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선물(3)
타이탄 제국.
최남단.
번스타인 성.
몬스터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 요새.
그곳으로 천에 달하는 몬스터가 몰려왔다.
유례없는 공격.
방어에는 가까스로 성공했으나 성은 절반 가까이 파괴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심한 정찰을 통해 두 번째 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파악했다.
레온 번스타인.
성주는 모든 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기로 결심했다.
중앙에서 파견할 지원군.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허나.
“어제 찰스 경께서 돌아와 더는 시간을 끌지 못할 것 같으니 방비에 만전을 기울이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안타깝게도 돌아가셨습니다.”
“···.”
공명과 한스는 성문을 지나 달려나갔다.
오크만 해도 수백.
검은 늑대와 늪지대 악취 골렘도 비등한 군세.
심지어 어둠숲의 파수꾼이라 불리는 흑나무 가디언까지 수십.
그 외 자잘하게 다양한 몬스터가 섞인 무리가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 가장 선두에는 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었다.
투구나 갑옷은 이미 성한 이가 없었다.
기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말을 탄 이도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달려올 뿐.
“아아···, 성주님께서.”
주변이 후끈 달아올랐다.
압도적인 군세에 겁을 먹기는커녕 위태로운 군주의 모습에 투쟁심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모두 한시도 지체하지 마라! 지금의 한 걸음이 성주님과 기사님을 구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저 멀리서 레온 번스타인이 뭐라 소리치는 게 보였다.
닿을 듯하던 외침은 곧 땅을 울리는 진동에 묻혔다.
두두두두두두——!
아마도 오지 말라는 거겠지.
모두가 눈치챘지만.
모두가 모른 체했다.
대신 자신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여행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명예를 아는 여행자는 겉모습부터 다르다.
후광이 비치듯 은은한 광채가 항시 그와 함께했다.
명예가 드높은 여행자를 만난다면 응당 귀족에 준하는 예를 보여라.
누구나 아는 상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기를 드높여주었다.
뿐인가.
사지가 될지도 모를 곳으로 함께 뛰어들어주었다.
여행자가 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해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저분과 함께라면!’
그래서일까.
몬스터 대군이 두렵지 않았다.
성주님을 구할 수 있다!
성을 지킬 수 있다!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에.
“뭣들 하는가! 돌아가라! 성문을 사수해!”
비로소 레온의 외침이 닿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뒤로 도는 이 없었다.
오히려 속도 높여 성주를 맞으러 갔다.
“안 됩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놈들이!”
당황한 레온의 표정.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이 더 중요하다! 얼른 돌아가!”
“어찌 일의 경중도 판단하지 못하는가!”
꾸지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리를 다친 듯 절룩이던 기사 한 명이 고꾸라진 탓이었다.
“벤슨 경!”
“가십시오! 제가 조금이라도 막겠습니다!”
레온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또 기사 한 명을 잃고 마는가.
부상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구해내었을 것인데!
만감이 교차하며 다시 땅을 박찰 때쯤.
타다닷—!
“포기하지 마세요!”
옆으로 누군가가 튀어 나갔다.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뒤를 돌아봤다.
갑옷은 분명 타이탄 제국 병사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병사들과는 다르게 은은한 광채가 신형 뒤로 흩뿌려졌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느껴지는 이국적인 분위기.
금세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여행자?!”
심지어 명예를 아는 여행자.
그가 미끄러지듯 벤슨을 들쳐업고는 몸을 돌렸다.
지근거리까지 덮쳐오던 오크가 공명의 발길질에 튕겨 나간 건 덤이었다.
뻐엉—!
크헥!
“어딜! 얼른 달려요!”
엉거주춤하던 레온 등이 저도 모르게 다시 발을 놀렸다.
공명은 오래지 않아 그들을 따라잡았다.
“고, 고맙소! 그러니까······.”
“공명입니다.”
“아, 공명 경!”
사방의 시선이 뜨거웠다.
공명은 애써 무시한 채 벤슨을 넘겼다.
한 기사가 급히 그를 받았다.
공명은 곧 한곳을 가리켰다.
