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방문자
어둠 속의 방문자
다음날 김영진은 언제나처럼 고양이 나비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비는 오늘도 김영진의 발치에 앉아 귀여운 입을 작게 벌리며 울어댔다. 김영진은 나비의 아침 인사를 평소에 그랬던것처럼 익숙하게 받아들였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손 안쪽을 뻗어 부드러운 손길로 고양이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아침이야, 나비. 오늘도 잘 잤어?”
나비는 대답이라도 하듯 외옹 소리를 내며 살짝 몸을 비틀어 김영진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고양이 나비는 김영진의 손길을 더 느끼고 싶어 했다. 김영진은 나비가 원하는 만큼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도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톡톡 쳐주고 난 다음에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밖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신선한 공기가 실내로 가득 찼다. 어제와 시작은 똑같았다. 오늘도 여느때와 다름없는 지루하고 평화로운 아침의 시작이었다. 창 밖에서는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는지 조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근처에 공원이 있긴 했지만 이 아래는 시멘트 길바닥인데. 거기서부터 러닝을 하겠다고 뛰는 사람들을 보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자신은 운동하나 제대로 하지않고 있는게 죄책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김영진은 잠깐 든 생각을 털어내고는 다시 방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할때다. 오늘 아침 하루를. 오늘은 불운하지 않은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랬다.
“오늘은 뭘 하고 지낼꺼야, 나비?”
고양이는 그저 김영진을 바라보며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김영진은 혼잣말처럼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이 김영진에게는 일종의 루틴이자 마음의 안정이었다. 나비와 대화하는 건 마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과 같았다. 김영진은 부엌으로 가서 커피 머신을 켰다. 기계가 동작하며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부엌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비는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올라 김영진을 내려다보았다. 고양이의 커다란 눈은 항상 김영진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김영진은 미소를 지으며 냉장고에서 고양이 사료를 꺼냈다.
“나비. 우리 나비도 아침밥 먹어야지, 그렇지?”
김영진은 작은 접시에 사료를 담아 나비 앞에 놓았다. 나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김영진은 잠시 고양이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특별할 게 없을 듯했다. 불운도 끝나는 것 같았다. 커피는 아무런 오작동이나 이상한 소리 없이 내려졌으며 기분도 좋았다. 문제가 있던 일은 어제 다 마쳤고 오늘은 특별한 일정도 없을 예정이었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저녁에 퇴근후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있다는 것 뿐인데 아침 시작이 평화로우면 어제에 계속 이어지던 불운은 끝난거다. 불운이 끝났다. 어쩌면 이대로 올해의 징크스역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질서 정연했다. 그 평온함 속에서 김영진은 잠시 삶의 여유를 느꼈다.
김영진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크지 않았지만 아늑했다. 벽에는 김영진이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나비가 김영진을 따라 거실로 왔다. 나비는 소파 위에 앉았다. 늘 나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김영진은 내킨김에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주중이었기에 업무 메일이 많이 와 있었고, 김영진은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확인할수도 있었지만 미리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의 불운이 어느정도인지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열어본 것이다.
대부분의 메일은 직장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무언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 서류를 제출해 달라는 부탁, 그리고 다음 회의 일정을 조정하자는 이야기들. 김영진은 이런 반복적인 일상이 때로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이 평범함이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메일들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대한 변화나 사건이 없는 삶이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김영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나비는 어느새 소파 위에서 살짝 몸을 말고 졸고 있었다. 김영진은 그런 나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비는 김영진의 일상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자, 때론 고독한 시간에 유일한 친구였다. 김영진은 나비에게 손을 뻗어 살짝 쓰다듬었다.
“너만 있으면 난 충분해, 나비.”
잠시 후, 김영진은 나비를 놔두고 부엌으로 다시 가서 아침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냉장고를 열어 오늘 먹을 음식들을 하나씩 꺼냈다. 김영진은 요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혼자 살면서 먹어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힘낼 수 있는 타입이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어제 미리 만들어둔 샐러드를 꺼냈다. 그리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파스타를 해 먹기로 했다.
재료를 하나씩 손질하고, 팬을 가열한 후 양파를 볶기 시작하자 집 안에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나비는 그런 냄새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있었다. 고양이는 이런게 매력이다. 종종 이렇게 무관심하게 굴다가도, 무언가가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필요한게 있으면 그 즉시 다가와 귀찮게 하고 집중하는 모습이 말이다.
