것이다.
“좋아! 넌 이제부터 피닉스다!”
암암.
이름은 화려할수록 좋지.
[이미 존재하는 종목명으로는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이런.”
“뺙?”
“음, 그럼······. 오케이 그거다! 삐약거리는 피닉스, 삐닉스!”
병아리가 아까부터 도대체 뭔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곧 알아챘다.
자신의 명칭이 바뀌었다는 걸.
종목명 : 삐닉스
보조지표 : 숲의 지배자(미적용 중)
“뺙. 이름 바꼈어욤.”
“그래. 넌 이제부터 삐닉스다.”
“뺙, 삐닉스.”
별 불만 없는지 삐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끄덕임이 졸음으로 승화했다.
꾸벅꾸벅.
“지도 졸렸으면서.”
공명이 조심스레 삐닉스를 들어 방석 위에 올려주었다.
보조지표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그건 미루기로 했다.
고작 테스트 하나 하자고 잠을 깨우기는 미안했으니까.
집에서 했다가 무슨 난리가 날지도 모를 일이었고.
“그럼 다른 거부터 확인해 볼까.”
봐야 할 게 있었다.
바로 특성 레벨업!
중요한 순간이었다.
특성 레벨 : 6
이제부터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음. 그러니까 수수료가······.”
찬찬히 특성창을 살피던 공명.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뭐야 이거?!”
수수료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문제긴 했다.
수수료율이 무려 0.1%였으니.
이건 수익을 얻든 손실이 나든 무조건 나가는 금액.
게다가 판매할 때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비용이었다.
샀다 팔면 0.2% 수수료가 확정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작 공명이 놀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새롭게 생겨난 기능 때문이었다.
<선물 거래 신규 오픈!>
“대박······.”
사실 레버리지가 생겨날 때부터 설마설마했었다.
선물 거래가 생겨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진짜로 벌어지다니!
[특성 내 새로운 기능 선물 거래를 활성화합니다.]
[현 시점 이후로 현물 거래 내 레버리지 사용이 불가능해집니다.]
[기존 적용되었던 레버리지까지만 유효합니다.]
[선물 거래의 레버리지가 10배로 상승합니다.]
[중요! 지구의 선물과는 개념이 약간 다릅니다.]
[선물 가격과 현물 가격은 동일하며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선물 거래.
현재 가격으로 미래의 물품을 사는 거래.
반대로 현재 가격으로 미래의 물품을 파는 것도 가능하다.
말은 어렵지만,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거였다.
가격이 올라갈 것에 배팅할 수도 있고, 내려갈 것에 배팅할 수도 있다.
올라가는 것에 배팅하는 걸 롱, 내려가는 것에 배팅하는 걸 숏이라고 부른다.
선물이 매력적인 건 바로 숏 때문이다.
주가가 내려갈 때도 돈을 벌 수 있는 매직.
그 무기가 공명의 손에 추가로 쥐어진 것이다.
현물 거래에서 레버리지 사용이 불가능해진 게 아쉽긴 했지만, 선물 거래가 생겨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손해였다.
현물보다는 선물 거래.
그게 공명의 전문 분야였기 때문에.
게다가 선물과 현물의 가격이 동일하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그냥 현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선물이 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주주가 되려면 현물을 사야 한다는 점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쓰읍.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당장이라도 탑에 들어가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냈다.
벌써 새벽.
이제 몇 시간 후면 박아연과의 약속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조금이라도 자둬야지.”
자리에 누운 공명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와—, 도대체 이 사람은 정체가 뭐지? 진짜 말도 안 되는 기록이네.”
박아연은 갱신된 명예의 전당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해야 저런 기록이 나오는 걸까?
난다 긴다 하는 등반자들도 세우지 못한 기록을.
“얼굴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 정말.”
물론 얼굴만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앞에 나타난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노하우를 배우고 싶었다.
“에이! 쓸데없는 생각! 명이 오빠한테나 잘하자. 쓸데없는 거 바라지 말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박아연이 휴대폰을 들었다.
약속 시간 오전 9시 1시간 전.
진작부터 준비를 마친 그녀가 공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으음. 여보세요.”
“뭐예요? 아직도 자요?”
“아니, 이제 막 일어나려고 했어.”
“얼른 일어나요. 벌써 8시예요.”
“알았어.”
“그럼 일어난 줄 알고 전화 끊어요! 인천 여기서 금방이니까 30분 안에 얼른 씻고 오세요오~!”
갑자기 30분이라니.
아홉 시 약속이 언제 여덟 시 반이 되었나 싶었다.
뚝.
역시나 마이웨이.
공명은 졸린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삐약.”
같이 깬 건지 옆으로 다가온 삐닉스도 작고 하찮은 두 날개로 기지개를 켰다.
“많이 짧네.”
“뺙?”
“아, 아냐.”
쓸데없는 말로 점수 잃을 뻔한 공명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너도 준비하고 있어. 오늘 11층 공략 들어갈 거야.”
“정말요?”
“응. 그러니까 준비할 거 있으면 미리 해둬.”
준비할 게 있을까 싶긴 하지만.
“뺙!”
삐닉스의 대답을 들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사실 공명도 크게 준비할 건 없었다.
대충 씻고 옷 입는 정도?
화장실에서 나오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당연히 박아연이었다.
- 기다리고 있어요!
보채기는.
공명이 픽 웃으며 삐닉스를 들어 올렸다.
“음. 너무 튀려나?”
“왜요?”
