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류
돈키호테 일행이 옆으로 쓰러져 잔해만 남은 감시탑 터에 저녁이 되어야 도착했다. 돈키호테는 주변에서 가장 높이 솟은 나무를 올랐다. 마왕을 비석이 놓여있을 답습의 폐허가 눈에 보인다. 폐허 주위는 해골 병사들이 잡초를 뽑는지 탁 트여있다. 더는 숨어서 나아갈 수 없어 보였지만, 그건 내일 일이고 그는 일단 쉬고 싶었다. 그는 나무에 내려와서 비교적 온전한 벽에 등을 기대서 비스킷을 씹었다. 산초는 마법으로 연기 없는 불을 피워 물을 끓였다.
돈: 오늘 진짜 재수가 나빴어. 아니 적을 만나서 뒤로 뛴 곳에 적이 또 있고, 다시 꺾어서 도망가니까 거기 또 해골이 있네. 틈 사이로 뛰는데 뒤통수 붙잡히는 줄 알았다니까.
토: (육포를 질겅이며) 그만큼 적들의 밀도가 높아진 거요.
토: (산초가 건넨 세네프를 마시며) 마실 거 없이는 마른 음식이 안 넘어가.
로시난테가 세네프에 먹던 육포를 뱉어 우리고 있다.
?: (벽 건너편에서 벽을 똑똑 치며) 저기 혹시 사람이세요?
?: (건너편에서) 첫인사가 그게 뭐야. 그럼 말하는 해골이게.
?: 혹시 모르잖아. 함정일지
?: 함정이면 퍽이나 “나 말할 줄 아는 괴물입니다”라고 하겠다.
?: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만 싸우지. 저희는 여러분처럼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삼 인인데요, 실례가 안 되면 그쪽에서 같이 밥을 먹어도 될까요.
돈: 물론이오. 오히려 이런대서 같은 모험가를 만나니 반갑소.
돈: (속삭이며) 다들 괜찮지?
산: (피식 웃으며) 그걸 먼저 물어야죠. 상관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나쁜 짓 할 위인이 이겠어요?
벽을 돌아서 세 명이 들어왔다. 활을 맨 금발 벽안의 사내, 갈색 머리에 볼에 큰 반점이 있는 허리춤에 소형 방패와 직도를 든 여인, 까무잡잡해서 이 땅에서 이국적으로 보이는 원형 방패와 직도를 든 사내였다. 서로는 세네프와 말린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눴다. 원래는 다섯이서 출발했다고 한다. 셋은 모두 북쪽의 항구 도시 출신인데 이국적인 사내는 어릴 때 먼 나라에서 종교 문제로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그냥 눌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나머지 사내의 이름은 디즈네프 트헤즈, 여인의 이름은 아게테 첸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잘 따르는 로시난테가 신기한 듯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내일 서로 협력해서 싸우자는 얘기로 넘어갔다. 전투의 들어가기까지의 작전술, 진형, 전술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다들 말수가 줄어들었다. 서로 대화하기는 어색하고, 평소대로 자기들끼리 대화하기도 무안했고, 결전의 순간을 앞두고 긴장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나름대로 숱한 전장을 헤쳐온 이들이었지만 새로운 싸움은 새로운 걱정을 낳는 법이었다. 특히 마지막 한 계단을 남겨둔 이만큼 발을 헛디디기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일이면 험난한 여정도 좋은 쪽이던, 반대건 막을 내린다. 누군가는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라며 날뛰는 맥박을 다스리고 있다. 신경은 내일로 쏠려 있는데 시간은 오늘이다. 내일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비추기를 바라면서 내일의 불운한 돌부리가 두려운가. 어째거나 오늘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간다. 누군가는 그 느긋한 흐름에 정신은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침묵을 참을 수 없었는지, 돈키호테의 투구가 너무 눈에 띄는지 첸이 말을 걸었다.
첸: 저기 그 샛노란 투구 말인데요...
