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게요
“진짜 개같은 년이네, 그거.”
임정환이 자작을 하더니 분이 안 풀린다는 듯 욕지거리를 이어갔다.
“너같은 남편 두고 다른 놈이랑 바람 나는 게, 그게 씨발 인간이냐? 짐승도 아니고 뭐 그딴 호랑말코년이 다 있어.”
나는 말없이 팔팔 끓는 어묵탕을 한 술 떠서 후룩 마셨다.
방금 전 정환이한테 그간의 일들을 대강 전달한 참이다.
물론 세세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천수아의 외도 상대가 최명일이고, 그 외에도 세컨드가 또 있다는 걸 알면 정환이 성격상 가만 있지 못할 것이다.
‘나랑 최명일이 어떤 사이였는지 잘 아는 녀석이니까.’
지난 삶, 내가 자세한 내막을 전부 털어놓자 정환이는 그 며칠 뒤에 최명일을 찾아가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엔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이었지만 그 바람에 경찰서까지 들락거렸다는 걸 생각하면 당분간 숨기는 게 나을 듯했다.
“후우. 그건 그렇고.”
한참을 나 대신 울분을 터트리던 녀석이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
“회사 나왔다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이재한테 들었다, 인마. 이 바닥 좁은 거 잘 알면서.”
오이재 이 자식. 그새 떠벌리고 다녔구만.
“뭐, 그렇게 됐다.”
“홍조윤 그 씹새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네가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다 하냐.”
“홍조윤 때문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그럼? 계획해둔 게 있어?”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소주잔을 들어 쭉 들이마셨다.
예열은 이쯤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나 제작사 차렸다.”
“···제작사?”
“어. 감독, 다시 해 보려고.”
멍하니 나를 보던 임정환이 이내 반색하며 되물었다.
“농담 아니고?”
“여기서 농담을 왜 해.”
“하하! 잘 생각했어. 그래, 그런 재능을 평생 썩히고 살 수 있겠냐. 시나리오는? 쓰고 있어? 무슨 내용인데?”
“안 그래도 궁금해할 것 같아서 들고 왔다.”
나는 서류 가방에서 <트로트 가이> 시나리오를 꺼내 건네주었다. 참고로 이건 백희원이 집필한 원본을 내가 윤색한 것이다.
“트로트 가이?”
싱글벙글하던 임정환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야, 소재가 너무 마이너한 거 아냐? 그리고 이 제목, 어디서 본 기억이··· 아.”
임정환은 표지 하단에 기재된 원작자의 이름을 발견하곤 나를 쳐다봤다.
“희원이가 쓴 걸 네가 고친 거야?”
“원작 읽어 봤어?”
“전에 우리 회사 투고했길래 후배 작품이기도 해서 한 번 보긴 했지. 근데 정말 이걸로 가려고? 글은 나쁘지 않지만 영화로 만들기엔 좀, 지루한 느낌이던데.”
“일단 읽어 봐.”
“으음.”
임정환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표지를 넘겼다.
본문을 훑어 내려가던 눈빛이 어느 순간 일변했다.
“······.”
임정환은 자세를 고쳐 앉더니 금세 시나리오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주로 시킨 옛날 도시락에 반주를 곁들이며 차분히 기다렸다.
30분 후.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완독한 임정환이 감탄 섞인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참.”
“어때?”
“···전개를 다르게 틀었는데도 원작의 주제나 결은 그대로 가져갔네. 군더더기도 전혀 없고. 재밌어. 아니, 끝내준다.”
“다행이네. 그래서 말인데, 정환아.”
내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임정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뭔데?”
“너 우리 회사 안 올래?”
“어?”
“네가 AP(협력 프로듀서)를 좀 맡아줬으면 해서.”
프로듀서에도 여러 보직이 있다.
그 중 협력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는 제작자의 권한을 위임 받아 대외 교섭 업무를 총괄하는 보직으로,
대학 시절 과제로 영화를 제작했을 때 정환이에게 일임했던 역할이기도 했다.
“대우는 보장할게. 지금 다니고 있는 스냅드림스튜디오 이상으로.”
“······.”
“12년 전 그때처럼, 너랑 나랑 이 영화의 주축이 되는 거야. 날 믿고 따라와 보는 거 어떠냐.”
임정환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자신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정환은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더니 곧바로 잔을 채웠다.
“시나리오 좋긴 한데, 소재가 트로트야. 그런데도?”
“어.”
“···투자는?”
“예전에 내 영화 좋게 봐준 투자자가 예산 전액 대주기로 했어.”
자본금이 로또 당첨금이라는 사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정환이를 믿지만, 말이란 보안을 철저히 지켜도 어딘가로 새어 나가는 법이니까.
임정환은 소주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제작은 언제부터 들어갈 예정인데?”
“내 질문에도 답을 해줘야지. 왜 자꾸 떠보기만 하냐?”
임정환이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야, 강우야.”
“왜.”
“우리 연영과 실습 과제로 영화 만들었을 때, 내가 너 깔보는 새끼들이랑 내기한 적 있었거든?”
처음 듣는 얘기다.
“그랬어?”
“그때 난 네가 연출한 영화가 전공자들 다 씹어먹는다에 전 재산을 걸었어. 오기를 부렸던 게 아니라, 옆에서 너 하는 거 지켜보니까 사이즈 딱 나오더라고.”
“···.”
“나는 새끼야. 이미 한 번 네 재능에 전 재산을 배팅해 봤다 이거야. 대답은 씨발.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벌써 정해진 거지.”
임정환이 달뜬 기색으로 소주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보자, 까짓 거. 회사는 니미. 입사할 때부터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잘 됐지 뭐.”
