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1
산초와 돈키호테는 여관에 딸린 주점에서 보리주와 맥주를 시켰다. 돈키호테가 산초한테 투명한 술이 무엇이냐 묻자 산초는 맥아로 만든 증류주라 답했고, 돈키호테는 투명한 위스키 원액을 마셔보고 싶다며 자신도 그걸 시켜달라 했다. 위스키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독해서 못 마실 거라고 산초가 거절하니 서로 한동안 티격태격했다.
주점 구석에서 귀가 긴 여성이 주정 강화 와인을 마시며 한숨을 푹푹 쉰다. 어찌나 크게 쉬는지 돈키호테의 눈에 들고 말았다. 여인은 갈색 머리에 엘프치고는 귀가 약간 짧았다.
산: 저 인간 어지간히도 한숨을 쉬네요
돈: (산초의 머리를 한 대 치며) 야 이놈아, 엘프한테 인간이 뭔가. 인종을 헷갈리는 건 상대한테 무례한 짓이네.
산: (성질이 난 말투로) 직립보행하는 지성체는 다 인간이라고 부르거든요.
돈키호테는 얼른 자리를 뜬다.
돈: (술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어이 엘프 양반, 뭐 그리 고민이오? 내가 다 해결해 드리리다. 나는 돈키호테 데 라만차요.
엘프: 저는 악카아엘래 노베밀라입니다. 저는 엘프가 아니라 혼혈인데 정말 들어주시겠나요?
돈: 자네를 엘프로 오해한 점 사과하네.
노: 아뇨, 사과받으려고 말한 건 아니고. 제가 혼혈인데 같이 술을 마셔도 되겠습니까?
돈: 당신의 혈통이 무슨 상관이오. 내가 궁금한 건 그대를 옥죄는 고민이 무엇이냐는 것이오.
노: 하하, 감사합니다.
돈: 감사할 것까지야.
그럼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혼혈입니다. 제 혈통에 관심 없으시겠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꼭 해야만 하니까 이해해주세요. 집을 나선 지도 수년이니까 편하게 그때를 기준으로 하자면 제 인간 어머니가 일흔셋에, 엘프 아버지가 백아흔일곱이었을 겁니다. 제가 막 쉰하나가 돼서 성인이 되던 해였으니까요. 그때도 지금도 저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아버지에게 먼저 고백한 어머니에게는 화가 나고요. 그렇잖아요. 어머니가 죽고 나면 아버지는 쓸쓸하게 수백 년을 그리워해야 한다고요. 어머니는 자기는 건강해서 백 살도 넘게 산다고 하시는데,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는 궁정 마법사셨으니까 오래 사시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겐 너무도 길 세월이겠죠. 노년의 티가 나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매번 자신이 죽으면 새사람을 만나라고 했어요. 저는 그럴 때마다 무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혼이 확정된 결혼이라니. 자기는 죽으면 그만이겠죠. 이래죽고 저래죽는 요즘 시대에 재혼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른 이야기잖아요. 그들에겐 백년해로할 가능성이 있는 거죠. 우리 가정에는 없는 것이면서. 천국을 믿는 신실한 아버지는 “내가 재혼하면 죽어서 당신을 무슨 낯으로 보게.” 하면서 웃으셨죠. 저는 아버지까지 미워할까 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심정으로 집을 떠났어요. 제가 아버지보다 일찍 죽게 될 테니까요.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을 보여 줄 수는 없죠. 저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저를 필요로 하는 남쪽 나라에 정착했어요. 그림을 제가 기가 막히게 그리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를 비웃으셔도 좋은데, 자식은 부모의 가장 싫은 점을 닮는다고 저도 인간을 사랑하고 말았네요. 단골 빵집의 점원이던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빠지고 말았죠. 저는 그를 향한 사랑을 깨닫자마자 그 빵집으로의 발을 끊었어요. 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백여 년을 더 살 자신 없었거든요. 그런데 상사병에 가슴이 미어지는 겁니다. 고열을 며칠 앓고 나니 차라리 그리워하는 게 낫겠더군요.
그래서 다시 그 빵집을 찾아갔고, 그는 저에게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말했어요. 저는 고백했고요. 이 뒤에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하고 싶으나 주제와 벗어나니 참을게요. 그렇게 사랑을 키우던 중 악몽을 꾸었어요. 어머니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모습과 아버지의 초상화를 번갈아 보면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꿈이었죠. 꿈이면서 사실이었고, 그제야 기억난 제가 외면한 현실이었죠. 중년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저에게 우는 모습을 들켰어요. 홀로 남겨지는 사람만 괴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 뒤로 그녀의 웃음을 볼 때마다 개운치 못했죠. 그래서 저는 그녀에게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묻고 싶거든요. 어떻게 사랑하셨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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