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데 라만차
하게베의 눈이 부셨다. 그의 앞으로 빛줄기 하나가 떨어졌기 때문인데, 그가 시린 안구를 비비며 시력을 되찾을 때쯤 발광하던 기둥은 잦아들고 사내 하나가 서 있다. “안녕하세요.” 그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반응이 없다. 헐벗은 그는 갓 부화한 병아리가 채로 처음 마주한 세상을 멀뚱멀뚱 쳐다보듯 주위를 살폈다. 하게베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담요를 건네며 자신이 앉고 있던 나무그루터기를 양보했다. 그는 가을 단풍 숲의 찬기를 느꼈기에 담요를 몸에 두르고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자신의 성에서 검술 연습하고 있던 그는 어느새 숲 한가운데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청년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낯선 언어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낯선 언어였지만 그 말로 유창하게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그 언어가 모국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무슨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이 딴 세상에 왔다고 직감했다. 그는 정보가 필요했기에 금실로 글씨가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는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 실례지만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몇 년입니까?
청년:(당연하다는 말투로) 에스페쿠에르 제국이고, 스물하고 마흔아홉 해죠.
노인: 뭔 기준이오?
청년: 예?
노인: 뭔 일이 있은 지 육십하고 열일곱 해인지를 묻는단 말이요.
청년: 당연히 우리 여신께서 이 땅에 내려온 지 2049년이 되었는걸요.
노인은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이 낯선 세계에 떨어졌음을 새삼 실감했다.
노인: 소개가 늦었소. 나는 돈키호테 데 라만차, 둘시네아 공주님을 모시는 기사요, 수상한 노인네에게 선뜻 담요를 건네준 선의에 감사하오.
청년: 하게베에요. 그냥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는 자신의 지벤이라는 성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날이 저물어감을 깨닫고 마법 지팡이로 모닥불을 피웠다.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광경을 본 돈키호테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돈키호테: 그대는 요술을 부릴 줄 아는구려!
하게베: 요술이 아니라 마법이에요.
돈키호테: 둘이 다른 거요?
하게베: 후자가 더 낭만적으로 들리잖아요.
돈키호테: 그렇군, 그렇군. 논리적이야.
신의 난처한 장난질에 혼란스럽던 노인은 복잡한 생각 따위 잊고 신이 났다.
돈: 이제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소. 앞서 말한 우리 공주님은 저주에 걸려 계시오. 내가 아무리 저주를 풀려고 해도 부질없더니, 원래 세상의 것이 아니니 풀 수 있었을 리가. 신이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게야. 분명히 이 땅에 공주님에게 위해를 가하는 원흉이 있을 것이다. 그래, 풍차야, 풍차 네놈이 범인이렷다. 모든 악한 일은 풍차가 벌이는 짓일 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돈: 하게베여, 마음 같아선 나 홀로 빠르게 이 시련을 헤쳐나가고 싶으나, 내가 이 세상에 지식이 조금 부족하네. 따라서 내 자네의 선량함과 불을 다루는 마법을 높이 사 나의 종자가 될 기회를 주겠네. 나와 함께 풍차를 물리치겠는가.
돈키호테는 하게베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곤 근엄하게 말했다.
하: (우렁차게 소리치며) 물론입니다. 이 한 몸 풍차라는 이름의 악마를 무찌를 때까지 쉬지 않을 겁니다.
하게베가 이 수상한 정신병자 노인네의 맥락 없는 제안을 호구처럼 수락했다. 그는 돈키호테가 신의 사자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빛의 기둥에서 나타난 신비로운 등장, 당당히 종이 되라 요구하는 뻔뻔함, 풍차라는 단어를 마왕을 암시하는 암호라 생각한 그의 헛다리가 섞여 그의 머릿속에서 돈키호테는 이미 신이 내린 용사였다. 귀족 가문의 장남이나 돼서 철없이 마왕을 무찌르러 모험 길에 오른 그의 뒷배경도 이런 망상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는 노을 지는 풍경 앞에서 돈키호테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종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오늘이 자신 인생에 있어서 가장 멋진 날이라 착각했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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