내가 피식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나는 내일부터 바로 프리 프로덕션 들어갈 거다. 너 회사 관두면 언제 합류할 수 있어?”
“빠르면 일주일 안에. 촬영 얼마 전에 끝나서 일거리도 없는 데다 팀장한테 찍혀서 사표 던지면 바로 처리해줄 걸?”
“잘됐네. 너 올 때쯤엔 할 일 잔뜩 쌓여있을 거다.”
“좆같이 부려 먹어도 좋으니, 흥행 성공하면 보너스나 많이 챙겨줘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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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아내의 로또를 훔침
#13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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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이란 단어 그대로 사전 제작 과정을 의미한다.
투자가 확정된 이후 스태프와 배우를 섭외하고 촬영 계획을 세우는 단계로, 보통 3-6개월 정도 걸리는 편이다.
늦어도 8월 말엔 촬영에 돌입할 계획이니 만큼,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야 했다.
우선 스탭 구성은 정환이가 합류하고 나서 진행하는 걸로 했다.
자사에 소속된 스태프가 없으니 프리랜서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이고, 정환이는 라인PD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현장 스태프들과 일해본 경험이 있다.
가급적 현장 실무에 관여하지 않았던 나에 비해 스탭들 고르는 안목은 더 좋을 터다.
그동안 나는 주연으로 생각해둔 배우들과 하나씩 접촉하는 데 초점을 맞출 작정이었다.
그 정도는 단독으로 추진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캐스팅에 관여하는 핵심 인물이 감독과 PD인데 사실상 내가 그 두 역할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 앉아 연극 <젊은 날의 은퇴>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서른셋이면 아직 젊어. 다시 뭔가를 시작해보기에는 적당한 나이잖아? 20대보다는 조금 더 노련하고, 40대보다는 조금 덜 찌들었으니까.”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여배우가 객석을 마주보며 시를 읊조리듯 독백을 이어갔다.
“언 땅이 녹고 슬슬 새순이 올라오고 있어. 겨울은 비우는 계절이고, 봄은 새롭게 채워 나가는 계절이지. 나한테도 언젠가는 잔잔한 봄비가 내릴 거야.”
장르만 코미디지 분위기나 대사는 정극에 가깝다. 상연을 시작한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객석이 텅텅 비다시피 한 건 그만큼 재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미와는 별개로,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서 독연하는 여배우의 연기만큼은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여전하네.’
눈 앞에서 전예솔의 연기를 지켜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가벼운 전율이 올라왔다.
직접 확인하고 나니 더 확신이 섰다.
<트로트 가이>의 중심 서사를 견인할 여주인공은 반드시 전예솔이어야 한다고.
한 시간 뒤.
<젊은 날의 은퇴>가 막을 내리고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 나란히 서서 몇 없는 관객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전예솔이 객석 모퉁이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눈웃음을 띠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야야, 지금 나 보고 웃은 거 맞지?”
“아, 지랄 마. 니가 아니라 나겠지.”
뒷자리에서 남학생 두 명이 소곤거리는 게 들린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그 놈의 멜로 눈깔도 여전하구만.
* * *
컨벤션 건물 1층에 있는 쉼터.
나와 전예솔은 입구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주문한 음료를 각자 손에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전예솔이 플라스틱컵 뚜껑을 따서 커피를 꼴깍꼴깍 마셨다.
“후아.”
문득, <첫사랑 기억법>을 촬영할 당시 전예솔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연기에 집중하고 나면 탈력감처럼 갈증이 밀려온다고 그랬었지.
“감독님이 절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진짜 오랜만이다, 그죠?”
“그러게. 대학 졸업하고는 한 번도 안 봤으니까.”
“졸업하시기 전에도 거의 못 봤어요. 감독님 때문에 동국대 들어간 건데, 부국제 이후로 계속 절 피하셨잖아요.”
나는 머쓱한 미소만 지었다.
대학 때 전예솔을 피해다닌 건 맞다. 형이 그렇게 되고 나서 <첫사랑 기억법>과 관련된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으니까.
“연락도 다 씹고. 진짜 너무했어.”
전예솔은 그때의 서운함이 떠오른 건지 나를 째려봤다.
“크흠. 사정이 있었다고 해두자.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연극만 해?”
“최근엔 그래요. 작년까진 영화도 몇 작품 했는데, 한 번도 흥행에 성공해본 적이 없어서 이젠 거들떠도 안 봐요.”
“그래?”
전생의 기억을 되새겨보니 확실히 2019년 이후로 전예솔이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하기야 2020년부턴 드라마판에서 빵빵 잘 나갔으니까.’
전예솔은 내년 1월 방영 예정인 <옥탑방 아씨들>을 시작으로 드라마만 건드렸다 하면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나만 알고 있는 그 미래의 정보는, <트로트 가이>의 여주인공으로 전예솔을 발탁하고 싶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옥탑방 아씨들>의 대성공 이후 전예솔은 일약 스타로 거듭나며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전예솔이 빵 뜨는 그 무렵은 내가 노리는 <트로트 가이> 개봉 시기와도 얼추 맞닿아 있고.’
여러모로 주연 배우로 삼기 딱이다.
‘문제는 영화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건데.’
어떻게든 설득해서 주연으로 발탁해야 하는 만큼, 지금부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커피를 마시는 척 머릿속에서 차분히 말을 골라냈다. 우선은 정말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었는지 떠볼 필요가 있었다.
“예솔아. 너 혹시······.”
그런데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전예솔이 대뜸 내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할게요.”
“···어?”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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