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에 대장은 잠시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그가 연설했다.
어제의 지옥 같던 전투 후에도, 곧 닥쳐올 녹색 밀물 앞에서도 새벽을 비추는 햇살은 이리도 고요한가. 하지만 저 햇살이 이 대지를, 고향을, 가족들을 고요히 비출 수 있는 이유는 태양이 따스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이 이 먼 타지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밤의 나눴던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저는 평소에 살갑게 대하지 못했는데,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과 원치 않는 작별을 고할까 봐. 이제 그런 걱정은 내려놓을까 합니다. 제가 이런 걱정을 안 한다고 해서 여러분과 제가 모두 무사히 전역할 수 있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이르게 여신님을 만나게 되겠죠.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닐 겁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다들 제 위치에 서서 적습을 대비하고 있다. 오크도 숙영지에서 나와 기지 앞에 징그럽게 모여있다. 적들은 오늘도 성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나무에 인챈트 된 쇠창살을 가로로 덧댄 문은 이미 적들의 난도질로 너덜너덜하다. 쇠창살에는 ‘여신이여, 가여운 우리를 굽어살피소서’라고 적혀있다. 대장은 외성에서 좀 더 버틸까를 고민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적어도 나흘은 밖에서 버텨야 했다. 내성이 너무 좁아서 내키지 않았으나 병력이 너무 줄어서 방도가 없었다. 병력을 온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문이 부서질 때쯤 대장은 곧장 내성으로 대피를 명했다. 오크들은 외성을 점령하고 내성을 공략했다. 내성은 외성보다 높고 천장도 막혀있다. 내성의 좁고 미로 같은 통로로 병력을 밀어 넣으니 복도가 꽉 막힌다. 적들도 더 높은 사다리를 만들고, 벽을 기어오르고, 석재벽돌을 뽑는 등 대책을 내놓고는 있다. 대장은 감시탑 꼭대기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빠져있다. 그런데 관문 쪽에서 인간 무리가 보이는 것이었다. 고개를 휘젓고 다시 바라봐도 백 명이 될까 말까 한 인간의 군세였다. 그들은 오크 부대와 조우 하자마자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병, 보병, 모험가, 마법사, 목줄을 한 도마뱀 마물과 사육사, 궁수가 섞인 오합지졸로도 보이는 부대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오크들은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바람 마법사가 일으킨 돌풍과 기병들의 위협적인 돌격에 흩트려진 전열에 보병들이 그대로 들이박았다. 적의 사기를 깎기 위해 궁수도 활을 들고 돌격했다. 그들에게 직접 칼을 맞댄 오크는 소수였다. 그러나 그 소수가 무너지자 그 주변이 무너졌고, 그 주변은 더 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두려움을 모르고 싸우던 오크도 그 광경에 당황한 것인지, 적과 싸우다 죽을 수는 있어도 아군에게 밟혀 죽는 것만큼은 싫은 것인지, 그들의 돌격이 오크조차 겁먹게 만든 것인지, 철옹성 같던 그들의 사기가 사실은 계속된 출혈에 금이 가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공포가 그렇게 전염되기 쉬운 것인지 적들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밟아 죽일 지경이었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대장은 즉시 수비군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언제 적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할지 모른다. 기회가 왔을 때 단숨에 쳐야 했다. 무엇보다 평야의 오크를 몰아내도 성벽 안에 주둔한 오크 군이 남아있다. 그것들이 성벽 안쪽에 농성하면 다시 장기전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수비군도 한 번에 공세를 펼칠 계획을 세웠다. 일부는 내성 입구의 적을 밀어내며 나아갔고, 돈키호테 일행은 창문에 밧줄을 매달고 내려가 적을 공습했다. 우선 밧줄을 내리고 돈키호테와 토비가 내려갔다. 산초가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 화염구를 날려 그들을 호위했다. 밧줄에 매달린 돈키호테에게 적의 이목이 쏠린 사이 로시난테는 성벽의 울퉁불퉁한 곳을 밟고 재빠르게 내려가 허를 찔렀다. 덕분에 둘은 무사히 벽을 타고 내려왔다. 그들은 외성 위의 적들을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고지에서 아군이 패퇴하는 것을 목격한 그들은 이미 호수로 뛰어내려 도망가고 있다. 오크를 한참을 죽이고 나서 저쪽 부대와 이쪽 부대가 만나게 됐다. 적은 이미 모두 도주 중이었기에 서로 밥이나 먹자고 했다. 돈키호테가 저쪽 대장에게 어찌 도우러 왔냐고 물었다. 그들은 동료를 버릴 수 없었던 자들만 소수 모아서 왔다고 답했다. 근데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선봉대장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다들 똥이라도 싸러 갔냐며 농담을 했지만, 점점 그가 안 보일수록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얼마 후 오크들 시체 사이에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체를 보니 아마도 후방에서의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오크의 시체를 모아서 불태우고 아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수비대는 당장 내일모레 길을 떠나야 하는 돈키호테 일행을 배려해 쉬하고 한다. 시신은 내일 근처에 묻어 장례를 치를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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