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폭
데케레프가 수혈을 시작했다. 정신이 살짝 몽롱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상태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 혈갑을 각성하셨습니다!]
[스킬 - 혈갑]
- 혈액을 소모하여 갑옷을 만들어냅니다.
[혈액 : 400/400]
혈갑이라는 스킬과 함께 혈액의 최대치가 증가했다. 200에서 400으로 증가한 걸 보면, 다음 수혈을 거치면 800까지 증가할 것 같았다.
또한 데케레프의 피가 들어오면서 혈액이 전부 채워진 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는 방어용 스킬인가?”
팔로 입을 닦아내는 데케레프에게 물었다.
혈갑이라는 스킬은 방어용처럼 보였다.
사실 나도 방어 수단이 하나 쯤 있었으면 하고 있었다. 흡혈이나 혈폭이나 둘 다 공격에 치중해 있었으니까.
목숨이 위험해졌을 때 건져줄 만한 스킬이 하나 나왔으면 했었지.
“후후, 단순하게 방어용 스킬이 아닙니다!”
데케레프가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혈갑 하나만 있을 때는 단순히 갑옷을 만드는 스킬이지만, 혈폭과 합쳐지면 달라집니다!”
혈갑으로 만들어진 갑옷의 재료는 혈액, 즉 피였다.
그렇다는 건 혈폭으로 폭발시킬 수 있다는 얘기였지.
“······근데 내가 입은 갑옷을 터트려 봤자 얻을 게 없잖아?”
뭐 상대한테 달라 붙어서 쓰는 거라면 몰라도.
아니 그것도 문제였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나도 피해를 입을 테니까.
하지만 데케레프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주인님이 직접 갑옷을 입으셔도 되겠지만, 남한테 입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 너 천재냐?”
나는 말을 듣자마자 혈갑을 사용했다.
[스킬 - 혈갑을 사용합니다.]
[혈액 : 350/400]
사용하는 대상은 내가 아닌 데케레프였다.
내 몸에서 혈액이 나가더니 데케레프의 몸을 감쌌다. 갑옷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지.
“이 상태로 혈폭을 사용하면······.”
그대로 데케레프를 감싼 혈액이 폭발하게 되었다.
내 몸을 막는 방어용임과 동시에, 혈액을 발사해서 적을 공격하는 공격수단도 되었다.
“자, 잠깐! 살려주십쇼! 주인님!”
데케레프에게 혈갑을 입힌 채로 여러가지를 실험해보았다.
“혈액을 더 쓸 수도 있네?”
[혈액 : 270/400]
혈갑에 혈액을 더 집어 넣을 수 있었다.
갑옷의 형태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뭔가 피가 더 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혈액을 많이 소모할 수록 갑옷이 더 견고해집니다. 혈폭으로 터트릴 때 폭발도 더 커지기는 합니다만······ 일단 저한테서는 좀 해제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후로도 여러가지를 더 시험해 본 다음 혈갑을 해제했다.
그러자 피가 집 바닥으로 쏟아졌다. 해제하면 그 자리에 떨어지는구나.
원래였다면 치울 생각에 귀찮음과 짜증부터 몰려왔겠지만.
데케레프 소유주인 나는 달랐다.
지난 번에도 국물 있는 요리를 쏟았었는데, 데케레프가 자기한테 맡겨만 달라면서 기깔나게 청소해줬다.
“데케레프, 청소 부탁해.”
바닥을 전부 청소한 데케레프에게 얘기했다.
“너 내일부터 할 일이 있다.”
“네! 뭐든지 시켜만 주십쇼!”
데케레프의 말에 따르면, 얼마 뒤면 탑이라는 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지금보다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 질 게 분명해 보였고.
나는 당장 탑에 올라설 생각은 없었다. 탑을 공략하는 건 내가 아니라 S급 헌터들이나 안유진 같은 헌터들이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혼란해질 세상에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혹여 세상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라도, 내 목숨 하나 정도는 부지할 수 있도록 힘을 쌓을 생각이었다.
