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마
게이트에서 나온 트롤들은 내가 전부 정리했다.
다른 헌터들도 있기야 있었지만 대부분 무기 한 번 휘두를 일도 없었다. 그 전에 트롤들이 내 혈폭에 맞아 죽어 버렸으니까.
다만 곁에서 지켜보던 헌터들은 나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면과 로브로 얼굴을 가린 상태. 떳떳한 헌터라면 결코 하지 않은 일이었지.
하지만 직접 와서 문제 삼는 헌터는 없었다.
집채 만한 트롤들을 터트려 버린 후였다. 저 사람들은 그걸 직관했고.
가면 좀 썼다고 빌런으로 몰기에는 무서울 테지.
‘데케레프. 마석 먹고 와.’
- 예!
난 자리에 남아 데케레프에게 마석을 먹고 오라고 시켰다.
트롤들은 거의 다 내가 잡았다. 그러니 마석에 대한 소유권도 내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남겨줄까.’
모든 트롤을 내가 사냥한 건 아니었다.
안유진을 비롯한 다른 헌터들이 잡은 트롤들도 있기는 있었지.
그래서 적당히 선을 긋고, 그 선 바깥에 있는 트롤들의 마석은 건들지 않았다.
데케레프는 은신 상태에서 마석을 섭취했다. 헌터들은 데케레프가 마석을 먹는 줄도 몰랐다.
마석을 먹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주인님, 트롤의 피도 제가 모아 갈까요?
‘트롤 피?’
- 예. 트롤 피는 재생 포션의 주 재료입니다. 제 몸에 피를 보관할 수 있으니 가져가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겁니다.
데케레프는 몸에 피를 많이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트롤의 피는 나도 알 만큼 유명한 재료였다. 약간의 가공만 거치면 곧바로 포션으로 만들 수 있다고 들었지.
여태까지 포션 따위 없이 잘 살아왔지만, 언제 필요해질지 모르는 법이었다.
당장 다치기라도 하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만든 다음 판매해서 돈으로 바꿔도 됐고.
어차피 데케레프가 보관할 수 있다고 하니 그냥 맡겼다.
그렇게 트롤들의 피를 모기처럼 쪽쪽 빨아 먹은 데케레프.
수 십 마리가 넘어가는 집채만한 트롤들의 피를 전부 빨아 먹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들었다.
마석을 먹을 때와는 다르게 시간이 꽤 들었다.
‘이제 호텔로 복귀할까.’
당당하게 걸어서 돌아가긴 힘들 거 같았다. 이대로 호텔로 들어가면 내가 호텔에 묵고 있다는 걸 다른 헌터들에게 소문 내는 행위였으니까.
어디 외진 곳에 숨어서 데케레프한테 소환시켜 달라고 해야 할 성 싶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료, 료스케 형님! 도망치십쇼!”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 일본어라서 뭐라는 건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뒤에는 안유진을 비롯한 헌터들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 주인님, 주인님과 옷이 똑같습니다.
옆에 선 데케레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달려 온 남자의 로브가 나와 똑같았다.
‘이 로브 주인하고 연관 있는 사람인가?’
참고로 이 로브 주인은 죽었다.
내가 죽인 건 아니었고 칼들고 달려드는 걸 데케레프가 제압했었다.
아무래도 그 로브 주인하고 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달려오던 남자가 발을 헛딛여 넘어졌다.
그 뒤로 달려오던 헌터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헌터 중 가장 선봉에 선 건 안유진.
안유진과 나는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떡하지?’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내가 이 빌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부터 증명해야 했으니까.
설령 증명한다고 해도, 각성자임을 밝혀야 했다. 데케레프 때문에 각성자라는 걸 밝히는 건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나?’
아니. 감당 안 됐다.
헌터랑 싸웠다가 그 여파가 얼마나 클 줄 알고.
애초에 싸우다가 역으로 얻어 맞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내 혈폭은 강력한 화력을 지녔기는 했지만 쿨타임이 있었다.