이대로 달리면 밟고 지나갈 함정.
미리 세팅해 두길 잘했다.
차트를 펼쳐 조작할 여유가 크게 없었으니.
마침 그곳에 도착한 병사들이 함정 너머를 기점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퍼펑—!
공명이 오크 주술사의 불덩이를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앞만 보고 달려요! 뒤는 제가 봅니다!”
“···염치없지만 부탁하겠소.”
레온 등은 거절하지 않았다.
거의 한계에 달했던 체력.
솔직히 포기하기 직전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모두 마지막 힘까지 짜내라!”
“으아아아아—!”
“마중 나온 병사들에게 부끄럽지 말라, 기사들이여!”
사실상 몬스터 군단에 꼬리를 잡힌 상태.
언제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공명은 그런 기사들의 가장 뒤를 달리며 몬스터를 견제했다.
채챙—!
채채챙—!!
연신 들어오는 공격을 신들린 듯 쳐냈다.
심지어 좌우로 퍼진 기사들의 뒤를 전부 지켰다.
마법은 또 어떻고.
주술사들의 불덩이가 공명의 검격에 방향을 틀어댔다.
퍼퍼퍼벙—!!
“아무리 여행자라지만······.”
“으음. 저런 인사가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레온 등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주님!”
“성주님이 오신다, 길을 열어라—!”
“달려요, 달려!”
“뺙!”
남문을 지켰어야 할 병사들.
박아연.
위험할 것 같아 공명이 두고 간 삐닉스도 함께였다.
레온의 눈이 한 차례 더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중요한 건 다른 여행자나 불붙은 병아리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레온 등이 함정을 지나치는 순간.
“됐다!”
박아연이 외쳤다.
공명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화답했다.
<x10 롱 시장가 체결 성공!>
매매 체결이 제대로 진행됐다는 의미였다.
“모두 더 물러나요!”
“······?!”
빠르게 치솟는 캔들.
그와 함께.
쿠드드드드드—!
강한 진동이 함정을 덮쳤다.
조잡하게 채워져 있던 모래더미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꼬챙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헛! 이게 무슨!”
“역시!”
“성공이다!”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알고 있던 공명은 손쉽게 몸을 날렸다.
모래 먼지를 뚫고 그가 날듯이 착지했다.
키엑—!
케에엑—!
문제는 몬스터들.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놈들이 함정으로 나자빠졌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몬스터들.
놈들이 무리끼리 뒤엉키며 속도를 늦추었다.
함정 너머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나이스샷!”
박아연이 신나게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시도했다.
공명이 얼떨결에 손을 마주쳤다.
짝!
“우리 잘 맞는데요?”
“어, 그런가?”
머쓱함에 괜히 코 한 번 긁적.
반면 레온을 비롯한 기사들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도대체······.”
병사들은 환호를 내질렀고.
“역시! 여행자님이십니다!”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환희는 잠깐.
공명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너무 좋아하긴 이릅니다. 우선 부상당한 분들부터 치료하죠.”
“물론입니다! 모시겠습니다 성주님.”
“기사님들도 말에 오르시죠.”
레온 등이 말에 올랐다.
그러면서도 공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고맙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는 점 용서바라오.”
전반적인 상황마저 파악하지 못할 그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미안해했다.
“아뇨. 뭐 그렇게까지······.”
공명은 대충 인사를 받으며 그들을 성으로 보냈다.
여유는 잠시뿐.
이제 진짜로 집중해야 할 때였기에.
“이제 성문 닫는 거예요?”
“그렇긴 한데 하나만 더 확인해 보려고.”
“뭘요?”
공명은 대답 대신 함정 차트의 물량을 정리했다.
<시장가 종료 성공!>
수익률: -7.5%
수수료: -2%
평가손익: -285코인
처음으로 손해를 봤다.
급하게 뺀 탓도 있었고.
이미 많은 몬스터가 떨어지면서 함정으로서의 날카로움이 줄어드는, 즉 캔들이 낮아지는 결과를 도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드드드드—!