“내가 출근해서 게이트가 발생하면 알려줄 테니까, 그쪽가서 몬스터 사냥하고 마석도 먹어.”
내게 수혈을 해주기 위해서는 마석을 섭취할 필요가 있었다.
마석은 일반인이 거래 루트를 뚫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값이 비싸서 데케레프에게 섭취시키기도 힘들었다.
‘수혈 할 때마다 필요한 마석량도 늘어나고.’
수혈을 반복할 수록 마석이 점점 더 많이 필요했다.
그 마석들을 내 돈으로 충당하기는 힘들었다.
“너도 마석 먹고 마력을 회복했을 테니까, 몬스터와 싸워서 이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월드 보스까지는 무리지만, 웬만한 몬스터는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데케레프가 직접 몬스터를 사냥하고, 마석을 먹으라는 얘기였다.
“저, 그런데 주인님, 제가 사냥한 것만 먹습니까?”
데케레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녀석은 여태까지 자기가 사냥한 몬스터의 마석만 섭취하지 않았다.
만난 첫날부터 다른 헌터들의 것을 빼먹었지.
“어. 네가 사냥하지 않은 건 입에 대지 마.”
도둑질은 내키지 않았다. 꼭 범죄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데케레프를 키우는 것부터가 범죄니까.’
몬스터를 키우는 자체가 범죄 행위였으니 말 다 했지.
도둑질이 싫은 이유는 내 안위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다면 확실히 좀 더 빠르게 수혈을 받을 수 있겠지만.
도둑질을 하다가는 원한을 사게 됐다.
원한을 사는 건 좋지 않았다. 적이 늘어나서 좋을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싸울 땐 박쥐 상태로 싸워.”
박쥐 상태로 밖에서 싸우다가, 집에 있을 때는 인간 모습으로 변신하라는 명령을 덧붙였다.
괜히 인간 모습으로 싸웠다가 신상 조회 같은 거 들어가면 답이 없었다. 데케레프한테 주민증 같은 게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박쥐 모습으로 활동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몬스터 상태로 다른 헌터들에게 발각되면 사냥을 해올지도 모르지만.
“헌터들이 더 잡으려고 하면 곧바로 도망쳐. 싸우지 말고.”
데케레프는 도망치는데 선수였다.
“맡겨만 주십쇼!”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옥상에 나타난 게이트로 인해 이곳저곳 무너져 내린 게이트 관리국은 금새 수리에 들어갔다.
좀 더 수리가 필요한 부서도 있기는 했지만, 우리 재난 안내부 같은 경우 가장 먼저 복귀하게 되었다.
워낙 속도가 생명인 부서였기 때문이었다.
“수원에 게이트 발생했습니다! 등급은 B급입니다!”
직원이 보고하자 마자 데케레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수원에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데케레프가 대기하고 있던 우리 집은 서울이었지만, 날아가는 속도가 빠르기에 수원까지 금방이었다.
거기서 몬스터도 잡고 마석도 먹고 올 예정이었지.
일주일 동안 별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마석을 섭취해서 강해진 데케레프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혹시 데케레프를 몬스터라고 인식한 헌터가 쫓아와도 은신 마법으로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래, 여태까지는 말이다.
- 그······ 주인님,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데?’
- 몬스터 사냥하고 마석을 먹었는데, 누가 따라붙었습니다.
헌터들이 따라붙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데케레프도 싸울 때는 은신을 해제하고 정체를 드러내야 했었는데, 박쥐 모습을 공개해버리면 쫓아오는 헌터들이 꽤 있었지.
‘도망쳐서 은신으로 숨어버리면 안 되는 거야?’
다른 헌터들이 쫓아올 때는 매번 그렇게 대처했었다.