흡혈, 혈갑, 혈폭 삼중 콤보를 딱 한 번만 버티고 나한테 달려들면 골치 아파졌다.
나는 혈폭 덕분에 압도적인 공격력을 지닌 상태였다. 특히나 트롤의 피가 바닥에 깔려 있는 지금 상태에서는.
야수왕의 반지로 혈폭의 리스크인 피로를 없애 버렸기에, 이만큼 강력한 공력을 난사할 수 있었지.
그에 비해 방어 능력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혈갑을 두르는 게 끝이었지.
‘그리고.’
내가 진짜 빌런도 아닌데 헌터랑 싸움을 벌려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내릴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데케레프, 도망치자.’
데케레프에게 매달려 고속 비행으로 도망쳐 버릴 생각이었다.
하늘로 도망치면 쫓아오기 어려웠으니까.
어디 건물 옥상에 숨으면 되겠지.
손을 들어 신호했다.
데케레프가 내 손을 낚아채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오르며 헌터들을 확인했다. 쫓아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헌터들의 시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
박쥐를 타고 멀어져가는 사내를 보며, 헌터들은 자리에 멈춰 섰다.
“자, 잡을까요?”
어느 헌터가 말했다.
하늘로 도망쳤지만 잡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헌터는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지녔다. 안유진 작정하고 뛰어오른다면 붙잡아 볼만도 한 위치였다.
아니면 화살을 쏘아서 요격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하지만 안유진이 저지했다.
“······아니. 싸우면 안 돼. 트롤들만 수거해서 돌아가자.”
그녀는 식은땀을 훔치며 남자가 날아간 곳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째서 싸우지 않고 동료를 둔 채 도망간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트롤을 잡다가 체력이라도 빠진 걸까.
아니면 이만한 헌터들과 싸우는 건 부담이 되었던 걸까.
트롤들을 터트리던 실력을 생각할 때, 후자는 아닐 것 같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국내의 여러 빌런에 대해서는 꿰고 있는 안유진이었다. 협회 소속 헌터는 빌런과 싸울 일이 많아서 모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피를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빌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해외 쪽에도 저런 빌런이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었고.
그저 자이언트 티라노와 싸울 때 폭발을 일으켰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할 뿐이었지.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놈을 심문하면 나오겠지.”
바닥에 넘어져 있는 빌런이 있었다.
방금 도망친 사내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
이 놈을 심문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 수 있으리라.
안유진은 즉시 헌터 협회에 연락을 넣었다.
“여기, 데려갈 빌런이 있으니까 지원 부탁해.”
빌런은 일반 범죄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각성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파급력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빌런들은 조직을 결성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기에, 의례적으로 고문을 통해 조직의 정보를 얻어내는 게 허용되었다.
빌런 조직은 사회에 커다란 암덩어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때문에 빌런의 정보를 얻어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하나 더. 수배 해야 할 빌런이 하나 있어.”
안유진은 피를 폭파시키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이튿날 아침.
뉴스 기사에는 떡하니 내 이야기가 올라가 있었다.
내가 트롤을 잡는 도로 CCTV 영상과 함께, 가면과 로브를 쓴 내 모습이 공개되었다.
“······하아. 씨발 어떡하냐?”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읽으며 중얼 거렸다.
사실 트롤 잡았다는 기사만 나가면 별 상관 없었다.
근데 문제는 뒤에 있는 내용이었다.
[부산서 나타난 빌런, S급 빌런으로 지정.]
[S급 빌런, 별칭 ‘혈마(血魔)’.]
[S급 헌터 도승철, 혈마에 대해 언급.]
하루 아침에 빌런 중에 제일 높은 S급 빌런이자, 혈마가 되어 있었다.
어제 밤에 헌터들과 대치했을 때부터 느꼈다. 날 빌런으로 보고 있다고.
근데 바로 다음날 아침에 뉴스까지 뜰 줄은 몰랐다.
“······혈마는 또 뭐야? 무협지야?”
