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으로 향하다

잔은 전에 배정받았던 밀레성 내부 객실에 와 지친 몸을 앉혔다.
여기저기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긴, 타보지도 않았던 말을 타고 그 먼거리를 종횡무진 누볐으니 없던 몸살도 날 법 했다.
뻐근한 허리를 툭툭 치며 의자에 몸을 기댄 잔은 부푼 마음을 간직했다.
이틀 뒤면, 드디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요셉을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요셉은 어떻게 컸을까?
이런저런 얼굴을 그려보고 있는데, 별안간 일전의 바람소리가 잔의 귓가에 머물렀다.
'찬송가....'
잔은 가만히 앉은 채로 들려오는 성스러운 소리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노라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처음, 성당 고해실에 새겨졌던 '프랑스를 구해라' 라는 계시나, 성경의 구절에 대한 계시는 잔이 읽을 수 있었다.
워낙 간단한 단어였고, 성경 구절은 매번 미사 때마다 신부님께서 써서 보여줬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계시는 전부 귓가에 누군가 속삭이는 형태로 들려왔는데, 이번에도 같았다.
잔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
한동안 성스러운 시간이 지나자, 별안간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잔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왕의 시종 장 돌롱이었다.
"아, 성녀님. 여기, 전하께서 내리신 검과 스탠더드(*높이 3피트, 넓이 12피트의 커다란 깃발)와 종자입니다."
장 돌롱이 손에 들고 온 물건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기다란 스탠더드에는 성녀를 상징할 만한 천사의 그림이 양쪽에 그려져 있었다.
검은 양날의 직검이었는데, 잔이 뽑아 드니, 그런대로 쓸만한 철검의 형태였다.
검의 크로스 가드(*손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코등이)가 길쭉하니 컸고, 검면은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아 깨끗했다.
잔은 검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더니, 장 돌롱을 향해 물었다.
"제 검을 찾아다 주실 수 있나요?"
장 돌롱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왕께서 주신 검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제게 싸우러 가기 전 준비를 위해 검과 종자와 스텐더드를 내리신 것처럼, 하늘의 왕께서도 제게 검을 내리셨어요."
장 돌롱은 눈을 감고 '주여.'를 외친 후 다시 눈을 떠 물었다.
"정말... 정말로 성녀님이 맞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하늘의 왕께서 검을 내리셨다니.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성당의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하십니다."
잔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성당의 이름을 말했다.
장 돌롱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거기에 검이 있다고?
자신이 알기로, 그 성당의 제단 뒷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성녀의 말이었으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예... 오늘 출발하면 아마 내일쯤은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제게는 소중한 검이거든요."
그리고 잔은 이어서 말했다.
"아, 혹시 글을 쓸 줄 아시나요?"
"조금은 쓸 줄 압니다."
"그럼 제가 이르는 대로 받아 적으세요. 성당 사제님들께서 검을 주시지 않으면 이 편지를 건네주세요."
잔이 이르는 대로 편지를 받아 적은 장 돌롱은 고이 접어 품 속에 넣었다.
"그럼 푹 쉬세요. 저는 검을 찾는 즉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장. 혹시 제 종자는 정해졌나요? 누구인가요?"
장 돌롱이 나가려다 말고는 뒤를 돌아 웃어보였다.
"접니다."
"···장은 전하의 시종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만, 전하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잔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주님께서 든든한 아군이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장을 얘기하는 거였군요!!"
너무나도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화답하는 잔을 보고, 장 돌롱은 덩달아 기뻤다.
자신을 이리도 환영해주다니.
성녀의 종자라는 자부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었다.
잔의 입장에서도 아예 생면부지의 사람이 종자가 되는 것보다야, 푸아티에로 함께 가며 친해졌던 장 돌롱이 종자가 되는 게 더 반가운 일이었다.
*
다음 날.
장 돌롱은 정말로 생트 카트린의 검을 찾아왔다.
하지만, 검면이 매우 낡고 녹이 슬어 있어, 조심히 옮겨오는 데 애를 먹었다.
잔의 객실 앞에 당도한 장 돌롱은 마치 자신이 오리란 것을 알았다는 듯 객실을 나온 잔과 마주쳤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리신 성검이군요."
장 돌롱은 잔을 보자마자 격앙되고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그 제단 뒤의 검에 대해 말하니 사제님들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습니다. 그 검의 유무를 어찌 알았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성녀께서 일러주신 편지를 보여드렸더니 글쎄 쥐를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시며 이 녹슨 검을 주셨습니다. 이게 그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내려온 검이랍니다. 주인도 모르고, 절대 누군가 찾기 전까지는 만지지도 말래서 녹슬어 가도 그냥 두셨다는데. 이게 거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잔은 신난 표정의 장 돌롱을 보고는 온화하게 웃더니 검을 받아 들었다.
정말로 녹이 슬어 당장은 쓸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날이 상한 모습은 일절 없었다.
"주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정말로 대화를 하시는군요?"
"안 믿고 있었어요?"
장 돌롱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성녀님의 진위를 의심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주님께 기도를 올리려고요."
잔은 검을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녹이 슨 생트 카트린의 검을 두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여, 주님께서 하사하신 검을 얻었습니다. 악인을 단죄하고, 프랑스의 아비규환을 끊어낼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를 하자마자, 전처럼 성스러운 찬송가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잔은 또 한 번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경험을 했다.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앞에 있던 검에 어떠한 변화가 끼쳤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잔은 아마포로 만든 손수건을 들어 검면을 스윽 닦아냈다.