헌터들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 그게······ 은신할 틈을 안 줍니다. 앗뜨뜨! 저 망할놈이······!
불에 데이기라도 했는지 데케레프가 뜨거워 하며 얘기했다.
‘탈출할 수는 있는 거야?’
- 제가 공격을 좀 하면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여태까지 데케레프는 인간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헌터 쪽에서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덤벼와도, 대충 날아서 도망가는 게 전부였다.
내가 맞붙어서 싸우지 말라고 헀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적당히 공격해. 죽지 않을 정도로.’
데케레프가 사냥 당하는 꼴은 못 봤다.
도망가기 위해서라도 공격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
대한민국의 S급 헌터, 염제 김종우는 지금 수원에 있었다. 근처에 게이트를 공략하고 돌아가는 길에, 또 새로운 게이트가 터졌다고 해서 브레이크 진압을 위해 지원을 나온 참이었다.
S급 헌터라고 해도 게이트 브레이크에 있어서는 근처에 있으면 바로 달려나가고는 했다.
민가에 풀리는 몬스터들은 자칫하다가 큰 인명피해로 번질 수도 있었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는 게 헌터들끼리의 약속이었지.
하지만 김종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거의 다 정리되어 있었다.
“기, 김종우 헌터님!”
김종우 헌터를 알아 본 헌터들이 다가왔다.
대한민국에 S급 헌터인 만큼, 헌터 중에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김종우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몬스터가 몬스터를 공격하고 있군.’
사람 몸통 크기의 박쥐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공중에서 레이저를 발사해 지상의 몬스터들을 불태우고 있었지.
몬스터들끼리 싸우는 일은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다만 김종우가 주의깊게 살핀 건.
‘싸우는 게 아니라, 사냥을 하고 있는데.’
박쥐는 다른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사냥을 하고 있었지.
심지어는 잡은 다음 몬스터 안쪽에 있는 마석을 낚아채서 먹기도 했다.
박쥐의 활약으로 게이트 브레이크는 마무리 된 듯 보였다.
다만 저 박쥐 또한 몬스터였기에, 김종우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염제 김종우는 마법사였다.
물론 박쥐 한 마리를 잡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는 없었다.
그가 다루는 마법은 불속성.
자칫하다가는 주변 일대를 모두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힘을 조절하고는 했지.
이번에 그가 사용할 마법은 파이어 애로우. 공중에 있는 몬스터를 요격하기 위한 마법이었다.
순식간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마법 준비를 끝마쳤다.
피이이잇–!
빠르게 발사된 파이어 애로우가 박쥐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박쥐가 재빠르게 피해버렸다. 허공을 지나친 파이어 애로우는 얼마 안 가 소멸했다.
김종우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마법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세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파이어 애로우 세 번으로 박쥐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회피 능력이 조금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정확도가 높은 김종우의 마법을 피했다. 회피 능력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세 발의 화살은 피할 수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 도망치더라도 무조건 한 발은 맞을 수 밖에 없었다.
파아아아앗!
아니나 다를까, 파이어 애로우를 피하려고 몸을 비틀던 박쥐가 마법을 한 발 맞았다.
“······버틴건가?”
일반적인 몬스터라면 박쥐 구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을 텐데.
녀석은 살짝 주춤하는 것 말고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잡아야 한다.’
놈이 민가 쪽으로 빠져나가면 곤란했다.
그리 강하지 않은 몬스터인 줄 알고 파이어 애로우 같은 저급 마법으로 상대했지만.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김종우가 손바닥을 펼쳤다.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박쥐의 눈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파아아아아-!
공격 마법을 쓰던 김종우가 이중 마법으로 베리어를 펼쳤다.
“······흐음.”
베리어로 레이저를 막아낸 직후.
마법을 장전한 채 다시 하늘을 봤을 때는 박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이 근방에 박쥐 형태의 몬스터가 한 마리 풀렸다. 샅샅이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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