빌런 중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빌런도 많다고 했다. 그런 경우 별명 같은 걸 정해서 분류한다고 했지.
그렇게 나는 혈마가 되었다.
“혈귀 다운 멋진 별명이십니다!”
옆에서 데케레프가 인간 모습으로 박수를 쳤다.
“좋아 할 일 아니다 임마.”
빌런도 헌터처럼 급이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파악하기 쉽게 만들어 둔 걸로 알았다.
나 같은 경우는 S급.
S급 빌런으로 지정된 건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S급 헌터라면 또 모를까.
“아니······ 내가 뭐 사람을 죽였나?”
죽이긴 했다. 나한테 단검들고 달려들던 빌런 놈 하나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빌런 하나 잡았다고 S급 빌런으로 지정될 게 뭐란 말인가.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수여하는 거면 모를까.
아마 그것 때문에 빌런 취급을 받는 건 아닐 것이었다. 뉴스 기사에도 살인에 대한 내용은 일절 없었다.
다만 빌런 등급은 죄질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빌런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내가 S급 정도의 실력이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
내 실력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애매했다.
“······내가 생각보다 강하더라.”
솔직히 S등급 빌런이라고 할 정도에 실력이 있냐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S급 빌런이라면 S급 헌터와 맞붙어서 싸울 정도라는 건데 도승철이나 김종우 같은 헌터들을 이길 자신은 없었거든.
하지만 상당히 강한 편임은 틀림 없었다.
헌터들이 고전하고 있던 트롤을 쉽사리 날려 버렸으니까.
물론 그건 상성의 덕택이 컸다.
트롤은 몬스터 중에서도 특히나 덩치가 컸고, 피가 많은 녀석들이었으니까.
피가 그렇게 잔뜩 깔려 있는 상태라면 혈폭의 화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어쨌든 트롤을 쓰러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내 강함을 알 수 있었다.
“주인님은 강하십니다. 혈귀는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최고의 강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데케레프가 얘기했지만, 강하다는 게 꼭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강한 힘을 쓰다가 어쩌다보니 빌런이 되어 버렸으니까.
“지난 번에 탑에 대해서 말했던 거 있지? 그거 다시 말해줄래?”
데케레프에게 물었다.
얼마 뒤에 서울에 올라서게 될 탑에 대해서.
“탑에 흥미가 생기신 겁니까?”
“그래. 여차하면 내가 그 탑을 올라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탑을 공략하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원래 탑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S급 헌터들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거라고 믿었지.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더 강했다.
내가 탑을 공략하는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게 냅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좋은 선택이십니다. 탑을 공략하면서 얻는 보상으로도 강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탑에 보상이라는 것도 있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상은 먼저 공략하는 사람에게 쏠리게 되어 있지요.”
이왕 공략할 거면 가장 먼저 공략하는 게 좋다.
데케레프는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 이후로도 탑에 대해 자신이 아는 부분을 설명했다.
탑 안에는 탑의 원주민들이 있고,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매층마다 위층으로 가기 위한 퀘스트를 완료해야 한다고 했지.
“퀘스트의 내용을 알 수는 없는 건가?”
탑을 공략한다는 건 위로 올라간다는 것.
위로 올라가기 위한 조건을 먼저 알아낼 수 있다면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그게 탑은 몇 가지 공통점만 제외하면 각기 다른 형태를 띄어서······ 저도 지구에서 나올 탑 내부에 뭐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데케레프가 아는 건 탑에 전체적인 윤곽 정도에 불과했다.
자세한 건 내부에 들어가서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데케레프가 내게 다가오더니 팔목을 걷었다.
“주인님께 수혈을 해드릴 수 있는데, 바로 해드릴까요?”
트롤의 마석을 먹으며 수혈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생긴 모양이었다.
트롤은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인데다, S급 게이트에서 나온 만큼 가지고 있던 마석도 많은 마력이 함유되어 있었겠지.
“그래.”
데케레프에게 팔을 내밀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