“병아리가 불 두르고 있는데 당연히 튀지 않을까?”
“전 잘 모르겠어요.”
“으음.”
인벤토리에는 못 넣는다.
생명체는 수납 불가.
가만히 고민하던 공명이 가방을 들었다.
“가는 동안 여기 좀 들어가자.”
“삐익. 너무 어두워요, 공명님. 무서워요.”
지배자 주제에 무섭기는.
“너 불 엄청 밝은데?”
“아!”
병아리한테 닭대가리라고 하면 실례이려나?
공명이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이 삐닉스가 가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에 웅크리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역시 병아리는 병아리네.”
“뺙?”
“아냐, 귀엽다고.”
“뺙뺙.”
가방을 메고 박아연의 집으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가보는 여자의 집.
괜히 긴장되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일하러 가는 거잖아, 일!”
사실 집까지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둘이 파티를 맺고 함께 탑에 입장할 안전한 공간이 필요했다.
길드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게 없으니 집이 최고였다.
문제는······.
“쫓기는 처지에 외부인을 집에 들일 수는 없잖아?”
남는 선택지가 하나뿐이라는 것.
박아연도 시원시원하게 허락했다.
주인 허락받고 가는 건데 쫄 게 뭐 있어?
공명은 어깨 펴고 걸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폈던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짠—! 여기가 제 집이에요. 많이 좁죠?”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4평짜리 원룸.
어디 앉으려고 해도 침대밖에 없었다.
여자랑 단둘이 좁은 방에서 그러고 있자니 조금만 움직여도 살이 스칠 듯 위태로웠다.
“큼. 크험. 얼른 들어가 볼까?”
“저야 좋긴 한데, 계획 같은 거 안 세워도 돼요?”
“어······, 세워야지? 아니, 안 세워도 되나?”
“에이 뭐예요, 11층 안 가본 사람처럼. 이럴 땐 선배답게 나만 믿고 따라와! 이렇게 해줘야죠.”
어, 그거.
니가 선배일걸.
공명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분위기상 지금 그게 밝혀지면.
‘죽을지도 몰라.’
목이 서늘했다.
얼른 이 좁은 방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른 파티 맺고 들어가자.”
“어? 진짜요? 그냥 이대로 들어가자고요?”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박아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명은 애써 그 눈빛을 피했다.
“뭔데 박력? 난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닥치고 따라와! 이런 거예요?”
아니 그런 거 아닌데.
역시 얘 텐션은 따라갈 수가 없어.
공명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지도 모르고 박아연이 툭 팔을 쳤다.
“다시 봤어요.”
‘컥!’
본인이 넣은 게 크리티컬인지도 모르고 박아연이 상태창을 켰다.
곧이어 공명에게 파티 신청이 들어왔다.
“수락하면 돼요. 오빠가 파티장 내가 파티원.”
“어, 어.”
공명이 급히 수락했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둘에게 각자의 제한된 정보가 펼쳐졌다.
파티원 : 박아연
거리 : 0.4미터
상태 : 양호
다른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서로 동의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 다른 정보도 공유할까요? 등반 중인 층이라거나, 명예 포인트, 커뮤니티 내역 같은 거요.”
“아니!”
“와, 칼답. 상처야.”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히히. 농담이에요. 얼른 들어가요. 오라버님만 믿고 따라갈게요!”
“그, 그러자.”
공명이 급히 숨을 몰아쉬며 탑 진입을 시도했다.
차라리 오크 백 마리 상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탑 11층에 진입합니다.]
[이동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지이이잉—.
<미션>
하루 동안 동쪽 성문을 사수하라.
직후 11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주변 풍경보다 불덩어리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방에서 나온 녀석이 뛰어올라 품에 쏙 안긴 것이다.
“뺙!”
“에······?”
“아, 맞다. 삐닉스.”
“뭐, 뭐야? 이 겸둥이 뭐예요?”
원래는 도착해서 소개해 주려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워낙 정신없었어야 말이지.
공명이 입을 열기도 전에 삐닉스가 선수 쳤다.
녀석이 거만한 포즈로 본인을 소개했다.
그래봤자 병아리지만.
“공명 님을 성심으로 모시는 숲의 지배자 삐닉스다!”
뭔가 틀린 말은 아닌데.
어감이 묘한데.
공명이 뭐라고 느끼든 간에 박아연은 감탄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개기엽!”
“아니, 오빠! 도대체 몇 층인 거예요? 숲의 지배자?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요!”
공명은 딱히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원래는 상황 봐서 적당히 사실을 알려주려 했는데.
‘망한 거 같지?’
오해가 깊다.
여기서 진실을 말하라고?
가능할까?
“와—! 숲의 지배자? 몸에 두른 그 불은 뭐예요? 막 부풀려서 주변 초토화시키고 그런 거예요? 명이 오빠는 얼마나 세요? 막 숨은 강자 그런 거죠?”
“공명 님은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다. 고층의 난입자마저 공명 님을 피해 도망갔지! 그러니 너도 예를 갖추어라 인간! 뺙!”
“와— 대박! 멋있어!”
아니,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 삐닉스야.
네가 하는 말이 참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데 그게 참······.
공명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가만히 눌렀다.
그러다 다시 용기를 냈다.
그래, 지금이라도 말하자!
“둘 다 오해가 많은 거 같은데 나 그렇게 강하지 않아.”
“에이, 거짓말. 이제 와서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구요.”
“공명 님은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고층의 강자가 어쨌다구요?”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인간! 뺙!”
아냐.
그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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