돈: (말을 자르며) 오 걸작을 한눈에 알아보시는구려. 이건 드래곤이 만든 투구요.
첸: 네?
돈: (투구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거 일단 보시오.
투구의 용언으로 적힌 글자들이 영롱하게 빛났다.
셋은 그 불가해한 빛깔에 감탄하려는 순간 토비가 돈키호테의 빛나는 원뿔 뒤쪽을 올려쳐서 투구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토: 영감, 당장 마나를 감추쇼.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발각되고 싶소?
돈: 깜짝이야, 말로 하면 되잖아.
토: 나야말로 놀라서 그랬지.
첸: 죄송해요, 제게 괜히 물어서.
돈: 내가 경솔했던 탓이오. 그래도 말할 건 말해야지. 며칠 전 동굴에서...
그는 자신이 드래곤을 만나 인챈트를 수리한 얘기부터 수상한 상인에게 이것을 산 얘기까지 역순으로 사실보다 훨씬 과장된 보따리를 풀었는데, 산초와 토비가 딴지를 걸려다가 이미 용언의 기묘한 빛깔에 매료되어 순진한 아이의 눈을 한 그들을 보고 참기로 했다. 그들은 마왕을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거냐며 기뻐했다. 그런 기대에 그들의 표정이 풀리는 듯했다. 희망은 좋은 거였다.
눌: (트헤즈를 향해) 저렇게 대단한 게 있으니 네 활 자랑은 물 건너갔겠다.
트: 내가 언제 그랬다고.
돈: 좋은 활인가 보오.
트: 네, 언옵테늄 합금으로 만들었거든요.
눌: 봐봐 또 신나서
트헤즈는 짜증을 내려다가 참았다. 대신 돈키호테 일행에게 안 보이게 고개를 돌려 눌을 향해 입으로만 욕을 했다.
산: 언옵테늄 그 귀한 광물이요?
트: (등 뒤에 활을 꺼내며)한 번 보시겠어요?
산: 물론이죠.
토: (구경하려고 산초에게 다가가며) 귀족들이 사용하는 건 몇 번 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집이 잘사나 봅니다.
트: 아버지가 연금술사여서요. 언옵테늄이 비싼 건 원료가 비싼 것도 있지만 가공이 힘드니까요. 아들내미가 모험가를 하고 싶다니까 밤새여 합금을 주조하셨죠.
돈: 금도 만들 줄 아시는가?
트: (웃으며) 아니요. 죄송해요, 비웃는 거 아니에요. 그저 그 질문을 진짜 오랜만에 듣거든요. 어릴적 추억이라고나 할까. 연금술사가 가장 많이 만드는 게 뭔지 아세요?
돈: 불사의 영약?
트: 얼음이요. 얼음 장수나 하면서 거창하게 연금술사라고 자칭하죠.
돈: 얼음은 마법사도 만들지 않소?
트: 기술적 차이죠. 목적의 차이이고. 연금술사를 싸우는 법을 모르는 마법사라고 비하하곤 해요.
돈: 산초, 남의 직업을 그렇게 비하하면 못써.
산초는 첸에게 자신의 지팡이에 박힌 루비의 세공법을 가지고 토론한다. 이 형태가 마나 소비는 커도 화력은 최고라나 뭐라나. 토비는 눌과 로시난테를 쓰다듬고 있다. 눌은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에 대해 설명했다.
트: 화내실 거 없어요. 어느 정도 사실이니까요. 실제로 애매한 마법 재능이 애매한 이들이 주로 연금술사를 하죠. 아버지는 그래서 연금술사라는 표현을 싫어해요. 납으로 금을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직업으로 스스롤 자칭하는 걸 허세라고 생각하거든요.
돈: 장인의 고집이 있으시군.
트: 말도 마세요. “나는 기술자야, 그 자체에 자부심이 있다고.” 귀에 못 박히듯 말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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