“어?! 뭐야! 이번엔 반대로 모래가 함정을 막는데요? 아! 능력 회수하신 거구나!”
“뭐, 대충?”
물론 고작 이거 하나 하려고 폼잡은 건 아니었다.
공명의 시선이 삐닉스에게로 향했다.
“뺙?”
기다리고 기다리던 쇼타임!
삐닉스만의 보조지표를 활성화 해볼 차례였다.
종목명 : 삐닉스
보조지표 : 숲의 지배자(미적용 중)
적용하는 법은 간단했다.
고스트 무빙을 활성화하듯 차트에서 해당 지표를 켜기만 하면 되었다.
[숲의 지배자 보조지표가 활성화됩니다.]
<숲의 지배자>
상세 : 숲의 지배자로 각성한다. 탁 트인, 주변이 박살 나도 괜찮은 곳에서 활성화하는 게 좋을지도?
적용시간 : 30초
쿨타임 : 30일
저 상세설명 때문이었다.
굳이 위기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지금 보조지표를 시험해보는 게.
“뺘뱍?”
화륵—.
첫 시작은 가벼웠다.
삐닉스를 감싼 불길이 서서히 강해지는 수준.
덩달아 캔들의 높이도 천천히 우상향을 그렸다.
하지만 잠시 뿐.
진짜는 직후 시작됐다.
쿠오오오오오—!
급등하는 캔들!
휘몰아치는 불꽃!
“엥?! 가, 갑자기 뭐예요?”
“그, 글쎄. 일단 조금 물러나 볼까? 아니, 조금 많이.”
차트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많은 코인을 들이부어도 볼 수 없었던 광란의 폭등이었다.
쿠콰콰콰콰!
캔들에서 소리가 났다면 아마 저런 소리였으리라.
키에엑!
쿠헥!
마침 함정을 넘어오던 몬스터들이 전진을 멈추었다.
놈들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것이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
공명으로서도 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것 같아 답할 정신도 없었다.
‘······잘못되는 거 아니겠지?’
불길은 급기야 엄청난 열기를 내뿜었다.
그만큼 캔들도 급등했다.
피스 당 2배.
3배.
5배.
7배.
마지막에는 10배에 달하는 구간에서 미친 듯이 오르내렸다.
‘1000퍼센트!’
락업 기간에 묶여있는 20만 코인이 200만 코인이 되는 마법.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5배 레버리지 포함 1000만 코인이었다.
‘···!’
30초라는 짧은 활성화 시간.
그만큼 빠르게 치솟은 캔들.
그 종착지는 각성한 숲의 지배자의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한껏 숨을 들이마신 삐닉스가 휘몰아치는 힘을 모아 전방으로 내뱉었다.
“뺙!”
귀여운 소리와 함께.
스오오오오—!
쿠콰콰콰콰콰콰—!
콰콰콰쾅—!!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귀엽지 않았다.
어쩌면 대마법사나 가능할 법한 거대한 불의 기둥이 전방을 휩쓸었다.
쿠오오오—!
불기둥은 불의 장판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불기둥에 휩쓸려 재가 됐고 남은 녀석들은 불의 장판 위에서 녹아내렸다.
크르륵—.
키엑!
기세등등하게 몰려오던 몬스터 무리의 전멸.
“······.”
“······.”
모두가 할 말을 잊은 사이.
“뺙! 공명님, 재밌었어요.”
힘을 거하게 뽑아낸 삐닉스만이 신난 듯 공명 어깨에 올라탔다.
마치 언제 그런 격류를 만들어냈냐는 듯이.
“꺽.”
작고 귀여운 트림과 함께.
[미션 ‘하루 동안 남쪽 성문을 사수하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이 그 희미한 자취를 드러냅니다.]
[두 가지 선택지 중 선택 등반이 가능해집니다.]
[한 번 한 선택은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히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 기존 미션대로 등반을 진행한다. (11층 미션 기존대로 클리어)
2.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등반한다. (11층 미션 변경)
선택까지 : 1시간
“이게··· 뭐야······.”
“그, 글쎄.”
공명이 할 수 있는 답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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