거짓말처럼, 손수건이 지나는 자리마다 녹이 벗겨지고 광택이 흐르기 시작했다.
잔뜩 슬어 있던 녹은 마치 방금 내려 앉은 먼지라도 되는 양 말끔하게 벗겨졌다.
전부 닦아내니, 방금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쩡한 하나의 양날 직검이 눈앞에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이 상한 곳이 없다.
손가락을 튕겨 검면을 쳐내니, 지잉- 하는 기분 좋은 공명음이 들려왔다.
잔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로 기도를 끝마쳤다.
주님께서 하사하신 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기에 이 검은 쓸 일이 없을 테지만, 잔은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람을 죽이라 내리신 검이 아님을.
전쟁을 이기고 프랑스 사람들을 구원하라 내리신 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녹을 전부 벗겨내고 객실 밖으로 향하니, 놀란 토끼눈을 뜨고 있는 장 돌롱이 있었다.
"부, 분명 녹이......."
장 돌롱은 제 두 눈으로 보고도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검면에는 다섯 개의 십자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녹이 슬었던 검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이고 또 멋있었다.
"오, 주여."
장 돌롱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잔이 장 돌롱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함께 기도를 해주었다.
오를레앙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
***
다음 날.
오를레앙으로 향할 구원군의 수송 물자가 전부 준비되었다.
잔은 짧게 자른 머리에, 남자의 갑옷을 입고 시농성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바이저를 올린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매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장 돌롱과, 말이 잔의 뒤를 따랐다.
허리춤에는 샤를이 내린 검과, 주님이 내리신 생트 카트린의 검을 찼다.
한 손에 든 스텐더드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천사의 그림과 JESUS MARIA라 적힌 글씨가 울렁울렁 춤을 췄다.
이미 수송대가 서로 모여 멀리서 다가오는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이었다.
가장 먼저 성스러운 분위기를 깨고 나선 사람은 다름아닌 장 2세 달랑송 공작이었다.
"반갑소! 나는 장 달랑송이오! 프랑스의 성녀를 만나게 되다니.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아, 주님께 이 영광을 돌리리."
달랑송은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잔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잔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곧 자신을 향한 인자한 그의 웃음에 마음을 열었다.
"달랑송 공작님을 뵙습니다."
"하하! 내 그대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근데, 정말로 주님께서 프랑스를 구하라 그리 말씀하신 거요? 정말 그렇소?"
잔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아티에 학자들 보다 나으시네요."
"아, 청문회를 하고 왔다 했지? 그 놈들 공부나 할 줄 알고 뽐낼 줄이나 알지. 나는 그대가 왕을 찾았을 때부터 이미 믿고 있었소. 신께서 이 프랑스를 버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
꽤나 호탕하고, 또 좋은 사람이라고 잔은 생각했다.
"내가 구원군의 통솔을 맡았소. 비록 그대에게 병사들이 내려진 것은 아니나, 걱정 마시오. 내가 그대의 말을 존중하고 있으니까."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시는 분이 앞서서 이끄시니 제가 무엇이 걱정이겠어요?"
"하하하! 역시 성녀는 뭐가 달라도 달라!"
이번에는 달랑송의 옆에 있던 한 사내가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질 드 몽모랑시라발입니다. 드 레 남작으로 불리고 있죠. 질이라 불러주십시오. 성녀님."
"질, 반가워요. 잔입니다."
질 드 레 남작은 꽤나 호남형이었다.
잘 생겼다고 잔은 생각했다.
가장 비싸보이는 철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어찌나 광택이 나는지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보이기에는 달랑송 공작의 갑옷보다 좋아보였다.
어찌나 돈이 많은지 잘 보이는 대목이었다.
또 얼마나 돈을 잘 쓰는지도.
그때, 질의 옆에 있던 사내도 자신을 소개했다.
"에티엔 드 비뇰이오! 라 이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소! 내가 떴다 하면 잉글랜드 놈들이 '신의 분노가 다가온다!!!'라고 소리를 쳐대는 통에 그런 별명이 붙었소! 나는 그 별명이 좋으니 그렇게 불러주시오!"
"네. 반가워요. 라 이르."
라 이르는 꽤나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눈썹이 가운데로 몰려 항상 화가 난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목소리도 천둥번개와 같이 커 그냥 들었을 때도 깜짝 놀랄 정도.
가만히만 있어도 화를 내는 것 같은 모습에, 왜 잉글랜드 군이 신의 분노가 다가온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달랑송 공작이 말했다.
"대충 인사 했으면 이제 출발하지. 우리의 첫번째 목표는 뭐요? 잔."
달랑송은 이미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잔에게 물었다.
라 이르와 질 드 레는 그런 점이 퍽 못마땅하게 보였지만 달랑송 공작이 직접 물은 것이니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었다.
잔은 시농성의 성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일단은 구원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를레앙 사람들이 그동안 많이 배고팠을 테니까요."
"그럼 얼른 출발해야겠군."
달랑송은 다시 말에 올랐다.
잔도, 라 이르와 질도 말 위에 올랐다.
프랑스의 성처녀 잔다르크가 함께하는 장 2세 달랑송의 오를레앙 구원군이 출정을 알렸다.
오를레앙으로 향하는 길.
맑은 날씨가 그들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생트 카트린의 검은 좀 더 성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 제 상상이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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