음식이 다 준비되자, 김영진은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켜고, 김영진이 즐겨보는 아침 뉴스를 틀었다. 뉴스에는 세상사는 이야기가 늘 그렇듯 뻔하게 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조차도 김영진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 하루가 완전히 평범하게 지나갈거라는 기대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즐거운일 슬픈일 등 여러 가지 일이 생겨 인생이 스펙타클하게 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복잡한 일이나 사건같은 게 아닌, 그냥 지루할정도로 평범해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그런 하루들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그렇게 앉아 뉴스를 보다보니 시간이 흘러 출근 준비를 할때가 되었다. 벌써. 김영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에 물을 담아 넣어버리고는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옷방으로 들어갔다.
오후가 되면 대학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있었다. 오늘은 그것까지 감안해서 좀 더 평소보다 편안한 옷을 입을 생각이었다. 김영진은 옷장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친구와 만나면 이번엔 어떤 얘기를 하게될까. 뉴스?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은 아까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특별히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정치적 논쟁, 연예인들의 스캔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자연재해 소식들이 뉴스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럼 나비에 대한 이야기?
나비와 산책을 다니고 싶다거나, 하지만 고양이는 산책할 수 없는 동물이라거나. 그럼 왜 고양이를 키웠냐 강아지를 키우지 같은 그런 얘기가 많아지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고양이는 산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비에게 집 밖은 낯선 곳이었고, 늘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제가 평범하지 않은 불운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비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김영진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있던 나비가 고개를 들어 김영진을 바라보았다.
“세상 참 복잡하네, 나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고양이는 여전히 졸린 눈으로 김영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영진은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거리에서 나는 소음은 아니었다. 길거리 저 멀 리가 아니라 김영진의 창문 바로 앞, 집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대체?
김영진은 침착하게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평화로운 거리가 전부였다.
김영진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다시 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음은 더 이상 나지않았다.
“뭐야. 무섭게.......... 아무 일도 아니겠지.”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김영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출근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조금 전 들렸던 그 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나비가 일어섰다. 평소에는 느긋하게 눕거나 그저 졸고만 있던 나비가 기이할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고양이 나비는 문 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뭔가를 감지한 듯, 꼬리가 빳빳하게 서 있었고, 눈은 반짝이며 문 쪽을 주시했다.
김영진은 그제서야 자리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덜컹, 쿵쿵.
이번엔 소리가 현관문쪽에서 났다. 나비가 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집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김영진의 귀를 사로잡았다.
“나비야 이리와!”
김영진이 놀라 다가가며 나비를 안으려 했다. 그런데 문이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쿵쿵쿵쿵쿵!마구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이 건물에는 이렇게 김영진을 찾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김영진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다시 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옆집 사람인가.“
인터폰 카메라로 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김영진은 몸을 움찔거렸다. 잠시 후 밖이 아주 조용해졌다.
간건가.......
하지만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조용해지나 싶더니 발소리가 멈추지 않고,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것도, 매우 느리게, 아주 고의적인 움직임처럼 들렸다. 김영진은 마음 속에서 불안감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이 집을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확실했다. 이 집의 무엇을 노리고 주변을 배회하는 느낌이었다.
고양이 나비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갑자기 몸을 세워 문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나비의 행동이 김영진의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문을 확인해야겠어.
김영진은 잠시 주저하다가 조용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가볍게 숨을 고르고 다시 눈구멍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불안감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거야.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거실 창문이 흔들렸다.
김영진이 서둘러 몸을 돌리기도 전에, 창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완전히 열리고 한 남자의 형체가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왔다.
”누, 누구야! 누구세요!“
남자는 몸 전체가 어둠에 감싸여 있었고, 눈동자는 기이하게 반짝였다.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대낮인데도 그의 몸에만 어둠이 드러워져 있었다. 겁에 질린 김영진이 다시 한 번 그 남자에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김영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김영진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고양이 나비는 털을 곤두세우며 남자에게 경계심을 드러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는 더 중요한 존재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야 해.”
김영진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집에서 나가요!“
하지만 창문을 타고 들어온 남자를 어디로 내보낸단 말인가. 여긴 1층이 아니다. 다시 창밖으로 밀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문을 열어 내보낼 수도 없었다. 문 밖에서 분명 이상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문밖에 있는 것들과 집 안에 들어온 저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무서운 남자가 한패였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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